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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일체동관분(一切同觀分- 온갖 것을 분별없이 하나로 봄) 

기자명 진우 스님

과거 마음 사라졌고 미래 마음 오지 않았으니 마음이라 할 게 없다

현재의 마음 또한 인식 순간 지나가므로 마음이라 할게 없어
여래는 중생을 움직이는 본체요, 중생은 여래 움직이는 작용
고락의 질량이 같으므로 고락에 집착 말아야 인과의 덫 벗어

옳고 그르다는 잘잘못에 대한 시비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고락의 시절인연을 언제 만나느냐만 있을 뿐이다. [법보신문DB]
옳고 그르다는 잘잘못에 대한 시비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고락의 시절인연을 언제 만나느냐만 있을 뿐이다. [법보신문DB]

수보리 어의운하 여항하중소유사 불설시사부 여시 세존 여래설시사(須菩提 於意云何 如恒河中所有沙 佛說是沙不 如是 世尊 如來說是沙) 수보리 어의운하 여일항하중소유사 유여시사등항하 시제항하소유사수 불세계여시 영위다부(須菩提 於意云何 如一恒河中所有沙 有如是沙等恒河 是諸恒河所有沙數 佛世界如是 寧爲多不) 심다 세존(甚多 世尊)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항하에 있는 모래를 부처님이 모래라고 말한 적이 있느냐?”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모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항하 강의 모래알 수가 많은 것과 같이, 그 모래알 수만큼 많은 항하의 강이 또 있고, 또 이렇게 많은 항하의 강에 모래알 수와 같이 부처님의 세계가 있다면, 이러한 부처님 세계들은 얼마나 많겠느냐?” “대단히 많겠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질문을 하시고, 대답을 하게 한 이유가 무엇일까? 오안(五眼-육안, 천안, 혜안, 법안, 불안)이 분별없이 여여하여 실무유법(實無有法)인 것을 알리시기 위해, 또 하나의 다리를 건너게 하심이니, 부처님께서는 이를 다시 강조하여 이해를 충분히 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함이시다. 부처님께서 일곱 번이나 물으시고 일곱 번의 대답을 하도록 하시는 것은 의심하는 마음을 잡아내어 집중하게 하신 후, 각자 지닌 지각을 통해 분명히 인식하게 하여, 최후에 신묘히 알려 주시려는 부처님의 변재(辯才)이신 것이다. 왜냐하면 최후의 종착점에 도달하기까지는, 그 길을 정확하게 찾아가게 해야 하기 때문이니, 우선 그 길이라도 찾을 수 있도록 돕기 위함이시다. 그러므로 이러한 길을 찾으려는 견고한 신심과 원력이 있어야 하거늘, 모든 중생들을 구해내기 위한 부처님의 대자대비요, 걸림 없는 무애변(無礙辯)이시다.

기억력이 좋거나 소위 머리가 좋은 사람들은 심각한 오류에 빠져 있다. 내가 많이 알고 지식이 풍부하니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하다는 잠재의식이 팽배할 수 있다. 그러니 지식이란 진정 무엇인가에 대한 본질부터 알아야 한다. 그러나 그 지식의 본질이란, 많이 아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아는 것에서 오는 기분의 인과작용이다. 무엇을 알고 싶어 한다는 것은 무엇을 앎으로써 내가 만족하고 즐거운 마음을 갖기 위함일 것이다. 그러나 알고 싶으면 알고 싶을수록, 또 지식이 많아 만족하고 즐거울수록, 인과가 따른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그래서 불만족하고 괴로운 마음이 과보에 의해 생길 것이므로, 머리가 좋고 지식이 많다고 해서 결코 좋은 것만은 아니다.

머리가 좋고 지식을 많이 쌓으려 하는 것은, 결국 기분 좋고 행복해지기 위한 일환이다. 즐거움과 행복은 괴로움과 불행의 상대적 과보가 따르기 때문에, 마음 감정이란, 이렇게 동전의 양면과 같이 좋음의 무게와 싫음의 무게가 똑같이 나타난다는 것을 항상 직시해야 한다. 따라서 자식과 손주, 가족이 정말로 행복하길 원한다면, 대가가 반드시 따르게 되는 상대적인 한쪽만을 선택할 것이 아니라, 중도와 적멸의 길을 가르쳐야 한다.

불고 수보리 이소국토중 소유중생 약간종심 여래실지(佛告 須菩提 爾所國土中 所有衆生 若干種心 如來悉知)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기를 “그렇게 많은 국토 가운데에 있는 하나하나 중생들의 마음을 여래께서 다 아느니라.”

그렇게 많은 국토란, 앞에서 설명한 항하(恒河)의 모래알 수만큼의 항하의 강이 있고, 그 셀 수 없는 항하의 모래알 수만큼 부처님의 땅이 있는바, 그 가운데 일체 중생의 마음까지도 여래는 다 아신다고 하신다. 그러나 대중은 의심이 다시 일어날 것이다. 분명히 부처님께서는 오안(五眼-육, 천, 혜, 법, 불안)으로 보는 것은 보는 것이 아니라고 하시고, 만약 오안으로 본다고 한다면 이미 깨침의 눈이 아니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곧 여실히 보이는 말씀이시다. 비록 오안으로 보는 눈은 다르나, 체성이 같으므로 곧 마음이 같은 것이다. 마음이라는 본체성(本體性)에는 여래의 마음이나 중생의 마음이 다르지 않은 까닭이다. 무량 세계에 있는 중생의 마음이 일어나고 꺼지는 것은 곧 여래의 마음이 일어나고 꺼지는 것과 같다. 여래는 중생의 움직임이 나오는 본체요, 중생은 여래가 움직이는 작용인 탓이다.

체(體) 없는 용(用)이 있을 수 없고 용 없는 체가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여래의 마음이란, 세간법과 출세간법이 다 똑같은 마음의 작용이므로, 본인이 본인의 마음을 다 알고 볼 것이니, 오안이 보는 것은 곧 자기의 마음을 보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이른바 오안도 마음의 일이요, 오안으로 보는 대상도 마음일 것이니, 어느 것이 마음이 아닌 것이 있을 것이며, 어느 것도 마음으로 되지 않을 것이 있을 것인가? 진실로 이러한 마음을 깨치면 모든 것을 모를 것도, 의심할 것도 없이, 일체를 다 알고 보게 될 것이다.

즉, 분별하는 마음만 없으면 부처와 중생이 따로 없고, 세간과 출세간이 따로 없으며, 항하의 모래알이 하나이든 수억이든 무슨 상관일 것이며, 중생이든 불국토(佛國土)이든 분별이 없음이니, 이때든 저때든, 이곳이든 저곳이든, 극락이든 지옥이든 하등의 별별이 있을 수 없음이다. 따라서 마음을 깨친 상태에서는 모두가 부처 아님이 없는 처처불상(處處佛像)일지니, 중생의 마음이 곧 부처의 마음이고, 중생의 마음 또한 다르지 않기 때문에, 일체중생의 마음을 아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같이 마음을 깨치지 못한 이는 분별상이 펼쳐져서 늘 고락의 인과를 받고 살 것이다.

달팽이 한 마리가 체리나무를 기어 올라갔다.
새들이 놀렸다.
“그렇게 늦게 올라가면 체리는 떨어지고 없을 거야.”
달팽이가 말했다.
“내가 다 올라갈 때쯤 체리는 다시 열릴 거야.”
좋아하는 우화이다. 물론 현실에서 나올 수 없는 이야기이긴 하나, 달팽이의 여유롭고 평화로운 마음이 마냥 부럽기만 한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사람들의 감정이란 상대적이기 때문에, 좋은 감정과 싫고 나쁜 감정은 단 한 끗도 차이 없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리스 거지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알렉산더 대왕이 찾아와 소원을 다 들어줄 테니 말해보라 하였으나, 나는 원하는 것이 하나도 없고, 다만 대왕이 지금 가리고 있는 햇볕을 쬐게 해 달라고 하였다.

아무리 풍족하게 산다 해도 괴로움의 업이 마음에서 발현될 때가 되면, 조건과 환경은 전혀 작용 못한다. 사람들이 그렇게도 갈구하는 수면욕, 식욕, 재산욕, 성욕, 명예욕의 오욕락은, 똑같은 고통의 오욕고(五慾苦)의 인과를 치를 수밖에 없으니, 마음 밖의 조건이나 환경은 중요하지 않다. 달팽이의 마음은 인과에 끄달리지 않는 중도심이라 할 수 있다. 중도심이 아니라면 이렇게 여유로움과 평화로움이 묻어나지 않을 것이다. 디오게네스 역시 조건과 환경이 자신의 마음을 좋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을 것이다. 악조건 속에서도 마음이 평화로운 것은 바로 분별하지 않는 중도심 때문이다. 오늘의 ‘금강경 일체동관분’ 네 번째 붙임은, 마음이 없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때문에 결코 어떤 경우, 그 어디에도 마음이라 이름할 것이 없으므로 결코 머물 필요도 없고 걸릴 이유도 없다. 그러면 중도의 마음이 되어 평화롭고 여유로운 마음이 되어 있을 것이다.

하이고 여래설제심 개위비심 시명위심 소이자하(何以故 如來說諸心 皆爲非心 是名爲心 所以者何) 수보리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須菩提 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모든 마음이 다 마음이 아니고, 그 이름만이 마음이기 때문이니라. 그 까닭이 무엇이냐 수보리야!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마음은 본래 있다고 할 수 없다. 만약 마음이 있다고 한다면 이미 마음이 아닌 것이 되므로, 오히려 마음이 있다 하면 그 마음은 한량없이 많아질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이란 진짜 마음이 아니라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한 것이니, 그 이름만을 마음이라 한다. 왜 마음을 마음이라고 할 수 없느냐 하면, 삼승(三乘-보살, 연각, 성문)과 외도, 여래의 마음까지도 마음이 있을 수 없으니, 마음이라고 증명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누가 감히 마음을 마음이라 드러낼 것인가? 여래도 불가능하고 중생도 불가능하다. 누가 만약 이것이 마음이라고 한다면 이미 망상에 사로잡혀 망(妄)이 망(妄)을 인연하는 것이다.

그리고 망심인들 허망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니, 마음이야 말할 것도 없음이다. 앞전의 생각도 증명할 수 없고, 뒤의 마음도 증명할 수 없으며, 현재의 마음은 더더욱 증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마음이라고 착각하는 것은 본심과 망심이 모두 함께 얻을 수 없는 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무의 마음과 통하게 되면 무량한 중생의 무량한 마음이 다르지 않아서, 무량한 일체법을 저절로 잘 알게 되므로 오안(五眼)으로 봄이 구족할 것이다.

따라서 과거의 마음은 이미 지나가 버렸으니 마음이라 할 수 없고, 미래의 마음은 아직 오지 않았으니 마음이라 할 수 없으며, 현재의 마음은 마음이라고 하는 즉시 지나가 버리고 말았으니 마음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이다, 아니다 하는 것조차도 이미 지나가 버린 마음이므로 마음이라 할 수 없겠으나, 그렇다면 지금 내가 생각하고 느끼고 있는 바로 이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마음을 마음이라고 할 수 없는 것에 지금 집착하고 있으니 빨리 환상에서 깨어나야 한다. 머물지 말아야 한다. 그러니 없는 것을 굳이 있다고 믿는 마음이 문제이니만큼, 그 허망한 마음에서 무엇을 얻을 것이 있으며, 무엇을 더 버릴 것이 있겠는가. 나머지는 모두 허망한 인과만 남을 뿐이다. 남는 것조차도 아니어서 전도몽상(顚倒夢想)하고 있으니, 하루빨리 몽환에서 벗어나는 길만이 고에서 깨어나 평화로움을 이룰 것이다.

어느 시점부터 어느 시점까지 각자가 가지고 있는 고락업을 분석한다면, 즐거운 낙업(樂業)과 괴로운 고업(苦業)의 차이는 별로 없을 것이다. 극히 좋은 낙업과 극히 괴로운 고업의 질량은 거의 같이 나타난다는 말이다. 한마디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고락의 분별업이 극단적으로 부딪쳤을 뿐이다. 좋은 만큼 싫고 나쁜 업의 현상은 어느 때든지 나타날 수 있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르다 등의 잘잘못은 사실 그리 중요하지 않다. 모두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고락업의 크기에 따라 고락의 시절인연을 언제 만나느냐만 있을 뿐이다.

따라서 업성이 다르거나, 고락의 업이 작은 사람은, 이러한 악연도 연기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업성이 좋아서 고락의 업이 아주 작은 사람은 절대로 이렇게 복 없는 일은 인연이 되지 않는다. 때문에 어떤 사안을 보고 생각할 때는, 그 하나하나의 사안에 대해 집착하거나 시비를 따지지 말고, 그에 연루된 사람들의 업, 성품을 살펴보는 것이 더욱 중요하고 정확할 것이다.

진우 스님 조계종 총무원장 sansng@hanmail.net

[1715호 / 2024년 2월 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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