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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오나라 역경승과 강승회의 범패 

기자명 윤소희

옥구슬 같은 청아한 음성으로 민중에 불교 전파

오나라서 활동한 역경승들에게 경전은 범패 그 자체
홍법의 뜻 품고 제자들과 함께 오나라 찾은 강승회
불사리 현현 이적으로 오나라 최초 사원 건초사 창건 

돈황 32호굴 벽화. 상단 좌측에 강승회가 배를 타고 강남으로 가는 모습, 가운데에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현현하는 사리와 이를 친견하는 강승회와 주변 인물들이 그려져 있다.
돈황 32호굴 벽화. 상단 좌측에 강승회가 배를 타고 강남으로 가는 모습, 가운데에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현현하는 사리와 이를 친견하는 강승회와 주변 인물들이 그려져 있다.

일본 학자 마찌하다료오슈(道端良秀)가 “조식의 범패는 오(吳)의 지겸(支謙)과 강승회(?~280)에 의해 계승되었다”고 할 정도로 오나라에서 활동한 역경승들에게 경전은 그 자체가 범패였다. 

지겸은 황태자의 스승이 되어 국정에도 참여하는 가운데 ‘대아미타경’ ‘유마경’ ‘무량수경’ 등을 번역하였다. 축율염(竺律炎)은 유기난(維祇難)과 함께 ‘법구경’ ‘아차말보살경’을 번역하였고, 유기난이 세상을 떠난 후인 230년에는 축율염이 단독으로 ‘삼마갈경’ ‘범지경’을 번역하였으며, 지겸과 함께 ‘마등가경’ ‘불의경’ 등을 번역하였고, 지강량접(支疆梁接)은 ‘법화삼매경’ 번역으로 범어경전 중국화의 초석을 마련하였다.

지겸의 조부는 대월지(大月支) 사람이었는데, 영제(靈帝) 때 자신의 휘하에 있던 수백 명을 데리고 오나라로 귀화했다. 지겸이 7살 때, 마을의 개 한 마리가 사람을 물어 마을 사람들이 그 개를 죽이려 하였다. 그때 지겸이 나서서 “개는 본래 짓는 동물인데 만약 그 집에 가지 않았더라면 개가 물지 않았을 것”이라며 설득하여 마을 사람들이 “다시는 살생하는 일이 없었다”는 일화를 볼 때, 어려서부터 강단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겸은 지루가참에게서 불교를 배웠고, 조식의 범패 중 삼계(梵唄三契)를 전승하였다. 6개 국어에 능통하여 국가에 기여한 공로가 컸으나 외국인이었으므로 그의 공적이 국가 기록에 실리지 못하였다. 훗날 오나라 사람들은 지겸을 일러 “키가 크고 몸이 가늘며, 눈의 흰 자위가 새하얗고 눈동자가 노랗고, 지혜가 있는 사람”으로 회고하였다.

강승회(康僧會)는 조식의 어산을 본떠 ‘니항범패(泥恒梵唄)’를 지었다. 오늘날 지겸의 범패는 찾을 수 없지만, 강승회가 지은 ‘니항범패’는 공경게 1계(敬謁一契)가 전해지고 있다. 

인도사람인 강승회의 아버지는 사업을 하며 베트남으로 이주하여 살았으나, 강승회가 열두 살 무렵 양친이 모두 세상을 떠났다. 총명하고 영리했던 강승회는 출가 이후 매일 불교 경전 3만 구절을 읽었다 할 정도로 경학에 몰두하였다. 강한 홍법 의지를 지니고 있던 그가 오나라에 불교사찰이 없는 것을 알게 되어 홍법의 뜻을 품고 제자들과 함께 그곳으로 갔다. 

당시 손권(孫權)이 양쯔강 이남을 다스리며 쑤어주(蘇州)의 황제로 불렸던 그곳이 오나라였다. 어느 날 괴이한 행색의 사람들이 오두막에 상(象)을 모셔놓고 매일 일어났다 앉았다 잠자는 행동을 반복한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손권이 그들을 불러 물어보니 자신들은 “부처를 따르는 불교도”라고 했다. “부처가 무엇이냐?”고 묻자 “코살라국의 왕자로 6년 고행 수행으로 깨달음을 얻고, 법을 설파하다 80세에 열반하자 그를 존숭한 아쇼카왕이 팔만사천 사리탑을 세웠다”고 하였다. 그러자 손권이 믿지 못하며 “증거물을 보여주면 나도 탑을 세워주겠다”고 하였다. 

강승회는 사리가 현현하도록 제자들과 함께 밤낮으로 기도 정진하였다. 그러나 수차례에 걸쳐 이적이 불발되었다. 죽음을 불사하며 정진을 거듭하던 일곱째 날 이른 아침에 병 속에서 ‘쾅!’하는 소리가 나서 뚜껑을 열어 보니 오색의 밝은 사리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손권이 그것을 매우 상서로운 보물로 여기며 탑과 절을 지어주었다. 그것이 당시 오나라 최초 사찰이었으므로 ‘시작’의 의미를 담아 ‘건초사(建初寺)’라 하였다. 이후 강승회는 활발한 홍법 활동을 하며 ‘육도집경’ ‘잡비유경’ 등을 번역하였다. 이후 항저우(杭州), 난징(南京)까지 많은 사람이 불교를 믿게 되었다. 

그러나 손권의 손자 손호(孫皓)가 황제로 등극하자 탑을 쌓아온 할아버지에 대한 불만으로 사원과 의물을 불태우고 수행자들을 박해하며 건초사가 폐사되었다. 폭정을 일삼아 오던 손호는 280년 4월 4일에 진(晋)나라에 항복하였고, 강승회는 그해 9월에 세상을 떠났다. 이후 이곳은 진나라가 되어 강승회의 홍법과 범성이 백시리밀다라(帛尸梨蜜多羅)와 멱력(覓曆)으로 이어졌고, 담약(曇籥)이 6언 범패를 지어 크게 칭송받았다. 담약은 왜소한 체구에 얼굴이 못생겼으나 목소리가 청아하고 아름다운 여운이 있어 경전 외는 소리에 사람들이 탄복하며 모여들었다. 

이후에도 불교를 배척하던 손호세력에 의해 강남 일대에 불교에 대한 비판과 옹호가 분분하던 가운데 건초사를 재건하기로 하였다. 그때 평서(平西)라는 장군이 불교를 미신으로 여기며 사찰 재건에 불만을 표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평서가 불탑에서 오색의 빛이 발하며 하늘과 땅을 비추는 꿈을 꾼 후 더 이상 삼보를 비방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 일을 강승회의 신통력으로 여겼을 정도로 그에 대한 신망이 높았다. 

오나라는 백제불교와도 관련이 깊다. 미마지가 오나라의 기악을 일본에 전한 기록이 ‘일본서기’에 있다. 미마지가 일본에 건너간 때가 무왕 13년(612)인 점을 감안해 보면 미마지의 생몰연대는 오나라(229~280)가 멸망한 이후이다. 그러면 미마지가 오에서 무언가를 배워올 수 없는 상황이다. 그리하여 필자는 이에 대하여 미마지가 오나라에서 직접 배운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오나라에서 배워와서 백제에서 전승되어 오던 것을 미마지가 익혀 일본에 전한 것으로 해석한 바 있다. 그러면 백제에 불교가 전해진 연대가 수백 년 당겨지게 된다. 그리하여 일부 학자는 당시에 오(吳)를 일본어로 ‘쿠례’라고 했던 점, 백제의 구례에서 일본을 오갔던 점을 감안하여 ‘오’가 백제의 구례였다고도 한다. 

오늘날 일본의 한자는 동일한 글자를 다르게 발음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불교용어에는 오음(吳音)이 많다. 이는 범어 발음도 마찬가지여서 일본과 오나라를 이어주는 백제의 역할이 암암리에 드러나고 있다. 아무튼 오나라에서 활동한 서역승들은 조식의 한어범패와 천축의 범어범패가 소통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특히 강승회는 범패를 좋아하여 옥구슬같이 청아한 음성으로 민중을 향한 실천불교를 전파한 것으로 평판이 높다. 

윤소희 음악인류학 박사·동국대 대우교수 ysh3586@hanmail.net

[1715호 / 2024년 2월 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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