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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초당사(2) - ‘규봉선사비’와 규봉사

기자명 오동환

유불선·선교 회통한 종밀의 정혜쌍수 공간

‘규봉정혜선사비’ 명문, 종밀선사와 교류한 재상 배휴 작성 
유학 공부하고 선종에 귀의…총90여 권 저술 가능했던 배경
규봉사엔 종밀선사 잔영 뚜렷 하지만 문헌상 관계 확인 안돼

규봉사 대웅전과 지장전. 맞은편의 관음전은 최근의 화재로 소실되었다. 현재의 사찰은 여느 대사찰에 비해 허름하지만, 재가자와 출가자가 함께하는 진솔한 신앙활동이 왕성하다.
규봉사 대웅전과 지장전. 맞은편의 관음전은 최근의 화재로 소실되었다. 현재의 사찰은 여느 대사찰에 비해 허름하지만, 재가자와 출가자가 함께하는 진솔한 신앙활동이 왕성하다.

초당사에는 중국불교사에 있어 중요한 또 다른 고승의 행적이 길게 드리워져 있다. 대웅전 앞 양측에는 각각 비석을 안치하여 초당사에서 활약했던 두 스님의 행적을 기리고 있다. 그중 우측의 비는 청대 용정12년(1734)에 황제가 사찰명을 ‘성은사(聖恩寺)’로 개명하고 구마라집의 제자인 승조(僧肇, 384~414)의 행적을 기리며 세운 것이다. 좌측의 비는 규봉 종밀(圭峰 宗密, 780~841) 선사가 입적한 지 15년 후에 당대(唐代)의 명재상이자 명문가였던 배휴(裴休)가 명문을 쓴 ‘규봉정혜선사비[唐故圭峰定慧禪師碑]’이다. 종밀은 교와 선의 합일점을 찾아내고, 나아가 불·도·유 3교간의 회통을 이뤘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와도 신라 무상선사나 고려 보조국사  지눌과의 관계, 그리고 ‘선원제전집도서’로 대표되는 그의 저서를 통하여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배휴(791~870)는 일찍이 선종에 귀의하여 규봉, 황벽과 같은 선사들과 교류가 깊었다. 황벽과의 선문답은 여러 선어록에 실릴 정도로 유명하다. 종밀과는 ‘법형제이자, 의를 나누는 벗이며, 선지식이고, 각각 출가와 재가의 호법자’로서 뜻과 의가 통하는 막역한 사이였으며, 종밀의 유작들을 모아 ‘선문사자승습도’를 편찬하였다. 종밀의 지기였던 그가 쓴 비문이기에 기본적으로 종밀의 사상과 행적에 대해 우호적이겠지만, 한편으론 종밀의 행적과 사상을 이해하는 중요한 사료가 된다. 

비문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 종밀의 법계를 밝히는 부분으로, 종밀이 석가모니불-가섭-달마-혜능-하택 신회로 이어지는 선종의 법맥을 이어받았음을 천명하고 있다. 중국학자 호적(胡適)은 종밀의 사자(師子) 관계는 하택 신회가 아닌 무상선사의 제자인 정중 신회였음을 지적하였는데, 현재 중국에서도 호적의 견해에 무게를 실어주고 있다. 

둘째, 종밀의 생애를 통해 그의 사상적 바탕을 밝히는 부분이다. 종밀은 사천 서충현(西充縣) 출신으로, 부유한 호족 집안에서 태어나 20대에 이르기까지 줄곧 유학을 공부하였다. 그 뒤 수주(遂州)의 원(圓) 선사를 만나 28세에 출가하고 선종에 귀의하였다. 사천에 머물 무렵 ‘원각경’을 접한 후 대오하고, 또한 화엄종의 징관 대사와 교류하면서 화엄의 이치를 통달하였다. 종밀의 이와 같은 불·비불(非佛), 선·교의 경계를 뛰어넘는 폭넓은 행보는 훗날 장안에서 ‘원각경’ ‘화엄경’ ‘열반경’ ‘금각경’ ‘기신론’ ‘유식론’ ‘우란분경’ ‘법계관행원경’ ‘원인론’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총 90여 권의 저술을 낼 수 있는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배휴는 이 저술들이 “모두 일심(一心)을 근본으로 하여 만법을 관통한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셋째는 선사(禪師)로서의 종밀이 보인 교학적 행적에 대한 해명이다. 배휴가 비문에서 호사가들이 규봉대사를 보고 “선행(禪行)을 지키지 않고 경론을 강설하면서 대도시를 돌아다닌다”라고 비난한다는 점을 거론하는 것으로 보아, 규봉의 활동이 순탄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배휴는 이에 대해 “일심은 만법의 총체”이며, “만행이 일심 아닌 것이 없으며 일심은 만행을 어기지 아니한다”라며, 규봉의 강설 활동이 육도(六度, 6바라밀)에서 비롯한 만행의 일환이었다고 해명했다. 이것은 곧 배휴의 글을 빌린 종밀의 입장이며, 당시 극단으로 치닫던 선종의 치우침에 대한 경계이다. 

규봉사에 걸린 _규봉정혜선사비_ 탁본.
규봉사에 걸린 _규봉정혜선사비_ 탁본.

규봉선사비가 초당사에 안치된 이유는 무엇일까? 초당사는 ‘종남오봉’ 중 하나인 규봉산 가까이에 자리한다. 규봉산은 산의 모양이 마치 ‘圭(규)’자와 같아 그 이름이 붙여졌다는 유래에서 알 수 있듯이, 우뚝 선 봉우리에 험준한 산세를 자랑한다. 종밀의 법호가 ‘규봉’이라는 점은 그의 주요 활동무대가 규봉산 일대였음을 시사한다. ‘오조약기(五祖略記)’에 의하면, 장경원년(821)에 종밀은 초당사에서 참선수행을 하였다. 초당사는 비록 종남산 가까이에 자리하지만, 산중이 아닌 평지에 세워진 사찰이다. 그렇다면 규봉은 초당사에 있을 때 규봉산을 오가며 참선수행을 병행하지 않았을까?

이와 관련하여 초당사에서 불과 약 3.5km 떨어진 곳에 있는 ‘규봉사’라는 사찰이 흥미롭다. 규봉사는 규봉(圭峰)을 마주보는 와룡령(臥龍嶺) 정상에 자리하며, 오래전부터 지역민들 사이에 종밀의 폐관(閉關) 수행처로 알려졌다. 현재 산 정상의 사찰과, 그 바로 아래 중봉에 자리한 ‘규봉란야’에 절터가 남아있다. 규봉란야 바로 옆에는 종밀이 선정에 들었다는 동굴이 남아있으며, 아직도 누군가가 그 옆에 작은 토굴을 짓고 수행에 전념하고 있다. 규봉사는 당대 무종의 회창훼불, 문화혁명, 도교의 침투, 심지의 최근의 화재로 관음전이 소실되는 등 갖은 법난을 겪어야 했지만, 현재 자행(慈行) 주지 스님과 신도들의 불심으로 사찰의 중건불사와 홍법활동이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아직까지 문헌상으로 이곳과 종밀의 관계가 확인되지 않지만, 그와 관련하여 구전으로 이어오는 이야기 또한 무시할 수 없다. 규봉의 험준한 산세를 고려한다면, 오히려 현 규봉사의 자리처럼 그리 높지 않으면서도 안쪽으로는 적막하면서도 밖으로는 너른 중원평원이 한눈에 보이는 장소가 수행처로 더욱 적합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기록에서 전하는 종밀의 홍법처이자 수행처로서의 초당사는 비단 한 사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규봉산과 초당사를 중심으로 한 종밀의 ‘정혜쌍수’의 공간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종밀이 장안에서 초당사 뿐 아니라 지거사, 흥복사, 보수사, 풍덕사 등 여러 사찰에 주석하였음에도 ‘규봉선사비’가 초당사에 세워진 이유를 이해하게 된다.

오동환 중국 섬서사범대 박사과정 duggy11@naver.com

[1715호 / 2024년 2월 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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