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경주 겨울 바다 

순전히 개인적인 취향일 것이다. 나는 몸이 찌뿌둥하면 산이 당기고, 마음이 뒤숭숭하면 바다가 그립다. 그것도 겨울 바다가 사무치게 보고 싶을 때가 있다. 나만 유난히 그런 것도 아니었나 보다. 머리 희끗희끗한 중년 아재 셋이 밥 먹다가 급발진 의기투합해서 멀리 경주 바닷가의 문무대왕릉을 보러 가는 걸 보면.

인적이 끊긴 겨울철 해거름의 감은사지는 말 그대로 적막강산이었다. 대나무숲 사이로 가끔 서걱거리는 댓바람 소리가 들렸을 뿐 사방은 정중동 깊은 침묵 속의 무문관 분위기. 겨우 살아남은 석탑 한 쌍도 언제 허물어질지 모를 위태로운 모습이었다. 적어도 내 눈에는. 화려했던 옛날은 가고 그날의 기억만 아프게 아름다운 것. 감은사지에서 대종천을 끼고 자동차로 5분 거리에 있는 이견대 언덕에 올랐다. 발밑으로 천년의 고독을 머리에 이고 서 있는 문무대왕암이 선명하게 보였다. 이곳 이견대에서 문무대왕수중릉을 내려다보며 “나의 잊혀지지 않는 바다”라고 읊조렸다는, 어느 미술사학자의 이름을 떠올려 봤다. 행정구역상 월성군 감포읍 대본리 앞바다였던 이곳이 언젠가부터 경주시 문무대왕면 봉길리로 바뀐 모양이다. 

아무리 그렇다더라도. 경주 겨울 바다는 왠지 낯설게 느껴졌다. 고운 햇살이 반짝이던 은빛 모래사장에는 고도비만 갈매기들이 눈알을 부라리며 동네 건달 흉내를 내고 있었다. 마치 날개의 사용방법을 깡그리 잊어먹기라도 한 듯 도무지 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영험한 기도처로 소문난 이곳에 모여든 전국의 무속인들이 제사상에 올렸던 음식과 방생 물고기를 아무 데나 내다 버린 과보가 아닐까 싶었다. 이런 환경에서 갈매기들은 굳이 목숨을 건 먹이활동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오리처럼 뒤뚱거리며 걷는 펑퍼짐한 몸매의 살찐 갈매기는 정말 비호감이었다. 어쩌면 그들은 당뇨와 고혈압, 심근경색과 같은 만성 성인병에 시달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누군가 잘못하면 인간도 자연도 동시에 불행해진다는 직접적인 증거의 현장. 부근의 솔밭에는 엉성하게 지은 가건물 형태의 굿당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기어이 표정 관리 실패. 나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리고 말았다. 서울에서 기차와 자동차를 번갈아 타고 한나절을 달려서라도 반드시 보고야 말겠다던, 나의 숨겨둔 겨울 바다가 저렇게 볼품없이 병들어가고 있을 줄이야. 그래도 여기까지 와서 실망만 하고 갈 수는 없었다. 시퍼런 고래처럼 살아 숨 쉬는 저 코발트색 바다를 마주 보며 그동안 묵혀뒀던 온갖 곰삭은 말들을 한꺼번에 다 쏟아냈다. 순간 멍든 가슴의 통증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이때쯤이면 일렁이는 물결 따라 울긋불긋한 노을빛이 춤을 출 시간. 어둑해진 하늘에서는 오히려 굵은 빗방울이 떨어졌다. 우리 일행은 숙소가 있는 감포 읍내를 향해 허기진 발걸음을 재촉했다. 빗줄기가 점점 더 거세졌다. 겨울비치곤 많은 양의 비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비 내리는 겨울밤 작은 고깃배가 드나드는 한적한 어촌의 허름한 식당에서 우리는 주거니 받거니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이야기꽃을 피웠다. 잠깐 눈을 붙이는 둥 마는 둥 미처 동도 트지 않은 이른 새벽. 나는 추억 속의 옛 방파제를 관성에 끌리듯 다시 찾았다. 언제 다시 또 올 수 있을지 몰라서. 바닷바람이 양쪽 뺨을 어루만지듯 스치고 지나갔다. 비릿했던 그 날의 냄새가 묻어났다. 바람 소리가 전해준 익숙한 필체의 손편지. 어쩌면 좋은가. 기억의 공간과 추억의 시간은 날이 갈수록 더욱 애틋한 그리움의 대상이 되어만 가고 있으니. 늙는다는 것의 의미가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지나고 보니 사랑은 처음 만난 그날보다 더 좋은 날이 없었고, 여행은 막상 떠날 전날보다 더 설렌 날이 없었다. 그 좋음과 이 설렘을 어떻게 간직하고 사는가는 저마다 각자의 몫일 터. 여행은 때로 여행자의 내면을 성장시킨다. 아직도 널 뛰는 듯 헤엄치는 동해의 고래를 닮았다고 웃어주던 두 친구에게 우정의 인사를 전한다. 추운 겨울은 따뜻한 봄을 품고 있다는 자연의 법문 앞에서 나는 다시 두 손을 모았다. 

허남결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 hnk@dongguk.edu

[1716호 / 2024년 2월 1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