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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마음에 남겨진 언설희론의 흔적들 

환 같은 내가 환 같은 말로 환에서 떠나게 하네

마음의 분별은 하나의 언어와 특정 형상을 결합시키는 것
마음에 남겨진 언설희론 흔적들이 세계를 현현하는 동인
마음 혹은 ‘식’도 하나의 가짜 말이자 환 같은 것 가리켜

마음속에서 이름이 떠오른 사물은 뚜렷하게 나타나지만 이름이 떠오르지 않은 많은 것들은 비밀스러운 그림들로 숨겨진다. [출처:펙셀스]
마음속에서 이름이 떠오른 사물은 뚜렷하게 나타나지만 이름이 떠오르지 않은 많은 것들은 비밀스러운 그림들로 숨겨진다. [출처:펙셀스]

나는 지난번 글을 “최고의 환술사는 스스로를 홀리는 범부의 마음”이라는 취지로 끝맺었는데, 그로 인해 어떤 주제로 자연스럽게 넘어오게 되었다. 그 문구는 우리 자신이 마치 창조자가 된 듯한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가령 도력 높은 불보살들도 중생 교화를 위해 환 같은 일들을 변화로 지어내지만, 그 환상에 스스로 속지 않는다. 그런데 범부의 마음은 자기가 그린 그림이 저 바깥에 존재하는 굳건하고 항구적인 세계라고 믿도록 스스로에게 강력한 주술을 건다. 미륵의 후예들이라면, 이 세계를 ‘바깥의 경계[外境]’라고 믿게 된 것은 그의 무지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내겐 이런 생각도 들었다. 저 세계의 형상들은 너무나 정밀하고 다채롭고 생생한 데다 또한 지속적이기도 하다. 만약 우리의 마음 안에 그처럼 풍요롭고 견고한 세계를 현현시키는 능력이 있다면, 우리는 자기도 모른 채 어떤 비밀스런 창조 행위에 깊이 관여되어 있는 것이리라. 이번 글은 그에 관한 짧은 단상이다.

이제부터 나는 ‘범부의 마음’이라는 가짜 말로 가능한 한 멋진 환영을 불러일으키려 한다. 기왕에 최고의 환술사라는 이름까지 부여했는데, 그의 무지나 어리석음보다는 그의 경이로움을 들춰내야 하지 않을까. 불교적 윤회관에 따르면, 범부의 마음은 찰나 찰나 무거운 업력에 떠밀려서 고통의 바다를 떠돈다. 이런 비극적 관점이 불교도들 사이에서 보편적으로 수용된다. 그러나 그런 비극이 실재한다고 생각하면 그 또한 집착일 것이다. 우리는 비극적 장면에서 경이로움을 보기도 한다. 관점을 달리하면, 최고의 환술사가 찰나 찰나 경이로운 환술을 써서 저 환상의 세계를 현현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무거운 업력’이란 ‘경이로운 환술’로 드러나고, ‘고통의 바다를 떠도는 것’은 ‘저 환상의 세계를 창조하는 것’으로 바뀐다.

이와 같은 나의 관점은 다음과 같은 교리에 근거하고 있다. 윤회의 세계에서 중생이란 무엇을 함으로써 어떤 것으로 되어 가는 존재다. 미륵의 후예들에겐, 무엇을 ‘한다’는 것은 ‘분별한다’는 것과 같고, 그 분별은 말의 힘에 지배된다. 가령 내가 지금 창밖의 풍경을 본다고 치자. 나의 마음은 하늘과 산의 경계를 가르는 선을 인식하고, 그 산 아래에 늘어선 높고 낮은 아파트의 형태를 인식한다. 미륵의 후예들에 따르면, 이러한 세계의 모습은 나의 마음이 하늘, 산, 아파트 등과 같은 이름들로 그린 그림이다. 말하자면 마음속에서 하늘, 산, 아파트라는 이름이 떠올랐기에 하늘과 산과 아파트의 경계가 분명해지고 서로 다른 형상들로 구분된다. 반면에, 마음속에서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던 많은 형상들이 명확하지 않은 비밀스러운 그림들로 숨겨진다. 그런데 어떤 행동을 반복하면 일정한 경향성이 생기는 것처럼, 하나의 말과 특정한 형상을 결합시켰던 분별들은 우리 마음에 그 흔적을 남긴다. 마치 옷에 배인 냄새처럼, 그것은 무시이래 언어적 분별을 반복함으로써 남겨진 결과이기에 ‘언설희론(言說戲論)의 습기(習氣)’라고 한다. 또 마치 씨앗에서 열매가 맺히듯, 그것은 언어적 형상을 현현해 내는 원인이기에 ‘명언종자(名言種子)’라고 한다. 미륵의 후예들은 이 종자를 담지하는 식을 아뢰야식 혹은 일체종자식이라 하였다. 그러니까 저 환상의 세계를 현현해 내는 경이로운 환술이라 했던 것은 바로 범부의 아뢰야식에 내재된 습기 또는 종자의 공능을 가리킨다.

이제 아뢰야식의 지평에서 말해 보자면, 저 범부의 마음이 세계의 형상을 인식한다는 것은 일종의 세계 창조 행위와 같다. 그 이유는 이런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의 세계 전체의 형상은 저 무시이래로부터 방금 직전 순간까지 이어지며 무르익은 명언종자를 직접적 원인으로 하여 현현된 것이다. 그래서 찰나 찰나 그 식이 멸하면 세계 전체의 그림도 다 함께 사라지고, 그 식이 생하면 세계 전체의 그림이 다 함께 현현한다. 그러니까 그 식이 세계 전체의 그림을 그리는 순간에 도달하기까지는 무수한 겁이 소요되었지만, 그 그림을 그리는 데는 한 찰나면 충분하다. 또 그 식이 찰나 찰나 생멸함에 따라 그 식의 명언종자도 찰나 찰라 생멸하지만, 그 명언종자가 전후로 유사하게 이어지기에 그 힘으로 현현되는 세계의 그림도 전후로 유사하게 이어진다. 그래서 범부의 마음은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유사한 세계의 그림을 보게 될 것이고, 그곳이 자기가 태어난 고향이라 여기거나 자기가 살고 있는 지구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머물고 싶어 할 것이다.

여기서 잠시 미륵의 후예들이 일러주었던 저 환상 탈출의 비방을 다시 떠올려 보려 한다. 나는 저 가짜에 대한 학설로부터 시작해서 이 범부의 마음이라는 주제에 이르렀다. 불교도라면 모양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 마음에 대해 말하려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진실로부터 멀어지지 않을까 하고 경계한다. 미륵의 후예들도 마찬가지다. “마음 바깥에 경계가 실유한다고 하는 허망한 집착을 버리게 하려고 ‘오직 식만 있다’고 가짜로 설하였다. 오직 ‘식’만 참으로 실유하는 것이라고 집착한다면, 마치 바깥 경계에 집착하는 것처럼, 또한 법에 대해 집착하는 것이다.”(‘성유식론’ 제2권) 이 문구에 대해 현장 스님의 한 제자가 다음과 같은 주석을 덧붙였다. “세상의 모든 이름들과 마찬가지로, 마음 혹은 ‘식’이라는 말도 하나의 가설(假說: 은유적 표현)이기에 환 같은 것을 가리킨다.”(‘성유식론술기’ 제2권)

이런 관점에서 보면, 내가 지금까지 저 범부의 마음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도 결국 온갖 가짜 말로 수많은 환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마음이라는 것도 하나의 환영이니, 마음에 관한 나의 이야기는 그 환영의 환영일 것이요, 어쩌면 독자들의 마음에선 그 환영의 환영의 환영이 나타날 것이다. 그렇다 해도, 나의 이야기가 전적으로 거짓인 것은 아니다. 가령 꿈속에선 죽은 자가 살아 있는 사람처럼 나타나 위험을 알려주기도 한다. 만약 환 같은 내가 환 같은 말로 우리들의 실재론적 집착에 가느다란 실금을 낼 수 있다면, 우리는 함께 부처님의 길을 따라가고 있는 것이리라. 그땐 어쩌면 우리 귓가에 환 같은 칭찬의 음성이 들릴지도 모른다. “훌륭하고 훌륭하도다, 선남자여. 그대들은 여러 보살과 말세의 중생을 위하여 보살의 환 같은 삼매를 닦아 방편으로 점차 모든 중생들을 환에서 벗어나게 하는구나.”(‘원각경’ 제1권)    

백진순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 dharmapala@hanmail.net

[1716호 / 2024년 2월 1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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