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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 타파 후에 깨닫게 된 것들

기자명 혜민 스님

4. 깨달음과 특별한 경험

화두 타파 통해 안목변화 생겨
새롭게 얻은 깨달음 아님 알아
구도자가 노력해 다 놓았을 때
항상 눈앞에 있던 실상 보게 돼

대학교를 다니면서 인연 닿은 스님으로부터 화두 참구 방법을 배웠다. 처음 화두를 참구하기 시작했을 때 마음을 그 화두 문구에 두면서 답을 찾으려고 나름 애를 많이 썼던 것 같다. 화두 참구를 하다가 다른 생각이 들면 ‘아차 딴 생각하고 있었구나!” 하고 알아차리고 또다시 화두 문구를 마음속으로 돌리면서 이렇게 계속하다가 보면 언젠가는 화두의 의심이 의정이 되고 시간이 지나면 의단으로 변해 화투 타파가 이루어지면서 내가 그리던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겠지 하고 내심 기대를 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 깨달음이라는 것이 내가 얼마나 노력하는가에 따라 달려 있다고 여겼던 것 같다. 내가 얼마나 방석에 오래 앉아 애쓰면서 집중하는가에 따라 그 깨달음이 올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여겼다. 결국 수행도 내가 하기 나름이고, 내가 열심히 하지 않으면 깨달음이라는 수확도 없을 것만 같았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분들 가운데도 내가 그랬듯이 깨달음을 수행자 노력의 결과로 얻게 되는 어떤 특별한 경험으로 여기는 분들이 분명히 계실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생각은 사실 옳다고 이야기하기가 참으로 어렵다. 왜 그런지 지금부터 한번 설명해 보도록 하겠다.

화두 참구 인연은 미국 대학에서 교수 임용이 된 이후 다시 또 이어졌다. 당시 한국에 계신 훌륭한 스님을 알게 되어 그분의 지도하에 좋은 도반들과 열심히 화두 수행을 하게 되었다. 운이 좋게도 어떻게 화두를 참구해야 한다는 감을 잡게 되면서 마음 상태가 그토록 원했던 의정과 의단 상태로 착착 진행이 되더니 급기야는 화두가 타파되는 시점에 이르렀다. 갑자기 밑둥이 쑥 빠지더니, 답답한 감옥에 갇혀 있는 것 같았던 몸이 하늘을 날아갈 듯 가벼워지면서 깊은 지복감이 계속 올라왔다. 마음엔 생각이 다 끊어지니 우주 전체가 텅 비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이 아주 시원했다.

그런데 시간이 좀 지나고 보니 하늘을 날아갈 것 같았던 지복감은 이내 곧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처음엔 그 지복감이 너무 좋아 “이게 깨달음의 경험인가보다”하고 잠시 착각을 했는데, 이내 사라지고 없는 것을 보니 지나가는 감각적인 경험에 불과한 것이었다. 하지만 화두 타파를 통해 안목의 변화가 하나 생겼는데 바로 생각으로 분별을 하면 세상에 이런 저런 것들이 있는 것처럼 보여 어느 한 곳에 마음을 머물 수가 있지만, 생각이 다 쉬면 그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 무주(無住)가 되어 아주 자유로웠다. 즉, 뭐가 각각 따로 있다는 착각 속에 사는 것은 한 생각에 내가 붙잡히면 그렇게 보이는 것이지 실제로 그런 것들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이 있었다. 나라는 것도 생각으로 분별을 하면 따로 존재하는 것처럼 느끼지만 실제로 분별이 없으면 매일 밤 꿈도 없는 깊은 잠 속에서 누구나 느끼듯이 내가 따로 없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마치 이런 안목의 변화가 내 노력의 결과로 그런 깨달음을 새로 얻은 듯한 뉘앙스로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이 과정을 겪고 보니 명확하게 보이는 것이 수행을 한다면서 들인 나의 노력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원래부터 실상이 그런 것이지, 노력을 해서 그런 실상을 얻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마치 살면서 공기(air)라는 것을 마시면 몸에 좋다는 이야기를 들은 사람이 공기를 마시기 위해 인위적인 노력을 들여 코를 막고 오랫동안 참는 수행을 하다가 더 이상 못 참겠으니까 코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아 버리니 그때서야 항상 자신이 마시고 살던 공기를 문득 알아차린 것과 유사하다. 코를 부여잡은 노력의 결과로 공기를 얻은 것이 아니듯, 실상은 항상 문이 없이(無門) 활짝 열려져 있는데 내가 특별한 다른 경험을 구하는 바람에 눈앞에 있는 것을 못 봤을 뿐이다.

구도자가 수행을 한다고 왜 그렇게 노력을 들이는가 보니, 평생을 인과법 안에서만 살다 보니까 인과를 벗어나 있는 실상을 깨닫는 일도 인과법을 통해 자신이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노력을 들이고 들이다 내 노력으로는 절대로 얻을 수 없구나 하는 좌절을 처절하게 통감하고 다 놓게 되었을 때 항상 눈앞에 있던 실상을 문득 보게 된다. 그러면서 시선을 눈앞에 바로 두고 지금 보면 즉시 통하게 되는 걸, 수년간의 노력을 들여야만 된다는 설정을 믿었던 탓에 괜한 고생만하고 한참을 돌아왔구나 하면서 미소가 올라올 것이다.

혜민 스님 godamtemple@gmail.com

[1717호 / 2024년 2월 2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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