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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발우와 텀블러-상 : 부처님의 ESG경영

생명 존중·평등 상징…승가 결속 효과까지

모든 공양에 발우 사용…단순 그릇 아닌 특별한 의례 용구
식물 생명 존중해 나무·나뭇잎 발우 사용 계율로 금하기도
1회용품 사용 없애고 개인 위생까지 담보한 환경운동 효시

요즘은 나무발우가 주로 쓰이지만, 옛 전통에 따라 질그릇 발우를 쓰는 곳도 늘어나고 있다. 사진은 완주 송광사 공양간의 질그릇 발우.
요즘은 나무발우가 주로 쓰이지만, 옛 전통에 따라 질그릇 발우를 쓰는 곳도 늘어나고 있다. 사진은 완주 송광사 공양간의 질그릇 발우.

스님들의 발우(鉢盂, pātra)는 단순한 밥그릇이 아니라 수행의 상징이다. 다른 종교에서는 이렇게까지 밥그릇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데, 불교는 유독 밥그릇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우선 발우에는 공양받은 음식을 담는데, 공양에는 크게 세 가지 경우가 있었다. 하나는 걸식이다. 마을에 가서 구걸하는 것으로 가장 일반적인 경우였다. 두 번째는 초대를 받아서 가는 경우이다. 초대하는 주체가 정해져 있고, 약속시간에 그 사람의 집에 가면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으므로 스님 입장에서는 가장 이상적인 상황이다. 초청자는 공덕을 쌓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특별한 일에 대해 축원을 받기 위한 경우도 많았다. 말하자면 집안에 혼례가 있어 저명한 분을 모셔 주례를 부탁하는 것과 같다. 인도에서는 집안에 대소사가 있을 때마다 브라만 사제 등을 불러 축원을 구했다. 세 번째는 불자들이 공양을 위해 일부러 찾아오는 경우다. 예를 들어 부처님이 6년간의 고행 수행을 마쳤을 때 찾아와 유미죽을 공양한 수자타, 또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으신 무렵 마침 근처를 지나다 첫 공양을 올리게 된 상인 타뿟사와 발리카 등이 이에 해당된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하안거, 동안거 같은 집중수행이 있을 때 불자들이 선방에 공양을 넣어드리는 것과 비슷하다.

이런 세 가지 경우에 있어 두 번째 경우는 원칙적으로 발우를 들고 갈 필요는 없다. 집주인이 그릇도 준비해놓을 것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 경우는 짜장면 배달처럼 공양자가 집에서 아예 그릇에 음식을 담아 왔다가, 스님들이 식사 후 바깥에 그릇을 내놓으면 다음에 찾아가는 방식도 있었을 것이다. 또는 연잎이나 토기그릇 같은 1회용 그릇에 음식을 담아 드리면, 식사가 끝난 후 그냥 버리는 방법도 생각해볼 수 있다. 따라서 스님들 개인 밥그릇이 필요한 경우는 첫 번째에 해당한다. 그런데 실제 경전에서의 상황을 보면 위 세 가지 경우 모두 스님들은 각자의 발우를 사용해서 음식을 받았다. 따라서 불교수행자에게 발우는 걸식을 위해서만 선택된 것이 아니라 특별하게 의도된 의례용구였던 것이다.

이처럼 자신의 밥그릇을 들고 다니는 것은 오늘날 1회용품 사용을 줄이고 자신의 텀블러나 컵을 들고 다니자는 운동과도 비슷해 보인다. 물론 부처님 당시에는 환경보호 같은 개념이 필요하지는 않았겠지만,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서로 통하는 부분이 있다. 바로 생명 존중이다. 아마도 가장 저렴하게 만들 수 있는 그릇은 연잎이나 나무그릇일 텐데 이런 그릇을 만들려면 연잎도 따야 하고 나무도 베어야 한다. 율장인 ‘사분율’이나 ‘십송률’에서는 이와 같은 나무 발우는 사용을 금지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외도들이 사용하는 그릇이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동물뿐 아니라 식물의 생명도 존중하는 불교와 달리 외도들은 나무를 베어 그릇을 만들어 쓰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무가 안 된다면 금속제는 어떨까? 부처님의 발우는 사천왕이 만들어 드린 것이었는데, 처음에는 금·은 등의 귀금속으로 만들어 드렸지만 받지 않으셨고, 다시금 바위를 깎아 만든 발우를 드리자 비로소 받으셨다. 그래서 승려들도 금·은 같은 귀금속 발우는 쓸 수 없었다. 대신 쇠밥그릇만 쓸 수 있었다. 원래는 쇠밥그릇도 “속인들이 쓰는 그릇”이란 이유로 금지시켰던 것을 보면 일반인들은 우리의 유기그릇처럼 금속제 그릇을 선호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으로는 돌로 만든 발우도 쓰지 못하게 하셨는데, 그 이유는 “부처님의 그릇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돌 발우를 부처님 권위의 상징으로 삼고 구별 짓기 위해 제자들은 사용하지 못하게 하셨다는 것은 평소 부처님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돌 발우를 쓰지 말라고 하신 속뜻은 돌 발우가 너무 무겁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반면 부처님이 적극 권장하신 발우는 질그릇 발우였다. 우리의 옹기그릇 정도에 해당한다. 부처님은 소마국(蘇摩國)이라는 곳을 방문하셨을 때 신심이 깊은 옹기장이가 그릇 만드는 것을 보시고는 어떻게 흙을 가공하고 구워 발우를 만들어야 하는지 세세하게 지시하셨다. 결국 흙이라는 재료는 무생물이므로 친환경적이고, 비교적 저렴하며, 특히 썩을 수 있는 나무나 녹슬 수 있는 금속, 무거운 돌에 비해 위생적이라는 이유로 선택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그릇을 구울 때 나무를 태우기는 한다. ‘사분율’에서는 태울 나무의 수종도 지정하고 있는데, 그 속뜻은 멀쩡한 나무를 베어서 장작으로 쓰지 말고 이렇게 저렇게 버려진 나무를 가져다 태워서 만들라는 뜻이 후대에 각색된 것이 아닐까 싶다.

한편 불교는 더 나아가 이런 발우를 개개인이 각자 자기의 발우를 사용하게 했다. 그 당시에 그릇을 돌려 쓰면 병이 전염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그랬을까 싶기는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각자의 그릇을 씀으로써 위생적 예방효과도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마하박가’ 등을 보면 교단은 단체생활을 위한 위생관리에 철저했음을 알 수 있다. 마치 군대에서 점호할 때 청결과 위생을 점검받는 것이 연상될 정도다. 그뿐 아니라, 발우는 가사와 함께 ‘삼의일발’이라 하여 승려가 소유할 수 있는 유일한 물건이었는데, 이것은 마치 철모와 군복 같은 유니폼 역할도 했다. 다양한 출신성분이 출가하여 형성된 불교교단에서는 이를 통해 일체감을 형성하고자 의도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점에서 발우는 텀블러를 들고 다니자는 환경운동과는 다소 달랐지만, 결국은 연잎 같은 1회용 그릇이나 나무그릇을 금지시켜 자연 훼손을 최소화하고, 공동체 생활을 하는 승려들의 위생을 관리하며, 그들이 비록 출신은 달라도 모두 같은 승려라는 평등한 사회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부처님은 이미 ESG(환경, 사회관계망, 의결구조의 혁신) 경영을 하고 계셨던 셈이다.

그러나 발우의 혁신적 의미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밥그릇’이란 단어는 단지 밥을 담기 위한 도구 의미를 넘어서서 생존의 수단이라는 뜻도 담고 있다. 인도의 전통종교인 브라만교, 신흥종교이면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자이나교 등이 제자백가처럼 밥그릇 싸움을 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부처님은 밥그릇으로 또 어떤 승부수를 띄우셨던 것일까?

주수완 우석대 경영학부 교수 indijoo@hanmail.net

[1717호 / 2024년 2월 2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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