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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행주좌와에 예와 율을 마련한 석도안

기자명 윤소희

“불법 높고 학문이 삼장과 견줄만 한 스승”

후베이성서 교단 조직…출가자 법명 앞 ‘석’씨 성 붙인 인물
암송 위주 초기불교와 차별 의례율조 수반 불교 중국화 실현
도안이 마련한 지침 ‘창송규정’ 기반해 회해 ‘백장청규’ 완성

도안의 초상과 석상.
도안의 초상과 석상.

붓다의 법언이 중국에 전래된 초기에는 남쪽의 오음(吳音)과 북쪽의 한음(漢音)이 교차해 오다 수·당대에 이르러 통합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 무렵 중국 범패의 핵심 인물은 석도안(釋道安, 312~385)이었다. 도안은 동진(東晉) 16국 시기에 상산(常山) 부류현(현 기주 부류성촌·冀州 扶柳城村)에서 공맹을 섬기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부모가 세상을 떠나 사촌 공(孔)의 집에서 자란 그는 얼굴이 못생겼었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도안의 초상을 보면 안면이 우락부락하고, 후베이성에 세워진 동상 또한 비슷하다. 그러나 머리가 좋아 일곱 살 때부터 글을 읽을 수 있었고, 두 번 읽으면 외울 정도였다.

도안은 12세에 출가하였는데, 외모와 출신배경이 시원찮아 업신여김을 받았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총명함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이후 불도징(233~348)을 스승으로 모시며 천재적 능력을 발휘하였다. 불도징의 사후에는 그를 대신하여 많은 문하생을 지도하였으나 전란으로 여러 곳을 전전하며 유랑하기도 하였다. 훗날 혜원(慧遠) 등 400명의 문하생과 더불어 후베이성에 단계사(檀溪寺)를 짓고 교단을 조직하여 국왕과 귀족들로부터 크게 인정받았다. 도안이 출가자는 세속의 성씨를 버리고 석(釋)씨로 할 것을 주장하자 후세 사람들이 이를 따랐고, 오늘날까지도 중국과 대만의 승려들은 법명 앞에 ‘석’이라는 성씨를 붙인다. 

당시 동진에는 습착치(習鑿齒)라는 역사가가 있었다. 그는 박학다문과 뛰어난 문장으로 ‘한진춘추’ 54권을 저술하였는데 도안과 교류가 있었다. 379년 전진왕(前秦王) 부견(符堅)이 양양(襄陽)을 함락한 후 습착치와 도안을 포로로 삼았으나(일설에는 부견이 도안과 습착치를 연결해 줬다고 함), 도안의 경지에 감복하여 국가의 고문으로 추대하였다. 전란과 정치적 혼란에 휩쓸리며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았던 습착치는 얼마 지나지 않아 타계하였고(383년으로 추정), 도안은 2년을 더 활동하였다.

사람들은 도안에 대한 신망이 높았지만, 습착치의 학문에 대한 존경도 상당하였다. 그리하여 현재 후베이에는 이들의 만남을 기리는 동상이 세워져 있다. 세수 74세, 법랍 62세로 열반하기까지 도안은 명실공히 세간과 출세간의 지도자로서 존경과 신망을 받았다. 

수행 초기에는 선학(禪學)에 몰두하였으나, ‘방광반야경’을 15년 동안이나 강설할 정도로 반야학에 심취하였다. 뿐만 아니라 카슈미르 출신의 승가발징(僧伽跋澄), 승가제바(僧伽提婆), 토하라국의 담마난제 등과 함께 ‘아함경’과 설일체유부의 ‘논서’ 등을 완역할 정도로 테라와다 불경에도 능통하였다. 

도안은 행향(行香)과 정좌(定座), 독경과 강설법(上經上講之法), 일상을 여섯으로 나누어(常日六時) 예를 올리는 승가규범을 제정하였다. 규범에는 패찬과 더불어 율조가 수반되었고, 그 행법이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이로써 중국 범패는 법언 암송 위주의 초기불교와 달리 의례율조 양상을 띠게 되었다.
 

도안의 유적을 보존하고 있는 후베이 짜오양(湖北棗陽) 전시관. 도안과 습착치의 만남을 기린 동상.
도안의 유적을 보존하고 있는 후베이 짜오양(湖北棗陽) 전시관. 도안과 습착치의 만남을 기린 동상.

서역에서 불교를 배우던 종전과 달리 수·당대에는 중국불교로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불교의 중국화를 실현한 당대(唐代)의 역장(譯場)에는 번역문의 타당성 여부를 검토하는 증의(證義)부터 윤문에 이르기까지 10분야의 전문가가 있었는데, 그 중에 번역문을 낭독하기 좋도록 하는 범패사가 반드시 있었다. 역경의 결실로 교의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여 한 번의 강석에 수천명에 달하는 승속과 문도들이 모여들었다. 강(講)에서 경전을 강술하는 사람을 강사라 하고, 문답을 하며 강경을 돕는 사람을 도강(都講)이라 하였다. 불교가 점차 민중 속으로 확산되자 속강도 마련되었다. 속강은 통속적인 불교홍법이었으므로 민중의 기호에 맞춘 노래나 이야기체 설법을 했고, 이를 담당하는 사람들을 화속법사라 하였다.

이 무렵 ‘염구의궤경’ ‘시아귀’ 및 ‘유가집요’ 등이 마련됨으로써 수·당대 불교의례의 발전을 촉진하였고, 이에 수반되는 범패가 대량 생산되어 중국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당대에는 문학이 만개한 시기로 4언·5언·7언 절구의 정형시들이 번성하였다. 진감선사가 이 시기의 범패를 배워왔으므로 한국 범패 가사도 이 당시의 시체로 이루어져 있다. 

문체는 음악의 선율을 결정지음으로, 당말(唐末)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장단구 사(詞)로 인하여 범패 선율에 변화가 시작되었다. 또한 당말에 유행한 속강이 중국 속악과 결부되어 불교 음악의 민족화와 세속화를 부추겼다. 

반면 한국은 당체(唐體)에 머물러 있어 오늘날 중국과 한국의 범패가 완전히 달라졌다. 
도안은 승려들이 승가에서 지켜야 할 규범과 함께 마련한 생활 지침(行道飮食唱時法)에 따른 율조를 갖춤으로써 수행자의 모든 일상에 예(禮)와 율조가 수반되었다. 이러한 창송규정이 후세 승단의 전형적 모범이 되어 패찬의 의례화가 광범위하게 행해졌고, 이를 기반으로 하는 선승 회해(禪僧懷海, 749~814)의 ‘백장청규’가 완성되었다. 회해의 청규는 수륙재와 같은 의식에도 적용되어 오늘날 중국과 대만의 조석예불과 연중 법회로 이어지고 있다. 

경학과 강설, 역경과 창도 의궤까지 중국 불교 신행의 실질적 토대를 마련한 도안을 일러 후세사람들은 “불법이 높고, 학문이 삼장과 견줄만 한 스승”으로 칭송하고 있다. 

윤소희 음악인류학 박사·동국대 대우교수 ysh3586@hanmail.net

[1717호 / 2024년 2월 2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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