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씹을수록 우러나는 찐쌀 같은 한시 59편

  • 불서
  • 입력 2024.02.26 09:54
  • 수정 2024.02.27 21:11
  • 호수 1718
  • 댓글 0

원철 스님 지음 / 불광출판사 / 264쪽 / 1만8000원

한문과 글쓰기에 모두 능한 원철 스님이 수많은 한시 가운데 가려 뽑아 핵심 구절을 옮기고 쉽게 풀이했다.
한문과 글쓰기에 모두 능한 원철 스님이 수많은 한시 가운데 가려 뽑아 핵심 구절을 옮기고 쉽게 풀이했다.

한시(漢詩)에 대한 편견은 거북이 등껍질처럼 단단하다. 어렵고 고리타분하며 중국 문자로 써진 시라는 인식이 그렇다. 조선시대엔 한문만 중시하고 한글은 철저히 무시했듯 이젠 역으로 한문이 냉대받는 모양새다. 그러나 한문은 우리 언어다. 한글 60%가 한자에 기반하기도 하지만 불과 100년 전까지도 공문서, 교재, 문집 등 절대다수 문헌이 한문으로 이뤄졌다. 또 한시로 그리움과 회한, 찬탄과 격려, 깨침과 입적의 순간을 노래했다. 한문을 배제하면 우리 문화와 정서의 태반을 잃는 셈이다. 정약용이 ‘나야 조선 사람이기에 달게 조선 시를 짓노라(我是朝鮮人 甘作朝鮮詩)’라거나 서거정이 ‘동문선’에서 ‘우리나라 글은 송나라 원나라 글이 아니며, 한이나 당의 글도 아닌 바로 우리나라 글일 뿐이다(我東方之文 非宋元之文 亦非漢唐之文 而乃我國之文也)’라고 한시를 우리글로 당당히 선언했던 이유가 여기 있다.

한문이 일상에서 멀어진 시대, 그럴수록 디딤돌이 되어주는 역자의 역할이 클 수밖에 없다. 저자 원철 스님은 한문과 글쓰기에 모두 능하다. 수많은 한시 가운데 가려 뽑아 핵심 구절을 옮기고 쉽게 풀이했다. 문인, 학자, 관리, 스님 등 당대 지식인들이 남긴 작품 중에서 오랜 세월 생명력을 지니며 사람들 마음을 파고드는 시를 선별해 생기를 불어넣고 의미를 더했다.

책에는 도연명, 백낙천, 방거사, 김삿갓, 정약용, 청원, 야보, 도행, 서산, 사명, 사이초, 하쿠인 등의 시 59편이 수록됐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고향과 연인에 대한 그리움에 젖거나 슬며시 미소 짓게도 한다. 또 서릿발 같은 결연함에 자세를 바로잡거나 철썩같이 믿어왔던 관념을 원점에서 직시하도록 한다.

‘여사미료마사래(驢事未了馬事來) 종성재단고성최(鐘聲纔斷鼓聲催)’는 송나라 법천 선사의 시다. 풀이하면 ‘이 일 마치기도 전에 저 일 달려오고/ 종소리 끊기자마자 북소리 재촉하네’라는 의미다. 저자는 법천 선사 소개와 시에 대한 배경을 간략히 소개하고, 그 의미를 현대로 끌어와 풀어낸다.

‘중국에서는 세상 갖가지 일을 ‘나귀 일(驢事) 말 일(馬事)’이라고 했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짐승이 당나귀와 말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이라면 ‘개 일(犬事) 소 일(牛事)’이라고 했으려나. 광장에 수십만 대중이 모여 한목소리를 내더라도 각자 셈법을 따르기 마련이다. 시비를 가리기도 전에 손익 문제가 겹쳐지니 세상은 늘 시끄럽다.’

‘독열진편과야반(獨閱塵編過夜半)/ 일등분조양년인 (一燈分照兩年人)’은 ‘혼자서 먼지 낀 책을 읽으며 자정을 넘기려는데/ 동일한 등불이 지난해와 올해 사람을 나눠 비추네’라는 내용이다. 저자는 옛날 사람들이 새롭게 시작하는 설날과 지나가는 섣달그믐을 연결하는 풍습의 한 장면을 그림으로 그리듯 운치 있게 펼쳐낸다. 그런 뒤에는 다시 사색으로 이어진다.

‘홀로 그냥 앉아 있을 뿐인데 시간이 흐르면서 한순간에 모두가 새해라고 부르는 무상의 도리를 실감한다. 작년에 나와 올해의 나는 동일한 인물인데 작년 사람과 올해 사람으로 달리 불리는 무아의 경험도 하게 된다. 등불도 마찬가지다. 동일한 등불인데 한순간 작년 등불과 올해 등불로 바뀌면서 작년의 나와 올해의 나를 동시에 비춰준다는 사실도 알았다. 양변을 동시에 살피는 중도의 이치를 그대로 체현한 것이다.’

찐쌀은 처음 씹을 땐 맹맹하지만 씹으면 씹을수록 은근한 맛을 낸다. 잘 번역된 한시와 적확한 해석은 한문의 문리를 터득하지 않았더라도 그 정서를 자연스레 공명토록 한다. 이 책은 찐쌀이다.

이재형 대표 mitra@beopbo.com

[1718호 / 2024년 2월 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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