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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고대불교-삼국통일과불교(70) (8) 의상과 화엄종의 사회적 성격(26)

균여, 고려에 신중경·천수경 크게 유행하는데 절대적 영향 끼쳐

학계는 균여의 향가 보현행원십원가에 주목해 보현신앙만을 강조
80화엄경의 화엄신중, 재래 토속신과 합쳐져 고려사회에 뿌리내려
전란 속 호법신중에 주목…합천 해인사묘길상탑지 당시 상황 증언

합천해인사 길상탑(보물)   [국립중앙박물관]
합천해인사 길상탑(보물)   [국립중앙박물관]

고려초기 원통수좌 균여(923~973)가 광종(950~975)의 불교개혁정책 추진에 호응하여 화엄종 교단의 통일, 화엄교학체계의 재정리, 보현신앙의 대중화 등 3개 분야의 업적을 이루었다는 사실은 앞 회에서 서술한 바와 같다. 그런데 균여의 불교 업적 가운데서 특히 의상의 관음진신 친견의 구도적 신앙과 낙산사 창건에 얽힌 연기설화의 성립과정과 그의 역사적 배경을 추구하는 문제와 관련된 사실로서 균여의 보현신앙을 중심으로 하는 불교신앙은 다른 문제에 비하여 별로 주목받지 못하였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균여가 중국 화엄종의 4조로 추앙되는 청량징관(738~839)의 ‘화엄행원품별행소’에 근거하여 지은 ‘보현행원십원가’라는 주제의 향가(鄕歌, 또는 詞腦歌)만을 주목해 보현신앙의 이해만을 추구했다. 물론 균여가 화엄신앙 가운데서 특히 중요시한 것은 보현신앙이었던 것으로 이해되지만, ‘입법계품’ 또는 ‘40권화엄경’에서의 여러 선지식의 법문을 폭넓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화엄신중경(華嚴神衆經)’과 ‘천수경(千手經)’ 등을 강술할 정도로 화엄신앙에 대한 관심의 폭은 대단히 넓었던 것으로 보인다.

균여는 황주의 둔대엽촌(遁臺葉村) 출신으로서 큰 세력을 가진 가문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균여는 강보의 어린아이였을 때에 아버지로부터 ‘화엄경’의 게송을 배워 잘 읽었다고 하며, 15세 때에 앞서 출가한 4촌형 선균(善均)을 따라 복흥사의 식현화상(識賢和尙)에게 출가하였다는 ‘균여전’의 서술 내용을 보아 불교 신앙, 특히 화엄을 신앙하는 가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균여는 곧 식현을 떠나 화엄종 북악파의 영수인 희랑(希朗)의 제자인 영통사의 의순(義順)의 법을 계승하여 일가를 이루었다. 그런데 그의 3살 위의 누나인 수명(秀明)도 ‘균여전’에서 제3 자매가 나란히 현명함(姊妹齊賢分者)이라는 장을 설정할 정도로 불교에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균여전’에는 일찍이 한 탁발승이 찾아와 하룻밤 묵으면서 ‘법화경’을 독송한 것을 듣고 신심을 내자, 그 탁발승은 떠나면서 “나는 보리류지(菩提留支) 삼장이고, 그대는 덕운비구(德雲比丘)의 화신이오”라고 말하였다는 설화를 전해주고 있다. 중국불교사상 역경자 가운데 보리류지(Bodhiruci)는 북위 때 북인도에서 온 인물과 당나라 때 남인도에서 온 인물 등 2인이 전해지는데, 화엄신앙과의 관계를 고려하면 ‘천수경(千手經)’을 한역한 인물로 전해지는 당나라 때의 인물로 추정된다. 그리고 덕운비구는 ‘입법계품’에서 선재동자가 문수보살의 가르침을 받고 차례로 찾아가 보살도의 가르침을 구한 52인의 선지식 가운데서 첫 번째로 만나게 되는 인물이었다. 이로 보아 수명은 일찍이 ‘입법계품’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는데, 뒷날 균여도 52인의 선지식 가운데 6번째로 만난 해당비구(海幢比丘)의 화신으로 불려지고 있었다. 즉 ‘균여전’ 제6 감통과 신이한 기적을 행함(感通神異分者)라는 장에서 광순 3년(953) 송나라 사신의 광종 책봉식에서 균여가 법문을 설하여 비를 그치게 하는 이적을 보였다는 설화를 전하는데, 그 법문에 앞서 비를 근심하고 있던 광종에게 허공에서 “내일 해당비구의 설법을 듣게 될 것이니 근심하지 말라”는 소리가 들렸다는 내용으로서 균여 남매와 ‘입법계품’과의 깊은 인연을 전해주는 설화이다.

한편 ‘균여전’ 제3 자매가 나란히 현명함이라는 장에서는 균여가 의순에게서 화엄을 공부하고 고향집에 돌아와서 누나 수명에게 그동안 익힌 것을 설해 주었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다. “대사는 보현보살과 관음보살 두 선지식의 법문과 ‘신중경(神衆經)’과 ‘천수경’ 두 경전을 강술하였는데, 세치 혀로 말한 것 가운데 한 자도 놓쳐버린 것이 없었다.” 균여가 강술한 내용 가운데 우선 주목되는 것은 보현과 관음 두 보살의 법문인데, ‘입법계품’에서 보현보살은 선재동자가 최후에 만나서 보살행을 완성케 해주는 선지식이고, 관음보살은 그 앞서 27번째(전체로서는 28번째)로 만나서 자비행을 들려주는 선지식이었음은 물론이다. 이로써 균여는 ‘입법계품’의 53선지식을 찾아가는 선재동자의 구법 행각을 주목하였고, 53선지식 가운데 특히 보현보살과 관음보살을 중요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균여가 51세로 입적한 이후 균여가 머물던 귀법사의 본방은 김정준(金廷俊)이 중수하고 감로원(甘露院)이라 이름하였고, 고정(高挺)이 ‘감로원기’를 지었는데, 그 내용 가운데서 균여를 선재동자에 비유하였던 것을 보아도 ‘입법계품’에 깊이 경도되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균여가 설한 법문 가운데 특히 주목되는 것은 ‘(화엄)신중경’과 ‘천수경’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신중경’은 9세기 이후 신라 불교계에서 성립된 위경으로 추정되는데, 그 기원은 ‘60화엄경’ 권1의 ‘세간정안품’의 34류의 신중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나 신라의 화엄신중신앙의 소의경전은 ‘80화엄경’이었고, ‘40화엄경’에 의해 보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화엄신중신앙이 신라 불교사에서 처음으로 확인되는 것은 ‘삼국유사’ 권3 대산오만진신조의 오대산신앙에서다. 그러나 그 신중신앙의 유행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곳은 해인사 교단이었다. 9세기말부터 전국적으로 도적이 봉기하는 혼란의 와중에서 사찰들도 그 전란에 휩싸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는데, 895년 7월 16일에 조성된 ‘해인사묘길상탑지(海印寺妙吉祥塔誌)’에는 전란의 참혹한 상황과 함께 희생된 승속 56인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어 당시 상황을 증언해주고 있다. 이러한 전란 상황에서 ‘화엄경’의 호법신중들이 주목을 받게 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해인사묘길상탑지’에 ‘80화엄경’에 나오는 화엄40류신중을 비롯하여 위광불이 만난 부처, 선재동자가 만난 55선지식과 53불, 10대 제자, 7처9회와 39품, 그리고 40심(心) 10지(地)의  각각 이름을 기록하여 탑 속에 넣었다고 한 것을 보아 고려후기에 전하는 ‘화엄신중경’류의 위경이 신라말기에 이미 성립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균여전’ 제4 종파를 통합함(立義定宗分者)에 의하면 해인사의 2인 화엄사종 가운데 관혜(觀惠)는 후백제 견훤의 복전, 희랑(希朗)은 고려 왕건의 복전이 되어 남악파와 북악파로 분열 대립되었다고 하며, 또한 ‘가야산해인사지’에 의하면, 희랑이 화엄신중삼매를 얻고 신병(勇敵大軍)을 파견하여 왕건을 도와서 승리케 하였다는 설화를 전해주는데, 해인사 희랑의 화엄신중신앙과 후삼국 전란 중의 역할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주는 사례임이 분명하다. 
 

그 안에서 발견된 묘길상탑지(위).          
길상탑 안에서 발견된 묘길상탑지(위).          

한편 고려 태조는 일찍부터 화엄신중신앙을 신봉하여 태조 7년(924) 개경에 신중원을 세웠는데, 이후 역대 왕들의 참례 장소가 되었다. 그리고 태조 19년(936)에 후백제 신검군을 격파하여 후삼국 통일전쟁을 마감하고, 태조 23년(940) 그 전승 장소인 연산 천호산에 개태사를 준공하고, 낙성화엄법회를 개최하면서 법회의 소문을 태조가 직접 지었는데, 그 소문의 앞머리에서 귀의 대상을 다음과 같이 열거하고 있다. “제자는 머리를 조아려 허공이 다하고 법계를 두루하며, 시방삼세에 걸쳐있는 모든 부처님과 여러 보살, 나한과 성스러운 무리와 범천왕·제석·사천왕과 해·달·별과 하늘·용·팔부신중 및 악진·해독과 명산대천, 그리고 천지의 모든 신들에게 귀의합니다.” 이 소문에서의 귀의 대상 가운데 부처와 보살부터 팔부신중까지는 화엄신중, 악진·해독 이하는 고려 재래의 토속신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 

고려 태조는 26년(943) 임종에 앞서 훈요 10조의 제6조에서 연등회와 팔관회의 설치를 당부하는 가운데 연등회에서 섬기는 대상은 부처님, 팔관회에서 섬기는 대상은 천령·오악·명산·대천·용신임을 밝히고 있는데, 앞의 개태사 낙성법회의 소문에서 구분한 것과 대체적으로 같은 취지였다고 본다. ‘80화엄경’에 근거한 화엄신중이 재래의 토속신들과 합쳐져서 고려초기의 왕실을 중심으로 고려사회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희랑의 법손으로서 고려 태조와 희랑의 행적을 듣고 목격하면서 성장한 균여가 ‘신중경’을 특히 주목하여 강술하였다는 사실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균여의 ‘신중경’ 이해는 그의 문도들에게 계승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균여가 입적한 뒤 100여년 뒤인 1074년 균여의 행적을 정리한 기록을 혁련정에게 주어 ‘균여전’을 짓도록 한 창운(1031~1104)이 “신중경주주(神衆經注主)”로 불릴 정도로 그의 ‘신중경’의 주석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다음 균여가 ‘신중경’과 아울러 강술한 ‘천수경’으로는 당의 가범달마(伽梵達摩)·지통(智通)·보리류지(菩提流志) 등 3인의 번역본이 각각 전해지는데, 후대에 널리 유통된 것은 “대비주(大悲呪)”로 약칭되는 가범달마의 역본이다. 그러나 ‘균여전’에서 누이 수명을 덕운비구의 화신이라고 한 탁발승이 자신을 보리류지라고 말했다는 설화에 의하면, 보리류지의 역본이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균여에게서 처음 확인되는 ‘천수경’의 관음신앙은 화엄신중신앙과 함께 몽골의 침입 이후 크게 유행하게 되면서 전문적인 저술들이 등장하고, 빈번히 불화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는데, 33관음 가운데 특히 선호된 것은 수월관음(水月觀音)·백의관음(白衣觀音)·양류관음(楊柳觀音) 등이었다.

한편 혁련정이 지은 ‘균여전’의 제5 많은 문서를 해설한 장에서는 균여의 저술로서 10부65권을 들고 있는데, 대부분이 당의 지엄과 법장, 그리고 신라 의상의 저술 등의 화엄교학에 대한 주석서들이다. 그 가운데 유일하게 균여의 보살도의 실천에 관한 저술로서는 ‘입법계품초기’ 1권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의천의 불전 간행의 예정 목록인 ‘신편제종교장총록’ 권1(1090년 편집)에 지엄의 ‘입법계품초’ 1권과 의상의 ‘입법계품초기’ 1권 등이 수록되어 있어서 혼란이 초래되었다. 일본의 교넨(凝然, 1240~1321)의 ‘화엄종경론장소목록’에도 지엄과 의상의 두 책이 수록되어 있는데, 일본에 전해지지 않았거나 산일된 것으로 언급한 것을 보아 실물은 접하지 못하고 의천의 목록에서 옮겨 적은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의천이 작성한 목록은 수집된 불전을 수록한 것이기 때문에 지엄의 ‘입법계품초’와 의상의 ‘입법계품초기’는 실재했던 것으로서 후자는 전자를 주석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 경우 의상과 균여의 저술로서 같은 이름과 같은 권수의 ‘입법계품초기’가 2종이 있다는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한편 의상의 ‘일승법계도’에 대한 그의 법손들의 주석을 집성한 ‘법계도총수록’에는 지엄의 ‘입법계품초’에서 3개소가 인용되어 있어 의상의 법손들에게 읽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인용된 1개소는 ‘화엄경’과 관계없는 불타야사(佛陀耶舍) 번역의 ‘허공장보살경’의 내용을 그대로 전재한 것이어서 지엄의 저술의 진위 자체가 의문시되었다. 오늘날 ‘입법계품’에 대한 지엄·의상·균여 등의 저술이 모두 전해지지 않는 상황에서 지면 제약으로 더 이상의 구체적인 고증을 추구할 수는 없으나, 이상의 사실들을 종합하여 추정하면 지엄의 저술로 알려진 ‘입법계품초’가 의상의 법손들에 의해서 전승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으며, 그것에 대한 주석서인 ‘입법계품초기’는 의상보다는 균여의 저술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균여만이 ‘입법계품’ 또는 ‘40화엄경’의 선재동자 구법여행과 보현보살과 관음보살의 법문을 강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718호 / 2024년 2월 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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