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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파밭 가에서 - 김수영

기자명 동명 스님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다는 것

붉은 파밭 푸른 새싹이라도
태어나면 죽음 향해 달려가
모든 얻음은 잃음을 내포해
시인의 충고와 설법은 진실

삶은 계란의 껍질이
벗겨지듯
묵은 사랑이
벗겨질 때
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아라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

먼지 앉은 석경 너머로
너의 그림자가
움직이듯
묵은 사랑이
움직일 때
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아라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

새벽에 준 조로의 물이
대낮이 지나도록 마르지 않고
젖어 있듯이
묵은 사랑이
뉘우치는 마음의 한복판에
젖어 있을 때
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아라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
(1959년작, ‘김수영 전집’, 민음사, 1981)

붉은 파밭에 푸른 싹이 올라왔다. 아마도 황토밭일 것 같은데, 시인은 푸른 새싹이 올라오는 바탕은 붉은색이 어울린다고 생각했으리라. 밭을 가꾸는 입장에서는 푸른 새싹이 얼마나 뿌듯한 희망이겠는가?

푸른 새싹이 자라나서 어엿한 모습의 파가 되는 순간, 그 파는 뿌리째 뽑혀 여러 가지 모양의 요리에 활용되어 인간의 뱃속으로 들어감으로써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시인은 이런 상황을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고, 독자들이 알아듣든 말든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라고 반복적으로 노래한다.

이 시의 핵심어는 의외로 ‘묵은 사랑’이다. ‘의외로’라고 한 것은 ‘묵은 사랑’이 ‘붉은 파밭’이나 ‘푸른 새싹’처럼 강렬한 이미지로 다가오지도 않고, ‘얻는다는 것’이나 ‘잃는 것’처럼 주제를 암시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묵은 사랑’이 처한 상황은 세 가지다. 첫째, ‘묵은 사랑’이 “삶은 계란의 껍질이/ 벗겨지듯” 벗겨지는 상황이다. 어느 동네에 처녀와 총각이 오래전부터 사랑하고 있었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듯 서로 데면데면하게 대했다. 그러다가 두 사람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결정적인 순간을 만난다. 그런 결정적인 순간에 시인은 “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아라”라고 충고하고, 덧붙여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라는 생뚱맞은 가르침을 일갈한다.

둘째는 ‘묵은 사랑’이 “먼지 앉은 석경 너머로/ 너의 그림자가/ 움직이듯” 움직이는 상황이다. ‘먼지 앉은 석경’은 세월이 지났음을 말하고, 두 사람의 사랑도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음을 말한다. 두 사람은 혼인하여 알콩달콩 살면서 아기도 낳고 티격태격하기도 한다. 그렇게 두 사람이 견고한 가정을 만들어나가는 것처럼 보일 때 시인은 다시 똑같이 충고하고 외친다.

셋째는 ‘묵은 사랑’이 “새벽에 준 조로의 물이/ 대낮이 지나도록 마르지 않고” 아직 젖어 있는 상황이다. ‘새벽에 준 조로의 물’은 사랑이 시작된 순간을 의미하고, 대낮이 지나도록 마르지 않은 상황은 세월이 한참 지났어도 아직 사랑이 남아 있음을 의미한다. 벌써 끝났어야 할 것 같은 ‘묵은 사랑’이 여전히 남아 있을 때, 시인은 또 똑같이 설법한다.

시인의 충고와 설법은 뚱딴지같은 ‘진실’이다. 붉은 파밭의 생동감 넘치는 푸른 새싹이 태어나자마자 죽음을 향해 달려가듯이, 모든 얻음은 잃음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파를 심을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반야심경’의 가르침대로 “색(色)이 곧 공(空)”이어서 모든 얻음에 잃음이 내포돼 있음을 말할 뿐이다.

파 줄기는 수직으로 올라오고 가지를 뻗지 않으며 속은 텅 비어 있어서, 이해인 수녀는 파를 “꼿꼿이/ 허리를 세운/ 수행자의 모습”(‘파밭에서’)이라고 묘사했다. 거두절미한 김수영의 이 시에서 속을 텅 비운 채로 수직으로 올라오고 가지를 뻗지 않는 파의 특성까지 거론하는 것은 논리의 비약일 수 있다. 그러나 어떤 ‘묵은 사랑’도 영원할 수 없음을 깨달은 시인이, 얻는 것이 곧 잃는 것이며, 잃는 것이 곧 얻는 것이라는 ‘반야심경’의 진실을 간명하게 노래했음은 단언할 수 있겠다.

동명 스님 시인 dongmyong@hanmail.net

[1719호 / 2024년 3월 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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