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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근대 불교의 정체성 혼란: 사찰령 시행 전후 사정

기자명 이창익

‘사찰령’에 나타난 총독부 이중 태도

총독부, 사찰령 시행으로
조선불교 살려냈다고 자평
본말사 체제로 불교계 재편
정교분리 논리로 식민지화

조선총독부는 1911년 9월에 시행된 사찰령이 일본불교로부터 조선불교를 보호하고 쇠퇴하는 조선불교를 갱생시킴으로써 조선문화사에 큰 공헌을 했다고 평가했다. 근대 한국불교는 처음부터 일본불교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갑오개혁이 추진되면서 승려의 도성 출입이 자유롭게 된 것도 결국 일본불교의 포교를 위한 것이었다. 1895년에 일련종(日蓮宗)의 승려 사노 젠레이(佐野前勵)의 요청으로 승려의 도성 출입 금지가 해제되었기 때문이다.

1899년에 조선 정부는 조선 초기에 설립된 선종과 교종의 도회소(都會所)처럼  조선불교총무원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동대문 밖에 원흥사(元興寺)를 창건했고, 이곳에 도섭리(都攝理)라는 승직을 두어 전국의 사찰을 통할하게 했다. 1902년에는 사찰에 관한 칙령을 공포하여 승직, 출가, 포교, 전도 등을 법령에 의해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반면에 1906년에는 폐사된 봉원사(奉元寺)의 승려 이보담(李寶潭)과 화계사(華溪寺) 승려 홍월초(洪月初) 등이 일본 정토종의 후원 하에 불교연구회를 조직하고 정토종을 표방했다. 1908년에는 묘향산 보현사(普賢寺)의 승려가 본말사를 거느리고 일본불교인 임제종(臨濟宗) 묘심사파(妙心寺派)에 귀속했다. 1910년에는 각 도의 대표 사찰이 설립한 원종(圓宗)의 대표자 이회광(李晦光)이 일본에 가서 조동종(曹洞宗)과 연합 협약을 체결했다. 또한 일본 진종(眞宗)에 귀의하는 자도 속출했다. 이처럼 도성 출입 허용과 포교 및 전도의 자유는 오히려 조선 불교가 아닌 일본불교의 팽창을 가속화하고 있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승려나 지방관헌의 전용에 의해 사찰 재산이 멸실되어 황주의 성불사(成佛寺)나 평원의 법흥사(法興寺)처럼 파산 상태에 빠진 절도 있었다. 1908년에는 조선 정부가 관찰사에게 훈령을 내려 지방 관헌이 사찰의 전답이나 산림을 함부로 전용하는 것을 금지시키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조선총독부도 사찰령을 통해 이제 비로소 조선총독의 허가 없이는 사찰 재산을 함부로 처분할 수 없게 됐다고 강조했다. 또한 사찰령은 조선 초기처럼 선교 양종으로 불교 종파를 통일하여 조선불교의 정체성을 보존했다고 주장했다. 즉 사찰령으로 인해 조선 불교가 조동종, 임제종, 정토종 같은 일본불교에 흡수되지 않을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 초에는 전국 사찰을 통할하던 승록사(僧錄司)라는 관청이 있었다. 그러나 세종 6년(1424)에 5교 양종을 선교 양종으로 합병하면서 승록사를 폐지했고, 그 대신 선종도회소와 교종도회소를 설치하여 종무를 관장하게 했다. 따라서 조선총독부는 사찰령을 통해 유명무실해진 도회소를 다시 회복했다고 주장했다. 조선 시대를 거쳐 쇠퇴하던 불교의 조직과 정체성을 복원했다고 주장한 것이다.

사찰령 시행 무렵 한국불교 내에서는 이회광을 중심으로 조동종과 결탁한 원종종무원과 한용운 등이 주축이 된 임제종종무원이 대립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찰령의 등장으로 불교 내 투쟁은 쇠퇴하고 교종과 선종, 본사와 말사라는 체제로 조선불교가 재편되었다. 승려들은 사찰령이 사찰의 권리를 빼앗고 승려를 박멸하기 위한 것이라고 저항하기도 했다.

1912년에는 경성에 30본산주지회의소가 설치되었고, 경성부 수창동(需昌洞)에 건립된 각황사(覺皇寺)를 통해 본격적인 포교가 개시되었다. 1915년에는 조선총독부 지시로 30본산연합제규가 제정되었고, 중앙학림(中央學林)이 설립되어 불교계 인물 양성에 착수했다. 1920년에는 조선불교유신회가 조직되어 사찰령 철폐운동을 시작했고, 2300여 명의 승려가 날인하여 조선총독에게 진정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그 후 재단법인 중앙교무원이 설립되어 포교와 강학의 중심으로 자리잡았다. 또한 보성고등보통학교와 중앙불교전문학교 같은 불교계 학교가 등장하여 근대불교의 중추를 형성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드러내고 싶은 것은 조선불교와 일본불교에 대한 조선총독부의 이중적인 태도였다. 즉 정교분리의 논리 속에서 정치적인 식민화는 종교적인 식민화와는 사뭇 다른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창익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changyick@gmail.com

[1719호 / 2024년 3월 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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