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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대자은사–색즉시공, 진흙서 진여묘색신을 얻다

기자명 오동환

현장법사, 인도 불상 모델로 ‘전불’ 천만기 조성

대안탑 주변서 점토판으로 찍어낸 전불상 다수 출토돼
현장법사 주도 대량 제작 불탑 봉안되거나 장엄에 사용
반야 법성체 얻기 위한 전제는 ‘선업’임을 말해주는 듯

중국 서장 정계현 강모석굴 벽면에 장식된 차차(전불상). 대안탑 외벽에도 이와 같이 전불상들을 장식하였을 수 있다. (사진출처 : 李玲 ‘檫檫与善业泥考’) 

‘대자은사삼장법사전’에 따르면, 몰래 국경을 넘은 현장법사가 험난한 서역으로의 여정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고난에 빠졌을 때마다 오로지 관세음보살의 명호와 ‘반야심경’에 의지하여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항간에 전해졌던 현장이 어느 촌부를 구제하여 그로부터 ‘반야심경’을 얻고, 그 후로 항상 독송했다는 설화는 현장이 260자로 축약하여 새로이 번역한 ‘반야심경’의 수승함과 대중성을 방증한다.

현장법사는 대안탑의 건설을 직접 기획·감독하고, 또 몸소 벽돌을 나르며 축조 현장에 참여했다. 대안탑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인간으로서 시현하셨던 해탈과 자비의 여운을 중국에 재현하고자 했던 현장법사의 염원이 담긴 것이다. 그렇게 대안탑은 시각적·감각적 조형물로서 장안의 시공간에 우뚝 솟았다. 이것은 한편으로 중국 불교미술에 있어서도 새로운 파장이 발생하였음을 상징하는 사건이다.

청나라 도광19년(1839)에 금석문 수집가였던 유연정은 대안탑을 유람하던 중 절의 스님으로부터 점토로 구워 만든 자그마한 부조 불상을 10여 점 얻었다. 근대에 제작된 탁본집 ‘존고재도불류진(尊古齋陶佛留眞)’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대안탑 주변에서 스님들이 경작을 하다보면 종종 이와 같은 점토판을 발견하곤 하였다고 한다. ‘선업니(善業泥)’라고 불린 이 전불상(塼佛像)들은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대안탑 주변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되었다. 그 외에도 서명사, 실지사, 청명사, 청룡사, 예천사, 지상사 등 당대에 번성했던 기타 장안 일대의 절터에서도 연이어 출토되었으며, 심지어 일본의 사찰터에서도 다수 발견된 바 있다. 이 점토 불상들에는 뒷면에 ‘인도불상’, 또는 ‘대당선업니압득진여묘색신(大唐善業泥壓得眞如妙色身)’이라는 명문이 있어, 이 불상들이 당대에 인도의 불상들을 모본으로 하여 제작된 것임을 알리고 있다. 이 불상들은 명문에 제작 시기를 명확히 밝힌 사례에 견주어 볼 때, 현장법사가 귀국한 이후 자은사 대안탑을 중심으로 장안에 확산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 전불상들은 현장법사와 어떤 관련이 있는걸까? ‘자은사삼장법사전’의 기록에 의하면 현장은 평생 74부 1338권의 경전을 번역하고, 1구지(俱胝: 백만)의 화상(畫像)과 10구지의 소조 불상[塑像十俱胝]을 제작하였다. 10구지, 즉 천만의 불상을 제작하였다는 얘기는 과장이 섞인 것으로 보이지만, 당시 문헌에서 대량의 불상을 조성하는 공덕에 있어 ‘구지’라는 단위를 관용적으로 자주 사용하였던 기록들이 종종 보인다. 만약 모판을 사용하여 찍어냈다면 충분히 대량으로 제작하는 것도 가능하다. 또한 ‘인도불상’이라는 명문에서 ‘인도’라는 용어를 현장이 가장 먼저 사용하였다는 점, 불상들의 표현양식에서 드러나는 굽타시대의 미술의 특징들을 고려한다면 대안탑 주변에서 집중 출토된 전불상들이 현장법사의 주도하에 대량으로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일례로 다수의 전불상에서 보이는 항마촉지인을 하고 탑을 배경으로 한 불상은 당시 보드가야 마하보디 대탑의 유명한 석가모니 보리수상을 모델로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일본학자 히다로미(肥田路美)는 비록 현장이 인도에서 가져온 불상들의 목록에는 없지만, 현장이 돌아올 때 인도 현지의 전불을 소지하였으며, 그것을 분본(粉本)으로 하여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섬서성역사박물관 소장 전불상. 항마촉지인불상은 당시 석가모니불 정각처인 마하보디대탑에 조성된 석가모니 진용상을 모델로 한 것이다.
섬서성역사박물관 소장 전불상. 항마촉지인불상은 당시 석가모니불 정각처인 마하보디대탑에 조성된 석가모니 진용상을 모델로 한 것이다.

전불상을 제작하여 어떻게 사용하였을까? 현장보다 약 반세기 후에 인도 구법을 마치고 돌아온 의정(義淨)은 소형의 전불상들을 쌓아 불탑을 만들거나, 탑을 건설하고 그 내부에 부처님의 육신사리와 함께 법사리로서의 연기법송을 안치하는 작법을 소개하였다(‘남해기귀내법전’). 장안에서 발견된 불전들의 전면 하단에는 “모든 법은 인연에 따라 생하고, 인연에 따라 멸한다. 여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는 연기법송이 새겨진 사례가 많다. 또한 ‘자은사삼장법사전’에서는 대안탑이 완성되고 내부에 사리 1만립을 봉안했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애초에 현장이 150립의 사리를 인도에서 가져왔다는 기록과도 부합하지 않는다. 이를 종합해본다면 전불들이 경전, 사리, 불상들과 함께 대안탑 안에 법송사리로서 안치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 하나 제기되는 가능성은 전불들을 탑 외부벽에 장식하는 경우다. 돈황 막고굴 중 다수의 티베트에서는 전불을 제작하는 불교문화가 인도로부터 직수입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티베트 사찰유적 중 내부 벽에 전불을 촘촘히 붙여 장식한 경우들이 보이며, 돈황의 토번 지배기 석굴에서도 이러한 예들이 보인다. 티베트에선 이러한 유형의 전불을 차차[擦擦, tsha tsha]라고 부르는데, 이 용어는 인도에서 연원한 것이다. 그래서 중국학자 리링(李玲)은 이 전불들을 차차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느 쪽이든 전불은 탑을 이루는 중요한 구성요소로서 쓰였다는 얘기가 된다. 그렇다면, 현장이 대안탑을 건설할 때 직접 소쿠리에 담아 날랐다는 ‘벽돌(甎)’은 곧 전불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현장에게 전불을 제작하고 나르는 과정이 ‘반야심경’의 가르침을 끊임없이 되새기고 또 참구하는 수행 그 자체였을지도 모른다. 흙이라는 물질에서 ‘진여(眞如)’의 ‘묘색신(妙色身)’을 얻게 된다는 것은 곧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반야의 핵심 문구를 떠올리게 하며, 우리가 물질과 형상으로 구현된 부처님을 마주할 때 우리가 갖추어야 할 마음 자세에 대한 은근한 가르침이다. 여기에 색과 공이 하나라는 반야의 법성체를 얻기 위해서는 ‘선업’이라는 행이 전제되어야 함은 말할 것도 없다.

오동환 중국 섬서사범대 박사과정 duggy11@naver.com

[1719호 / 2024년 3월 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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