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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 그대로가 본질이다

기자명 혜민 스님

5. 공(空)과 색(色)

색을 떠나서 공이 따로 없고
상 떠나 본래성품 볼 수 없어
공부 여정은 현상 떠남 없이
현상이 곧 본질임 깨닫는 것

마음 공부에 관심을 두고 오랫동안 구도의 길을 걸어온 사람들에게 누구나 거치게 되는 관문이 하나 있는데 바로 공(空)과 색(色)이 하나가 되지 못하고 이 둘이 따로 노는 현상이다. 생각이 딱 끊어져서 마음의 고요한 맛을 보고 나니 번뇌가 없는 상태가 너무도 편안하게 느껴진다. 이 편안함에서 쉬고 싶은 생각이 들면서, 이와 같은 텅 빈 상태를 ‘반야심경’에서 말한 공이라고 착각하게 된다. 그러면서 아무 생각이 없는 공한 상태에 되도록 오랫동안 머무는 것을 제대로 된 수행이라고 오해하는 것이다. 반대로 다시 마음 안에 생각이 많아지면 수행이 지금 잘 안되고 있다고 분별하게 된다.

보통 이 상태에서 구도자들이 자주 쓰는 표현이 현재 자신의 공부가 “왔다 갔다” 한다고 이야기 한다. 생각이 없는 상태에서는 공부가 잘되는 것 같고, 생각이 많아지면 공부가 잘 안되는 것 같다고 여기니 이 둘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생각이 없는 고요한 상태에 완전히 뿌리를 내려야 하는데, 생각이 자꾸 일어나니 공부가 잘 안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필자도 이 과정을 오랫동안 겪어봤기에 이 관문까지 온 공부인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번 글을 쓴다.

나의 경우 화두가 타파된 후 생각이 딱 끊어지는 체험을 하고 보니 마음 안에 아무런 번뇌가 없는 것이 너무도 좋았다. 그런데 눈을 떠서 앞을 보면 세상의 사물들이 하나의 공한 마음으로 여겨지는 것이 아니고, 그냥 사물로 각각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 예를 들면 내 앞에 있는 컵이 그냥 컵이라는 물질로 보이지 공한 마음이라고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 안은 고요해서 공한데 눈을 떠서 본 세상은 공즉시색(空卽是色)과는 요원한 색의 세상인 것이다.

그러다 보니 공한 마음이 본질이고, 그 나머지 색의 세상은 환과 같은 허상이라고 여겼던 것 같다. 그러면서 공과 색의 분리감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허상인 환을 떠나 본질인 공으로 완전히 돌아가는 것이 공부의 여정이라고 여겼던 것 같다. 하지만, 색을 떠나 공이 따로 없고, 상(相)을 떠나서 본래 성품(性品)을 볼 수 없는데도, 어처구니없게 그때는 현상과 본질을 둘로 나누어 현상은 싫고 본질은 좋다는 분별을 한 후, 본질만을 추구하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여러 훌륭한 스승님의 법문을 듣고, 직접 공부 점검을 받으면서 내 공부의 방향이 많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먼저 모양을 가지고 공과 색을 구분한 것이 큰 잘못이었다. 마치 아무런 생각이 없는 상태가 공이고, 생각이 있으면 색이라고 여기는 것은 모양을 가지고 이 둘을 분별한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공은 모든 것이 그대로 있는데 그것이 공이라는 사실을 그냥 바로 아는 것이다. 마치 금 불상을 보거나 금 거북이를 보면서 불상이나 거북이의 모양을 녹여 없애지 않아도 이것들이 금으로 만들어져 있구나 하고 바로 아는 것과 같다. 금이 보이면 성품을 보는 것이고 거북이만 보이면 상만 보고 있는 것이다. 결국, 상에 마음이 가 있지 않으면 성품은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거북이라는 분별은 그냥 이름이고 생각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원래부터 실제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생각으로 이름을 붙이면 본래 하나의 세상을 가위로 오리듯이 각각 분리해서 따로따로 존재하는 것처럼 착각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언어를 잊어버리고 세상을 보면 거울 표면처럼 아무런 분절감 없이 전체가 하나로 매끈하다. 즉, 색이라는 물질세계도 분별하는 생각이 있으니 따로 있는 것처럼 보였지 실제로는 따로 있지 않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공부의 여정은 현상을 떠나 본질로 가는 것이 아니다. 현상 자체가 본질임을 그대로 보고 깨닫는 것이다. 만약 지금 여기가 아니고, 수행을 해서 어딘가 더 좋은 상태에 도달해야 할 것처럼 느껴진다면, 그 바람을 바로 멈추고 도착 장소에 이미 도착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진정한 공부의 길이다. 그러다 보면 결국 공즉시색, 색즉시공이라는 말조차도 다 방편의 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생각으로 분별해야 ‘색이다’ ‘공이다’ 말을 할 수 있지, 눈 앞에 펼쳐진 하나의 실상에는 그런 구분하는 말도 전혀 붙어 있지 않다.

혜민 스님 godamtemple@gmail.com

[1719호 / 2024년 3월 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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