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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형벌로도 막을 수 없었던 속강의 유행과 어장의 탄생   

기자명 윤소희

범패 기교+세속 창법=연예인급 ‘창도사' 출현 

진 황제 효무의 스승 담약에게서 범패 선율 기교 시작돼
속강 인가 날로 커지자 지배층 ‘경전 날조’ 이유로 처벌
송대 승단이 정토·시왕 등 대폭 수용하며 수륙의궤 제정

1)42음성 다라니를 설하는 미가장자, 2)당대 궁중 예인과 음성인의 모습, 3)42자모를 노래하고 있는 중예동자 주변을 42개의 구슬이 둘러싸고 있다. 출처 [https://kknews.cc/zh-mo/culture/enrzavr.]
1)42음성 다라니를 설하는 미가장자, 2)당대 궁중 예인과 음성인의 모습, 3)42자모를 노래하고 있는 중예동자 주변을 42개의 구슬이 둘러싸고 있다. 출처 [https://kknews.cc/zh-mo/culture/enrzavr.]

역경이 한창 이루어지고 있던 그 무렵, 혜교(慧皎·497~554)는 ‘고승전’에서 “번역가는 많으나 소리를 전한 사람이 별로 없음”을 아쉬워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멱력(覓歷), 백법교(帛法橋), 담약(曇龠), 담천(曇遷), 승변(僧辯), 혜인(慧忍), 소자량(蕭子良), 양무제(梁武帝) 등 승속을 넘나드는 인물이 한어 범패 창달에 기여하였다. 그리하여 도세(道世)는 ‘법원주림’의 ‘패찬편’에서 “조식이 범창(梵唱)을 감득했고, 백법교(帛法橋)가 서원하여 미묘한 음성을 통달하고 …(중략)… 재실(齋室)에서 몽향(夢響)이 발하였다”고 술회하고 있다.

백법교는 중산(中山)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경 읽기를 좋아하였으나 목소리가 시원찮아 곡기를 끊고 관음보살께 기도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목이 탁 트이는 느낌이 들어 물을 마셔 양치질을 하고 소리 내어 게송을 읊으니 그 음성이 청량하기 이를 데 없는 데다 90세가 되어서도 변함이 없었다. 그리하여 멀고 가까운 곳에서 그에게 법언 율조를 배우고자 모여들어 문하에 제자들이 많았기에 ‘법원주림’에서 ‘백법교의 서원’를 회고하고 있는 것이다.

육언범패를 지은 담약은 강승회가 창건한 건초사(建初寺)에 주석하며 진(晋)나라 효무 황제의 스승이 되었다. 얼굴이 못생겼던 담약이지만 매력있는 목소리를 타고난 데다 어느 날 꿈에 천신이 나타나 소리 법을 전해주었다. 꿈에서 깨어나 소리를 해보니 목청이 맑게 울려 사방으로 퍼졌다. 그러다가 문득 되돌아 꺽고 목구멍 안에서 다시 합쳐 거듭 굴렀다. 이러한 대목에서는 당시 범패의 선율 기교가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여광(呂光)이 2만여 필의 낙타에 서역의 보물과 가무 예인을 싣고 돌아왔다는 기록이 ‘수서’의 ‘악지’에 전할 정도로 북위, 북주, 북제는 다른 지역보다 서역 문물의 향유가 왕성하였다. 특히 북제의 황제는 음악을 좋아하여 황실에 악부를 설치하여 악인들을 왕으로 봉하고, 직접 호비파(胡琵琶)를 타며 노래하고 그에 화창하는 자가 백여 명이라 “무수천자(撫愁天子)라고 했다”는 기록이 ‘북제서(北齊書)’의 ‘유주제기(幼主帝紀)’에 전한다. 

이 무렵 왕으로 봉해진 악인 중 조묘달이 있었다. 묘달의 선조는 중앙아시아 조나라 출신으로 중원으로 이주해서 출신 지명을 성(性)으로 삼아 할아버지는 조바라문(曹婆羅門), 아버지는 조승노(曹僧奴)였다. 묘달의 조부 바라문은 쿠차의 비파를 배워 그 업을 대대로 전했으며, 손자 묘달이 장군의 지위와 맞먹는 위세를 누렸다. 당시 일반인들의 이름은 신분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묘달의 조부 ‘바라문’과 부친 ‘승노’에는 인도 불교 유입과 관련성이 있어 보인다. 

‘악부잡록(樂府雜錄)’을 비롯한 여러 문헌에는 다채로운 가창으로 당대 예술을 발전시킨 남녀 음성인(가수)들의 면모를 전하고 있다. 

직업 가수들이 벼슬까지 얻어 부와 명성을 누린데 비해 ‘화엄경’의 중예보살은 “누리거나 얻을 것이 없음”을 설하며 등장한다. 이전까지 중국 범패의 율조는 경전을 외는 송(誦), 가타를 낭송하는 송(頌) 정도가 전부였으나 중예보살은 ‘창(唱)’을 하였다. 

‘창’은 예술성이 가미된 노래이므로 그의 이름에는 예(藝)자가 붙는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화엄경’ 이전에 출간된 여러 경전에도 자모가 실려있고, ‘화엄경’ 이후에도 자모를 담은 경전들이 있지만 오늘날 범패로 불리는 것은 중예보살의 화엄자모찬이다.

석가모니의 설법이 한어로 번역될 때 가장 먼저 시도된 것이 범어 알파벳인 자모를 한자로 음사하는 것이었다. 

축법호(竺法護)가 ‘광찬반야경’에 42자모를 실은 이후 경전마다 그 경의 사상과 덕목을 자모에 대입해 오다 ‘화엄경’에 이르러서는 두 사람의 선지식이 자모를 송창한다. 

‘입법계품’ 제5품의 미가장자는 음성다라니로 42음(音)을 송주하고, 제45품의 선지중예는 42자(字)를 설함으로써 음성에서 자문으로 전환되어있다. 이때 음성 다라니를 설하는 선지식은 장자요, 자모다라니를 노래하는 선지식은 동자로 하여 당시에 새로 생겨난 자문다라니의 배경을 추정케 한다. 

‘입법계품’ 45품의 중예동자는 세속 음성인들의 활동 배경인 중(衆), 예술성이 가미된 범패를 암시하는 예(藝), 자문(字門)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탄생을 알리는 동(童)의 상징성을 갖는다. 실제로 당대에 이르러 의식을 뜻하는 한자 재(齋)가 등장하고, 멱역의 꺾고 돌리는 선율 기교에 더하여 세속적 창법까지 구사하는 연예인급 창도사가 전성기를 누렸다. 이들은 지방에 따라 양상이 다양하여 창도사 외에도 재가인이 하는 설법사, 읍사(邑師), 속인 법사 등 다양한 예인이 있었다.  

속강의 인기가 날로 상승하는 가운데 스타급 창도사들이 속출하였는데 그 중 최고는 문서(文漵)라, “보력(寶曆) 2년(826)에 당나라 경종이 문서(文漵)의 속강을 보러 흥복사(興福寺)에 갔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인기에 부합한 속강의 세속화가 범람하자 정통 승려와 봉건 지배층의 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문서는 경전을 날조했다(假託經論)”는 혐의로 수차례 처벌받고 유배를 가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도 속강의 인기는 식을 줄 몰라 “만수(萬壽) 공주가 자은사에 연극을 보러 갔다”는 기록이 ‘자치통감(資治通鑑)’에 등장한다.

상황이 이러하니 조린(趙璘)이 쓴 ‘인활록(因活錄)’에는 “속강의 세속화는 가혹한 처벌로도 막을 수 없음”을 토로하고 있다. 이후 송대에는 사찰 마당이 마을의 오락장이 되었고, 승단에서는 정토·시왕·민간신앙을 대폭 수용한 수륙 의궤를 제정함으로써 어산의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어장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윤소희 음악인류학 박사·동국대 대우교수 ysh3586@hanmail.net

[1719호 / 2024년 3월 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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