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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이색이상분(離色離相分 - 색과 상을 여읨)

기자명 진우 스님

하늘의 달이든 강에 비친 달이든 분별치 않으면 달은 그저 이름일 뿐

여래께서 말한 구족색신 또한 본래 공하니 결코 집착해선 안돼
가난한 사람 위할수록 배부른 부자들이 미워지는 것 또한 분별
현상에 매몰되지 않는 중도심을 가져야 언제나 여여할 수 있어

현상에 집착하면 삼독심이 일어나고 결국 평정심을 앓게 된다. 그러니 화두를 잘 챙겨 중도심을 가져야 항상 평온할 수 있다.  [법보신문DB] 
현상에 집착하면 삼독심이 일어나고 결국 평정심을 앓게 된다. 그러니 화두를 잘 챙겨 중도심을 가져야 항상 평온할 수 있다.  [법보신문DB] 

하이고 여래설 구족색신 즉비구족색신 시명구족색신(何以故 如來說 具足色身 卽非具足色身 是名具足色身)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완전한 형상을 갖춘 몸’이란, 곧 ‘완전한 형상을 갖춘 몸’이 아니라, 그 이름이 ‘완전한 형상을 갖춘 몸’이기 때문입니다.”

여래께서 말씀하신 구족색신(具足色身) 즉 완전히 갖춘 몸이란 본래 공(空)하여 구족색신이라 할 수 없으니, 만약 이를 구족색신이라 집착하여 복보(福報)라고 하거나, 구족(具足)으로 보는 것이라면, 이는 마음이 마음에게 속는 것과 같으므로, 색신(色身)이 곧 법신(法身)인줄 알지 못함이다. 법신을 하늘에 떠 있는 진짜 달이라고 한다면, 색신은 물에 비치는 달과 같고, 물에 비친 달은 허망한 달인 것이니, 물에 비친 달을 아무리 헤치고 찾아본들 달은 없을 것이므로, 하늘에 뜬 달을 볼 줄 알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와같이 구족색신이라도 구족이 구족이 아니요, 색신이 색신이 아닌 고로, 그 이름만이 구족색신이라 함이다. 그러므로 구족색신을 구족으로 알거나, 복보를 복(福)의 과보(果報)로 아는 것은 마음의 정체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물에 비친 가짜 달이든, 하늘에 뜬 진짜 달이든, 분별하지만 않는다면 달이 달이 아니고 그 이름이 달일 것이니, 달이라고 해도 되고, 달을 달로 보지 않아도 된다. 즉 좋고 싫은 고락(苦樂)을 분별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으면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하심이다. 고교 1년 때 하나님을 믿은 적이 있었다. 짧은 기간이지만 정말 절절하게 믿었다. 죽마고우가 가톨릭 집안이었는데, 같이 있으면서 감화를 많이 받았던 것이다.

물론 절에 있을 때였다. 예불을 보면서도 주기도문을 외울 정도였다. 하늘만 쳐다봐도 신의 뜻이었고, 어려움에 처할 때도 믿는 구석이 있기에 평화로웠다. 지금 죽어도 하나님 곁으로 간다는 생각에 아무런 여한이 없었다. 신을 믿는 논리는 간단했다. 모든 것은 하나로부터 시작되었다는 믿음이었다. 그 하나가 바로 하나님 즉 신이라고 믿은 것이다. 모두를 사랑할 수 있었다. 시련은 곧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괴로운 마음도 녹여졌다. 죽고 싶을 정도의 우울증을 앓았으나 말끔히 사라졌다. 나중에 목사가 되어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며 아름답게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런데 점점 현실에 부닥쳤다. 좋은 마음을 가질수록 좋지 않은 것들이 더욱 선명히 드러나 보였다. 정의감을 가질수록 불의가 보이게 되며 화가 치솟았다. 가난하게 살려고 할수록 배부른 부자들이 미워졌다. 세상이 삐딱하게만 보였다. 좋은 사람과 싫은 사람이 극명하게 갈렸다. 그럴 때마다 기분이 몹시 나빠지고 화가 났다. 조금이라도 싫은 사람은 지옥에 떨어지라고 기도할 정도였다. 분별심은 갈수록 심해졌다.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그동안 외면했던 교리(敎理) 책을 보기 시작했다. 이광수의 ‘원효대사’ ‘조신의 꿈’ ‘치문(緇門)’과 사집(四集-서장,도서,선요,절요)를 다시 보았다. 그리고 가장 충격을 받은 황산덕의 ‘중론송(中論頌)’ 신소천 스님의 ‘금강경강의’ 은사스님(백운)께서 쓰신 ‘양치는 성자’ 등을 보면서 감탄의 무릎을 쳤다. 진정한 진리와 참 종교에 대해 확연한 신심이 생겼다.

인과에 대해 깊은 이해를 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생기면 저것이라는 반대의 것이 생긴다는 너무나 간단하고 당연한 진리가 마음을 후볐다. 그리고 어느 하나만이 선택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즉 부처가 생기면 중생이 생기고, 하나님이라는 전지전능한 신이 있다고 믿는다면 그 반대의 하찮은 인간이 생긴다는 것, 극락과 천당이 생기면 지옥도 따라서 생긴다는 것을 알았다. 이 모든 것이 나의 분별된 마음에서 나온다는 것도 알았다.

이러한 상대적인 분별 현상을 벗어나려면 해탈(解脫)을 해야 한다. 즉 분별, 인과의 업(業)으로 뭉쳐져 있는 마음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래서 분별이 없는 중도심(中道心)을 가져야 한다. 세상이 시끄러운 것이 아니라 시끄러운 내 마음이 세상이라는 현상으로 드러난 것이다. 내게 나타나는 모든 인연 현상들은 나의 분별심이 내 마음의 그림자들이다.

은사스님께서 이제는 세상과 인연을 다하였다. 은사스님은 아마도 법력(法力)이 있으셔서 세연을 다하시기 전 몸은 아파도 마음은 평상심(平常心)을 유지하셨을 것이다. 은사스님을 보면서 편치 않은 마음을 가진 것은 나의 고업(苦業)이다. 분별업(分別業)이 남아 있어서 인과 작용으로 편치 않았던 것이다.

은사스님께서 아픈 것은 인연연기(因緣緣起)의 소치다. 그럼에도 당신의 마음이 평안하시다면 당신의 업이 소멸되었다는 증거이다. 당신 몫이다. 일체의 모습들은 생로병사(生老病死) 성주괴공(成住壞空)의 인연연기 현상일 뿐이기 때문이다. 너무나 당연한 인연연기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안타깝고 불편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면, 아직 괴로운 고업이 남아 있다는 증거이다. 이는 나의 몫이다. 모두가 자기 몫이다. 그러니 현상에 끄달리지 않는 중도심(中道心)을 가져야 항상 여여할 것이다. 기도와 참선, 보시와 정진은 나의 불편하고 괴로운 고업(苦業)을 멸(滅)해준다.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 가이구족제상견부 불야 세존 여래 불응이구족제상견(須菩提 於意云何 如來 可以具足諸相見不 不也 世尊 如來 不應以具足諸相見)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의 상이 완벽한 형상이라고 볼 수 있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여래의 모든 상이 완벽한 형상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의 말을 들으시고 또 물으셨다. 색신(色身)은 응화신(應化身), 즉 현실로 나타난 실제 부처님을 가리키는 이름이요, 제상(諸相)은 응화신(應化身)의 완벽한 몸인 삼십이상(三十二相) 팔십종호(八十種好)를 이름이다 하시었으니, 역시 법에 입각하여 물으신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여래의 몸인 구족색신(具足色身)을 먼저 물으시고, 다시 구족제상(具足諸相)을 물으신 것인가? 색신(色身)이라 함은 실제 눈에 보이는 부처님, 즉 현존불(現存佛)의 화신(化身)을 가리키심이요, 다시 색신(色身)에 딸린 구족(具足)한 모든 상(相)인 삼십이상(三十二相) 팔십종호(八十種好)의 제상(諸相) 역시, 따라서 이름뿐이다 하심이다.

수보리도 이를 알아듣고 같은 논법으로 대답하되, 세존이시여 여래 역시 공에 지나지 않을 것인데 어찌 구족(具足)한 제상(諸相)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까? 한 것이다. 색신에 딸린 구족(具足)한 모든 상, 즉 구족제상(具足諸相)이라 함은, 삼십이상 팔십종호를 말함이니, 이는 부처님께서 마음을 깨치신 복보(福報)로서 나타나는 더 이상 완벽할 수 없는 상을 말함이다. 그러나 이렇게 완벽한 제상이라 할지라도, 마치 하늘에 떠 있는 진짜 달을 달로 보지 않아야 할 것임에도, 대중은 이를 알지 못함이니, 이는 최후 수자견(壽者見)에 걸린 탓이다. 부처님께서는 이를 깨뜨리시기 위해 제상보다 색신을 먼저 물으셨고, 그 이유는 대중들이 색상보다 제상에 집착하는 마음이 더 컸기 때문이다. 쉽게 설명하자면, 이 또한 아무리 위대하고 기가 막힌 것이라 할지라도, 더 크고 더 좋다는 분별이 생긴다면, 그 즉시 하잘 것 없고. 싫고 나쁘다는 인과가 곧바로 생길 것이므로, 색신(色身)이든, 제상이든, 그 어떤 위대한 것도 분별하지 말라고 강조하고 또 강조하심이다.

서울 생활 하다 보면 가끔은 본업(?)에서 벗어날 때가 있다. 절에 있을 때는 새벽 도량석 소리를 듣고 일어나 예불이 끝날 때까지 좌선을 하거나 독송을 했었으나, 요즘은 가끔 빠뜨리는 날도 있다. 그러나 가능하면 새벽 두세 시경에는 일어나 좌선을 하거나, 때론 염불을 놓치지 않고자 한다.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평생 또는 전생부터 배어온 탐진치(貪嗔痴-탐욕, 성냄, 분별심) 삼독심(三毒心)의 습(習)을 털어 버리기 위함이다. 가끔은 화두(話頭)를 놓치기 때문이다. 화두란, 1700 공안(公案) 즉 마음을 깨친 선사들의 소리 울림 가운데 하나를 잡고 놓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해야 분별심이 붙을 틈을 주지 않는다. 조금은 전문적인 공부를 해야겠지만, 쉽게 말해서 좋고 싫은 분별심을 일으키지 않음으로써 인과가 생길 틈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다.

하루를 생활하다 보면 가끔 화두(話頭)를 놓치고, 탐진치(貪嗔痴-탐욕, 성냄, 분별심) 삼독심(三毒心), 즉 분별심(分別心)이 일어날 때가 있다. 이를 경계하기 위하여 매일 기도 참선을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 물론 분별심이 사라지고 업(業)을 멸한 마음 깨친 이들은, 행주좌와어묵동정(行住坐臥語默動靜) 신구의(身口意-몸가짐, 말, 생각) 삼업(三業)이 자유롭다. 어디에도 마음 걸림이 없으니 무애자재(無礙自在)이다. 그러니 어떤 상(相)이나 인연 현상에도 집착하지 않고, 탐심과 성냄과 고민이 전혀 생기지 않는다. 따라서 좋은 것을 탐하려는 분별된 마음이 생기지 않도록 항상 화두(話頭)로서 잠재우려는 것이다. 일순간이라도 화두를 놓치게 되면, 나도 모르게 마음을 놓치게 되어 당장 삼독심(三毒心)이 생기곤 한다. 그 순간에 욕심이 따라붙고 부지불식간에 울컥 성이 나기도 하고, 습관적으로 잔머리를 굴리게 된다. 그러면 평상심(平常心)을 잃게 된다. 화두를 잘만 챙기면 삼독심(三毒心)을 놓고 놓아 방하착(放下着)하게 된다. 진실로 중도(中道)의 마음으로 들어간다. 중도심(中道心)은 내가 삼업(三業)을 짓더라도 과보(果報)를 받지 않는다. 저절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하기 전에 몸이 먼저 움직이게 되고, 머뭇거림 없이 즉시 판단이 서며, 저절로 행동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집착하지 않는다. 미련도 없다. 항상 평안하다.

화두 하나에는 인과(因果)의 법칙과 인연 연기(緣起)의 법(法)이 모두 들어 있다. 그리고 공(空)과 중도(中道)와 견성(見性)과 해탈(解脫)이 모두 들어있다. 그러므로 화두 하나를 잡고 놓치지 않게 되면 곧 불법(佛法)을 여실히 알고 실천하는 것이 된다. 하루 한 시간이라도 좌선, 독경을 하거나, 그도 안 되면 반야심경(般若心經) 한편이라도 독송하면서, 인과(因果)와 무분별(無分別)심, 인연(因緣) 연기(緣起)의 소치를 생각하며, 내일 또는 오늘 하루를 삼독심(三毒心)에 젖지 않고 신구의(身口意-몸가짐, 말, 생각) 삼업(三業)을 청정히 하도록 매일같이 정진해야 할 것이다.

진우 스님 조계종 총무원장 sansng@hanmail.net

[1719호 / 2024년 3월 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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