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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변계소집

진실도 언어화하면 진실 아니다

중생들 인식 방법이 변계소집
변계는 두루 분별함을 의미
소집은 굳게 집착한다는 것
개념·가치·기준에 매인 상태

앞서 여리청문보살은 일체법과 둘이 없는 이치에 관해 해심심의밀의보살에게 물은 내용을 설명하였다. 이제 해심심의밀의보살 답변을 살펴보자.

‘선남자여 일체법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유위(有爲)요, 또 하나는 무위(無爲)입니다. 그러나 이 가운데 유위는 유위가 아니며, 무위 또한 무위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유위란 본사께서 시설하신 가르침은 진실이 아닌 것으로 변계소집(遍計所執)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선남자여! 이는 무위도 마찬가지입니다.’

유위는 중생의 번뇌에 의해 드러난 무상하고 차별되고 괴로운 법들이다. 이와는 반대로 무위는 부처님의 열반 경지에서 드러난 생멸이 없고 평등하고 안락한 법들이다. 해심심의밀의보살은 중생계의 일체 상대적이고 대립적인 법들 가운데에 유위와 무위를 예로 들어 이들이 둘이 없는 법임을 설명한다. 이 질문 속에는 단순히 유위와 무위 관계만이 아닌 중생계의 모든 대립적 관계들을 함축하고 있다.

소승에서 유위와 무위는 엄연한 차별이 있다고 여긴다. 이러한 이유로 소승의 수행자들은 유위를 벗어나 무위에 안주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이에 반해 대승에서는 유위가 공하여 실체가 없으므로 무위 또한 공하여 실체가 없다고 가르친다. 따라서 유위에 집착하는 것도 어리석지만 실체가 없는 무위에 집착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라고 비판한다. 대승에서는 유위가 공한 것으로 무위를 삼기 때문에 유위와 무위에 아무런 차별이 없다고 본다. 

그런데 해심심의밀의보살은 이제 이러한 가르침들마저도 분별과 언어의 소산에 지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바로 ‘변계소집’이란 유식 사상의 핵심 용어가 이 경에 등장한다. 변계소집은 중생들의 인식 방법으로 교리상 좋은 의미를 지닌 용어는 아니다. 중생들은 자신을 비롯한 세상 모든 것에 명칭을 만들어 인식한다. 그 명칭 속에는 개념과 가치와 기준이 따라붙는다. 예를 들어 연꽃은 아름답다고 할 때 연꽃은 명칭이고, 모습은 개념이며, 아름답다는 가치이고, 다른 것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기준이다.

유식학에는 중생들의 이 같은 인식 방법을 변계소집이라 부른다. 변계소집에서 변계라는 말은 두루 분별한다는 의미이고, 소집은 굳게 집착한다는 의미를 안고 있다. 여기서 해심심의밀의보살의 설명 의도는 부처님께 변계소집의 허물이 있다는 뜻은 아니다. 부처님은 변계소집을 떠난 청정한 원성실성(圓成實性)의 대지혜에 머무신다. 다만 부처님께서 사용하신 말씀이 중생의 언어를 빌려 사용했기 때문에 변계소집이라는 것이다. 해심심의밀의보살 답변은 계속된다.

‘설사 이러한 유위와 무위를 모두 벗어났더라도 조금이라도 설한 바가 있다면 그것은 변계소집인 것입니다.’

부처님이 증득한 경지는 일체 언어와 분별이 끊어진 부사의 경계이다. 중생계의 범부들로서는 이러한 부처님의 경계를 측량할 수 없다. 

본문에 부처님의 말씀이 진실이 아니라는 의미는 부처님께서 중생을 속이고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의 경계는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었는데 이를 언어화했으니 진실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유마경’의 ‘불이품’을 보면 그 뜻이 더욱 명료해진다. 유마거사를 중심으로 수많은 보살이 제각기 모든 상대의 법들이 둘이 아니라는 불이(不二) 법문을 피력한다. 있음과 없음, 삶과 죽음, 옳음과 그름, 중생과 부처, 생사와 열반, 번뇌와 보리 등 갖가지 예를 들며 이들은 본질적으로 공하기 때문에 둘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때 마지막으로 문수보살이 등장한다. 문수보살은 불이법을 설한 모든 보살을 칭찬하고 진정한 둘이 아닌 도리는 분별과 언어로 드러낼 수 없음을 강조한다. 문수보살은 끝으로 유마거사에게 불이법문을 설할 것을 청한다.

그러자 유마거사는 침묵에 잠긴다. 이에 문수보살은 유마거사의 말 없는 도리야말로 둘 아닌 법문의 완성이라고 크게 찬탄한다. 이것이 그 유명한 유마의 일묵(一黙)이다.

유위든 무위든 입을 여는 순간 부처의 경계와는 어긋난다는 것이다. 선가에서는 개구즉착(開口卽錯)이라 했다.

이제열 불교경전연구원장 yoomalee@hanmail.net

[1720호 / 2024년 3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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