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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나의 몸과의 불가지한 우정에 대해

마음과 몸은 깊은 곳에서 불가지한 우정 나누네

사람이란 사람 마음에 의해 생각된 몸과 세상을 가진 자
마음에 자기 몸이 알려질 때는 살아있는 실체처럼 나타나
심층의 마음은 몸을 직감적으로 수용할 뿐 집착하지 않아

그의 꿈속에서는 언제나 그의 몸과 그것을 감싸고 있는 세계가 함께 나타나고, 이러한 꿈의 형식이 바로 그 자신이다.     [아이클릭아트]
그의 꿈속에서는 언제나 그의 몸과 그것을 감싸고 있는 세계가 함께 나타나고, 이러한 꿈의 형식이 바로 그 자신이다.     [아이클릭아트]

미륵의 후예들은 세상의 모든 것이 꿈과 같고 환과 같다고 하지만, 또한 우리가 다 알기에는 너무 복잡한 것임을 인정한다. 그들에 따르면, 마음(제8아뢰야식)에 의해 변현되는 세계는 극히 미세하거나 혹은 극히 광대하기에 불가지(不可知)하고, 그것들을 변현해 낸 마음의 작용은 극히 미세하기에 불가지하다.(‘성유식론’ 제2권) 그런데 ‘불가지’라는 말은 실은 가짜 말이 막다른 길에 이르렀을 때 쓰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마치 꿈과 같고 환과 같다’고 하는 은유적 표현도 실은 말문이 막혀서 하는 말이요, 어떤 경이로움과 불가지함을 표현한 것으로 받아들이곤 한다. 가령 마술쇼를 관람하는 자가 장차 보게 될 환영이 가짜인 줄 알았음에도 막상 그것을 보면 탄성을 지르며 새삼 놀라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것 중에도 내게 유달리 정(情)이 가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나의 살아있는 몸이다. 이번 글은 그 몸에 대한 짧은 단상이다.

불교적 윤회관에 따르면, 중생은 저마다의 몸과 그 몸이 의지하는 세상을 함께 과보로 받아서 태어난다. 사람은 사람의 몸을 가지고 사람 세상에 태어나고, 물고기는 물고기 몸을 가지고 물고기 세상에 태어난다. 미륵의 후예들의 어법을 따르자면, 총체적 과보[總報]로 주어진 중생의 마음(제8아뢰야식)이 자기만의 몸과 세계를 변현해 내어 알아차리고 있다. 그러니까 그가 사람인 것은, 사람 마음에 의해 생각된 몸을 가지고 사람 마음에 의해 생각된 세상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나는 또한 우리가 평생 꾸는 꿈의 단순한 형식을 발견하였다. 가령 그의 꿈속에서는 서울의 한 동네 풍경이 주로 나타나는데, 간혹 일본 도쿄 근교의 후지산 봉우리나 중국 운남성의 옛 도시의 정겨운 상점 등이 나타날 수도 있다. 또 그 꿈속에는 다채로운 산천초목들, 길에서 스치며 지나간 낯선 얼굴들, 지하로 내려가는 돌계단 등이 포함되기도 한다. 그의 마음은 평생 똑같은 공간을 꿈꾸지는 않지만, 언제 어느 곳에서든 살아있는 자기의 몸을 변함없이 드러낸다. 그의 마음은 아무것도 없는 허무 속에 그의 육체를 드러낸 적이 없고, 오히려 그의 몸이 움직임에 따라 그것을 에워싸고 있는 공간도 변하는 것처럼 느낀다. 그러니까 그의 꿈속에서는 언제나 그의 몸과 그것을 감싸고 있는 세계가 함께 나타나고, 이러한 꿈의 형식이 바로 그 자신인 것이다.

이제부터 나는 나의 꿈속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몸과 세계의 차이에 대해 사색해 보려 한다. 나의 꿈속을 곰곰이 들여다보니, 나이가 들수록 세상사에는 크게 집착하지 않게 되었지만, 몸에 대해서만큼은 망정(妄情)이 줄어들지 않음을 느낀다. 나는 어린 시절을 서울의 인왕산 자락에서 보냈고, 산, 바위, 돌, 초목 등과 깊은 우정을 쌓았다고 하겠다. 그래도 가령 저 산천초목을 보고 있을 때라면, 미륵의 후예들이 가르쳐준 환상 탈출의 비법대로 관하면서 집착을 조금 덜어내기도 한다. ‘저 산과 바위는 나의 마음에 의해 생각된 산과 바위이다. 그것들은 진짜가 아니라 단지 ‘마치 산처럼 나타난 것’이고 ‘마치 바위처럼 나타난 것’이다. 모두 환 같은 가짜이니, 굳게 집착할 것이 못 된다.’ 물론, 나는 나의 몸에 대해서도 그런 관법을 시도해 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나의 몸만큼은 가짜가 아닌 살아 있는 실체처럼 느껴지고, 어딘가 아프면 그런 자각이 더욱 명료해지는 것이다. 병세가 깊어지면 그 원인을 따져봐야 한다. 그래서 내가 배운 학설 안에 그럴듯한 설명을 찾아보기로 하였다.

미륵의 후예들에 따르면, 심층의 마음(제8아뢰야식)은 살아 있는 동안 끊임없이 자기 몸과 세계를 변현해내어 알아차리고 있다. 그런데 그 마음이 몸을 알아차리는 방식과 세계를 알아차리는 방식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 마음에 산천초목이 현현할 때는 그것들은 마치 외계에 속한 사물들처럼 나타난다. 그런데 그 마음에 자기 몸이 현현할 때는 그것은 마치 살아 있는 내적인 실체처럼 감지된다. 그 이유는 바로 몸이 ‘감각 기능을 가진 몸[有根身]’이기 때문이다. 가령 시각이나 후각 등도 몸의 형태나 냄새 등을 인식하지만, 단지 몸의 단편적 특징만을 인식하는 것이고, 그러한 인식은 잠시 일어났다가 중간에 끊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저 심층의 마음이 자기 몸을 알아차릴 때는 자기 몸을 이루는 물질[扶塵根]과 정묘한 감각 기능[淨色根]을 ‘항상 통째로’ 붙잡고 있다. 이로 인해 그 몸이 무너지지 않고, 마치 항상 스위치가 켜져 있는 물체처럼, 달리 말하면 마치 살아있는 실체처럼 유지되는 것이다. 그와는 반대로 그 마음이 자기 몸을 놓아버리면 곧 몸은 허물어지고 감각 없는 시체로 남겨진다. 그래서 마음과 몸은 안온[安]과 위험[危]을 함께 한다고 말한다.(‘성유식론’ 제2권) 

그런데 사실 저 심층의 마음은 자기 몸에 대해 정을 쌓으며 집착한다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그 마음은 대상을 분별하는 데는 그리 훌륭한 능력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분별한다’는 것은 사물들 간의 미세한 차이를 지우고 공통점을 일반화하고 추상화시키는 것이다. 가령 2024년 2월의 어느 날 눈 덮인 북한산 자락을 보면서 ‘저 산을 봐’라고 말했다면, 그는 세상의 모든 개별적인 산들의 차이를 잊고 추상적인 ‘산’의 관념을 떠올린 것이다. 또 필시 그 산의 풍경이 마음에 들었기에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저 심층의 마음은 극히 미세하고 불명료해서, 마음에 거슬리는 경계인지 혹은 마음에 드는 경계인지 분별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 마음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미세하고 다양한 세계를 곧바로 직감하면서 항상 담담한 느낌[捨受]으로 수용한다. 당연히 그 마음이 자기의 몸을 통째로 붙잡고 있을 때도 그러했을 것이다.(‘성유식론’ 제3권) 

지금까지 나는 나의 어떤 증상의 원인을 알아보기 위해 번쇄한 문헌을 이곳저곳 살펴보았는데, 어떤 처방전을 받았다기보다는 뜻밖의 진실과 마주한 듯하다.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을 하였다. 나의 마음은 저 깊은 곳에서는 몸에 대한 깊은 망정을 쌓기보다는 담담한 우정을 나누었던 것이 아닐까. 마치 그 마음이 비극의 씨앗이든 희극의 씨앗이든 가리지 않고 모두 받아들여 자기만의 비옥한 종자 창고를 꾸미듯이, 또한 저 한 방울의 정혈(갈라람)에서부터 흠결 없는 활기찬 육체를 거쳐서 늙고 병든 몸에 이르기까지 나의 몸을 세계 속에 꾸준하게 드러내 준 것이야말로 진정 불가지한 우정이 아니겠는가. 또 그 마음은 나의 몸을 언제나 살아있는 실체처럼 붙잡아 주면서도 ‘이것은 진짜로 살아있는 실체다’라고 분별하지 않는다. 그러니 내 안의 변덕스럽고 거친 또 다른 식(識)이 아마도 나의 몸에 정을 쌓으며 ‘나’라고 고집하는 것이리라. 언젠가는 그 이야기도 하게 될 것 같다.    

백진순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 dharmapala@hanmail.net

[1720호 / 2024년 3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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