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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고려, 조선 사찰의 콩류 음식

형편 어려웠던 산중사찰의 ‘생존 식재료’

두부·두유·두부피·콩비지·콩나물부터 콩 볶아 빻은 미숫가루까지
고려~조선시대 콩은 불교사찰 음식 문화서 빠질 수 없는 식재료
스님들 염불 횟수 콩알로 헤아렸다가 부처님오신날 대중에 회향  

1) 삶은 콩 메주 2) 콩나물 3) 콩자반. 사찰의 스님들은 콩으로 장류를 만들거나 두부를 만들었다. 특히 콩은 가난한 백성이나 경제적인 형편이 어려운 조선 산중사찰의 스님들에게 풍부한 영양을 제공해줘 생존과도 직결된 식재료였다.[주호·경운 스님·아이클릭아트]
1) 삶은 콩 메주 2) 콩나물 3) 콩자반. 사찰의 스님들은 콩으로 장류를 만들거나 두부를 만들었다. 특히 콩은 가난한 백성이나 경제적인 형편이 어려운 조선 산중사찰의 스님들에게 풍부한 영양을 제공해줘 생존과도 직결된 식재료였다.[주호·경운 스님·아이클릭아트]

고려·조선시대의 콩은 사찰의 음식 문화에서 빠질 수 없는 식재료 가운데 하나다. 콩과 관련해 가장 중요한 음식물은 장류와 두부인데 이전 연재에서 관련 내용을 이미 다뤘기에 이 두 가지를 제외한 콩류 음식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고려시대 말 목은 이색은 ‘목은시고(牧隱詩藁)’의 ‘금주음(衿州吟)’과 ‘요음(曉吟)’이라는 시에서 스님이 대접한 두부를 먹고 미안해하는 모습을 묘사하거나 두부국을 끓이는 모습을 상세하게 그리고 있다. 

“두부를 기름에 지지고 잘라 국을 끓일 때(豆腐油煎切作羹)/ 여기에 다시 총백을 넣어서 향미를 더한다(更將蔥白助芳馨).”

두부를 만드는 것과 동일한 두유로 만들 수 있는 것이 바로 두부피(豆腐皮)이다. 두부피에 관한 언급은 불교문헌 속에서는 찾기가 힘들다. 하지만 이시필(李時弼, 1657~1724)이 1720년경 편찬한 ‘소문사설(謏聞事說)’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이시필은 “두유를 용기에 넣고 가열하면 표면에 피막이 생기는데 이것을 건져내어 두부피를 만들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 “두부피를 그늘에 말렸다가 보관해 두면 국을 끓이거나 반찬을 만들 때 이용할 수 있으며 그 맛이 담백해 찬으로 먹을 만하다”고 말한다.

중국은 두부피를 ‘두피(腐皮)’ 혹은 ‘부죽(腐竹)’이라 부른다. 일본은 유바(ゆば, 湯葉、湯波、油皮、豆腐皮)라고 지칭한다. 특히 일본은 당나라 시기 천태종 승려 사이초(最澄, 767~822)가 중국에서 두부를 배워 일본 천태종 총본산인 비예산 연력사(比叡山 延暦寺)에 전했다고 한다.

두부를 만들다 보면 콩비지(豆腐滓)라는 또다른 훌륭한 식재료가 부산물로 얻어진다. 조선중기 정시한(丁時翰, 1625~1707)의 ‘산중일기(山中日記)’를 살펴보면 조선 산중사찰의 승려들이 식료로 콩비지를 이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구절이 나온다. 

“1686년 8월 13일 구례 길상대암, 효이 스님에게 쌀 다섯 되를 빌렸다. 절의 스님이 경숙이를 연곡사로 보내어 비지(豆腐滓)를 얻어오게 했다.” 

조선시대 산중사찰들은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두부와 국수는 종교 의례용 혹은 자가용으로 자주 만들어 먹었다. 두부를 만들고 난 부산물로 얻어지는 비지 역시 음식으로 활용하였다. 

이익(李瀷, 1681~1763)은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맷돌로 갈아 정수만 취해서 두부를 만들 때 많은 찌꺼기가 남는데 끓여 국을 만들면 구수한 맛이 먹을 만하다”고 밝히고 있다.

조선시대 사찰은 콩을 이용해 만든 음식을 섭취했을 뿐만 아니라 콩나물을 식재료로 활용하기도 했다.

정시한은 ‘산중일기(山中日記)’에서 “1686년 12월 27일 보은 본속리암, 저녁 무렵이 되어 콩나물(黃拳)과 달인 간장, 두부 약간을 갖고 경숙이가 돌아왔다”고 언급하고 있다. 아마도 두부와 콩나물을 넣고 간장으로 조미한 국을 만들거나 두부는 지지고 콩나물은 무침 형태의 반찬으로 만들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의 ‘임하필기(林下筆記)’에서 황해도 장연(長淵)에서 생산되는 대두 황권(黃拳)이 다른 보통 콩나물에 비해 크고 국을 끓이면 아주 담백하다 말하고 있다. 이익도 콩나물에 대해 ‘성호사설’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또는 싹을 틔워서 콩나물로 만들면 분량을 몇 배를 만들 수 있다. 가난한 자는 콩을 갈고 콩나물을 썰어서 한데 합쳐 죽을 만들어 먹는데 족히 배를 채울 수 있다.”

특히 조선시대 승려들은 콩을 볶아 빻아서 미숫가루 형태로 이용하였던 듯하다. 정시한의 ‘산중일기’에도 이런 언급이 있다.

“1686년 6월 5일 함양 금류동암, 명학스님이 콩가루 두 말 다섯 되를 빻아서 보관하고 나머지 세 되는 물에 타서 암자의 여러 스님들과 함께 나누어 먹었다.”

조선후기 유득공(1749~1807)이 지은 세시기인 ‘경도잡지(京都雜志)’에서 볶은 콩과 관련된 부처님오신날 풍속을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서울 풍속 중에 염불하는 승려들은 언제나 콩으로 그 횟수를 세었다가 사월 초파일이 되면 그 콩을 볶고 소금을 살짝 뿌려 길에서 사람들을 맞아 먹기를 권하여 인연을 맺었다.”

성호 이익은 백성들에게 있어 콩이 어떠한 역할을 맡고 있는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콩은 오곡 중 하나인데, 사람들이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곡식이란 사람을 살리는 것이 가장 중요한 역할이기 때문에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콩의 힘이 가장 큰 것이다. 백성들 가운데 잘사는 이는 적고 가난한 자가 많으므로, 좋은 곡식으로 만든 맛있는 음식은 다 권세있고 현달한 자에게로 돌아가 버리고, 가난한 백성이 얻어 먹고 목숨을 이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이 콩뿐이었다. 콩값이 낮을 때는 벼와 서로 비슷해 벼 한 말을 찧으면 네 되의 쌀을 얻을 수 있다. 한 말의 콩으로 네 되의 쌀을 바꾸는 셈이다. 따라서 실질적으로는 오분의 삼이 증가하는 것이니, 이것이 큰 이익이다.”

이렇듯 사찰에서 콩은 장류를 만들고 두부를 만들 수 있는 중요한 식재료였다. 무엇보다 콩류가 큰 역할을 하는 것은 가난한 백성이나 경제적 형편이 어려운 조선 산중사찰의 생존과 관계된 상황에서 그 역할이 두드러졌을 것으로 분석한다.

공만식 동방문화대학원대 교수 kms3127@hanmail.net

[1720호 / 2024년 3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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