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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마조선 관점에서 바라본 인도 선과 중국 선 비교-상

기자명 정운 스님

현실 중심 중국 사고, 선에도 영향

번뇌 하나하나 제거함으로
해탈한다는 인도선과 달리
중국 선, 현실 자각을 통해
진정한 자유 얻는다고 강조

당대∼오대[8세기∼10세기]는 중국불교 역사상 선의 르네상스이다. 다음 시대인 송대는 간화선이 등장하지만, 선의 발전이라기보다는 답보 상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연하자면, 송대까지 선과 선종이 정립되고 발전한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의 연장선에 있다고 봐야 한다. 

선종사를 개괄하면, 달마∼6조 혜능까지 선의 씨앗이 뿌려지고, 당나라 때의 선[마조계 조사선]이 근간을 형성했으며, 북송과 남송 시대에 살이 붙고 피를 통하게 한 것이라고 보면 맞을 듯하다. 이에 중국 선의 최고 정점은 당대 조사선이라고 보면 된다. 한편 한국불교도 그렇지만, 중국불교도 송대 이후 선종을 중심으로 발전했기 때문에 중국 선종사가 중국 불교사라고 해도 무방하다. 당대에 마조계 선이 르네상스를 구가하면서 선은 현실적인 측면으로 발전하였다. 이 시점에서 중국선[여기서는 조사선]이 인도 선과 어떤 면에 차이가 있는지 살펴보자.

첫째, 고통을 어떻게 볼 것인가? 부처님은 생노병사 4고를 여의기 위해 출가했다. 인도 선은 수행을 통해 고통을 제거한 뒤에 해탈 열반을 추구했다면, 중국 선은 고통을 여의는 것이 아닌 그 고통·고뇌 속에 깨달음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곧 번뇌즉보리·생사즉열반 사상을 근간으로 한다.

둘째, 열반을 어떻게 볼 것인가? 초기불교에서 깨달은 성자는 윤회하지 않는다는 회신멸지(灰身滅智)이다. 반면 중국 선은 영원히 열반에 들지 않는 부주열반(不住涅槃)[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사바세계에 머물러 있음]이 강조되었다. 이는 대승경전의 영향이지만, 보살로서의 이타를 강조한다.

셋째, 인간과 부처의 문제이다. 인도 선에서 비구들의 최종 목적은 아라한이고, 감히 ‘부처’가 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이에 깨달은 성자[석가모니불]는 오직 한 분만을 지칭하는 고유명사이다. 그런데 중국 선에서는 부처가 되는 것[成佛]을 목적으로 하며,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는 보통명사이다. 대승의 성불 사상을 한층 발전시켜 중국화 된 선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넷째, 깨달음 문제이다. 인도 선에는 번뇌를 하나하나 제거해야 해탈의 경지에 이른다. 선정도 초선-2선-3선∼멸진정까지인 9차 제정이 있다. 마지막 멸진정은 아나함과이다. 반면 중국 선에서는 바로 지금의 삶[=번뇌]에서 마음자리 하나 돌렸을 때, 바로 그 자리가 해탈 경지이다. 즉 인도 선이 점수적인 경향이라면, 중국 선은 돈오적인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점수는 인도 선이고, 돈오는 중국선이라는 뜻은 절대 아니다]. 이를 증명하는 것이 마조의 즉심시불(卽心是佛)이다. 공자는 “인(仁)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인을 행하려고 하면 바로 여기에 인이 이른다”고 하였다. 마조도 ‘어디서든 늘 진실한 그대로, 현실의 삶 그대로가 진실’이라고 말했다. 현실 그대로에 참됨을 자각하는 것이 자유이며, 현재에 깨어 있을 것을 강조하고 있다.

다섯째, 시간적인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법화경’ ‘수기품’에 수기 사상이 강조되어 있다. 이 수기란 ‘이번 생에 열심히 정진했으므로[因] 다음 생에는 반드시 부처가 된다[果]’고 부처님께서 예언해 주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수기가 발달 돼 있지 않다. 바로 이 점은 중국인의 사고와 관련되는데, 중국인은 현실적인 민족으로 미래를 염두에 두지 않기 때문이다. ‘현생에 사람 몸 받았을 때 깨달아야지 미래 생까지 갈 필요가 있느냐?’는 중국인의 사고가 작용한 것이라고 본다. 자로(子路)가 ‘다음 생’에 대해 물었을 때, 공자는 ‘삶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느냐[未知生焉知死]?’고 답했다. 중국 선은 미래 생이 아닌 현재 현실 삶에 의미를 더 부여했다고 본다.

여섯째, 공간적인 문제이다. 인도 선은 공간이 관념적인 사유로 3계[욕계·색계·무색계]가 설정되어 있으며, 사바세계만이 아닌 다른 부처 세계가 설정되어 있다. 물론 3계는 선정의 단계[깨달음의 경지]와도 관련되어 있다. 반면 중국 선에서는 자신이 서 있는 그 자리가 바로 해탈·열반의 경지이다. 중국 사찰에서 자주 보는 문구가 회두시안(回頭是岸)이다. ‘현재 서 있는 그 자리에서 머리를 돌리는 그 자리에 피안[해탈·열반]이 있다’는 뜻이다.

정운 스님 대승불전연구소장 saribull@hanmail.net

[1721호 / 2024년 3월 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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