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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흥교사-세 사리탑이 전하는 메시지

기자명 오동환

대기업 개발에 사라질 뻔했던 회통의 역사

현장·규기·원측 스님, 입적 장소 다르지만 사리탑은 한 곳에 
규기·원측의 학문 간극 흥교사서 회통하며 법상종 위상 세워
역사는 시·공간 종합체…장소·인물·유물 함께 보는 안목 필요

원측법사(우)와 규기법사. 비에 새긴 선각화를 바탕으로 재현하였다.
원측법사(우)와 규기법사. 비에 새긴 선각화를 바탕으로 재현하였다.

자은사에서 남쪽으로 약 18km 떨어진 곳에 천년고찰 흥교사(興敎寺)가 자리하고 있다. 흥교사의 가치는 이곳에 모셔진 현장법사(601~664)와 원측(圓測, 613~696), 규기(窺基, 632~682) 등 법상종 3조의 사리탑에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세 분이 원적하신 곳은 모두 흥교사가 아니며, 이곳에 모셔진 시기 또한 다르다. 그 배경에는 동아시아 불교사에 굵직한 족적을 남긴 세 인물 사이의 복잡한 관계가 얽혀있다.

현장은 인도 나란타사에서 미륵-무착-세친에 뿌리를 두고 호법-계현으로 이어지는 유식학을 공부하였다. 범본 경전을 가지고 장안에 돌아온 후 현장은 기존에 진제(眞諦)의 역본을 중심으로 유통됐던 유식론과 차별화된 이른바 ‘신역(新譯)’ 유식론을 전개하였다. 현장의 대대적인 역경불사가 황실의 적극적 지원을 받으며 진행되는 과정에서 다수의 제자가 배출되었다.

그중 가장 주목받는 이가 규기였다. 명문가의 자제였던 규기는 17세에 출가하여 곧바로 현장의 제자가 되었고, 25세에 이미 현장의 역경에 참여하였다. 규기는 자은사로 온 이후 줄곧 현장의 유식논서 번역에 참여하였다. ‘성유식론’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함께했던 신방, 가상, 보광 등 3인을 모두 물리고 규기만을 곁에 두었다는 일화는 규기의 재능과 그에 대한 현장의 신임을 잘 보여준다. 규기는 현장에 이어 자은사의 상좌(上座)가 되어 평생에 걸쳐 총 42부의 주석서를 내며, 현장의 사상에 기반한 유식론으로 제반 경론에 대한 논리적 해석을 관철하였다. 이런 이유로 규기는 ‘백본소주(百本疏主)’라 불렸고, 중국 법상종의 제1조로 평가받는다.
현장은 옥화사(玉華寺)에서 ‘대반야경’ 600권 번역을 완수하고, 이듬해 원적하였다. 그의 사리는 처음에는 황궁에서 가까운 산수(滻水) 백록원에 모셔졌으나, 669년 지금의 번천(樊川) 소릉원(少陵原) 흥교사 자리로 옮기고 탑을 세운 것이다. 규기는 자은사 번경원에서 입적하였고(682), 곧바로 소릉원의 현장법사 탑 옆에 사리탑이 세워졌다. 그러나 원측의 사리탑이 흥교사에 세워진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의 일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송고승전’이 전하는 원측의 ‘도청설’이다. 현장이 규기를 위하여 유식론을 강설할 때, 원측이 문지기를 매수하여 현장의 강의를 몰래 들었으며, 서명사에서 그 강의를 먼저 하였다거나, 먼저 주석서[疏]를 내었다는 얘기다. 원측은 신라의 왕족출신으로, 3세에 이미 출가하고 15세에 당나라로 구법을 떠났다. 장안에서 그는 6개 국어에 능통한 것으로 알려졌고, 법상(法常)과 승변(僧辯)에게 유식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으며, ‘비담’ ‘성실’ ‘구사’ ‘파사’ 등의 논서를 열람하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원측이 33세에 현장과 만났을 때 “서로 계합하였고, 현장법사가 곧바로 (범본) ‘유가론’ ‘성유식론’ 등의 논서와…경론을 주니, 마치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듯” 막힘이 없었다(‘원측사리탑명’). 원측이 현장의 제자가 되어 신역의 유식을 공부하였지만, 규기와는 사상적 토양과 환경이 달랐던 것이다. 원측과 규기의 차이는 원측이 일체중생에게 모두 성불의 가능성을 열어둔 것과 달리 규기계의 학파에서는 ‘오성각별론(五性各別論)’을 주장하며 중생의 성불에 차별성을 강조한 점에서 드러나는데, 양측에 결코 화해할 수 없는 사상적 간극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도청설’의 생성은 이러한 대립의 양상이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2012년 촬영된 흥교사 원측법사 사리탑. 원측법사 탑 오른쪽에는 현장법사와 규기법사의 사리탑이 나란히 서 있다. 2012년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준비하기 위해 구조물이 설치된 당시 모습.

그럼에도 현장은 원측의 사상을 존중하였고, 원측을 서명사의 대덕으로 삼았다. 원측은 황제가 된 측천무후를 따라 동도(東都)인 낙양으로 주처를 옮겼고, 용문 향산사(香山寺)에서 입적했다(696). 제자들은 향산사에 사리탑을 세우고, 그중 사리를 나누어 장안 풍덕사에 사리탑을 세웠다. 1115년에 다시 사리를 나누어 흥교사 현장법사탑 옆에 탑을 세웠으니, ‘송고승전’에 ‘도청설’이 기록된 지(988) 120여 년 후의 일이다. 비록 현장은 신역 유식에 힘썼고, 규기는 그 뜻을 온전히 계승하였지만, 신역과 구역의 회통에 힘쓴 원측의 탑이 함께하지 않았다면, 흥교사가 법상종의 종찰로서 위치가 온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천여 년이 지나도록 자리를 지켜온 세 분의 사리탑은 201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중국 불교계와 문화계에 경종을 울린 사건이 발생했다. 흥교사를 철거 이전하려는 계획이 추진되었던 것이다. 유네스코에 등재 신청한 부분은 사리탑만 해당하기 때문에, 탑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찰지와 건물을 철거해 환경을 개선한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든 것이다. 이 일은 2013년 4월에 불교·문화계 인사들의 공론화로 매체에 보도되었고, 그 후 여론이 들끓었다. 이러한 계획추진 배후에 취장(曲江)이라는 기업이 이곳을 상업화하고, 부동산의 지가상승과 그것을 이용한 대출의 순환고리를 통해 폭리를 취하려는 술책이 있었다. 이 계획은 결국 공론화 이후 각계의 각성과 여론에 의해 무산되었고, 흥교사는 본래의 면모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 일로 중국에는 문화유산에 대한 각성이 일어났다. 문화유산이란 마치 골동품 마냥 단순히 어떤 물건이나 건물 자체에만 전유된 것이 아닌 공간적이고 시간적인, 종합개념인 것이다. 마치 세 분의 사리탑 중 하나라도 부족하면 그 의미가 훼손되듯이, 3기 탑의 가치를 논할 때, 그 토양이 되는 사찰과 스님들을 배제한다면 본말이 전도된 허울뿐인 ‘세계문화유산’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이러한 근시안적이고 사리사욕을 목적으로 모종의 계획이 획책되는 사례는 비단 흥교사 하나가 아니고, 또 중국에 국한한 일도 아닐 것이다. 불교가 역사와 문화로부터 불가결한 관계에 있는 우리 역시 타산지석으로 삼을 일이다.

오동환 중국 섬서사범대 박사과정 duggy11@naver.com

[1721호 / 2024년 3월 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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