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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대만을 범패 성지로 만든 광친 큰스님과 성운대사 

기자명 윤소희

혁명 피해 이주한 승단, 전통 범패 대만에 전수

대만에 천티엔찬스 건립해 보수적 범패·승풍 이은 광친 스님
서로 다른 관습 대만·대륙, 표준화운동과 함께 국어 범패 형성
성운대사, 범패 무대공연 시작…세계적 불교음악축제로 발전

위)광친 큰스님. 개불의식을 주관하고, 염불수행을 일러주는 모습. 아래)2005년 항저우에서 열린 불교 행사에 내방한 성운대사.
위)광친 큰스님. 개불의식을 주관하고, 염불수행을 일러주는 모습. 아래)2005년 항저우에서 열린 불교 행사에 내방한 성운대사.

동진 때부터 강회(江淮) 이남은 불교사상 연구와 문화 발전의 붐이 있었다. 중국 각지 사원의 범패가 강남에서 전해졌고, 의례 율조가 강남 범패로 통일될 정도로 당말·오대시기에 총림 제도가 남방에서 발전하였다. 명·청대에는 율종의 발원지인 바오화산(寶華山)이 영향력 큰 전계 도량이었고, 티엔닝스(天寧寺)와 티엔통스(天童寺)의 법회가 매우 성했으며, 최초로 수륙법회를 설행한 진산스(金山寺)도 여기에 있다. 그리하여 ‘고승전’에서 언급한 ‘음악을 잘하는 승려’의 절반 이상이 강남의 승려들이었다. 

속강의 유행 이후 사찰에는 전문 예승(藝僧)에 의한 불악단이 생겨났고, 황실과 민가의 초대를 받아 불악을 연주·연창하는 응수승(應酬僧)들이 있었다. 이들은 사회혁명으로 반세기 이상 단절을 겪다 근래에 재기하고 있으나, 그간에 승려들 대부분이 타계한 이후라 온전한 명맥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혁명을 피해 이주한 승단에 의해 중국의 전통 의례와 범패도 대만으로 이주하였으나 전문 예승이 있는 사찰은 이주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만과 가까운 푸젠은 당(唐)대부터 각 종파가 들어와 불교문화가 흥성하여 ‘남불국’이라 불렸다. 대만의 여러 사찰 중 수행법도와 염불신행을 가장 보수적으로 유지하고 있는 천티엔찬스(承天禪寺)의 광친 큰스님(廣欽老和尙·1892~1986)은 청나라 광서(廣西)18년(1892)에 푸젠성 후이안현(惠安縣)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가난해 5세 때 양아들로 보내졌다가 10살 무렵 양어머니와 양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 고아가 되었다. 11세 되던 광서28년(1902), 취안저우(泉州)의 천티엔스의 루이팡(瑞芳) 대사를 은사로 출가하여 민국16년(1927) 법호 광친(廣欽)을 받았다. 

민국23년(1934) 무렵, 광친 스님이 암벽 동굴에서 수행했는데 그곳에 살던 호랑이가 자리를 내어 주고 떠나자 ‘복호화상(伏虎和尚)’으로 불렸다. 이후 원숭이들이 나무와 과일을 동굴 입구에 놓고 가곤 하였으므로 “호랑이가 수행처를 주고 원숭이가 먹이를 주었다”는 말이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1947년 광친 스님은 대만으로 이주하여 타이페이현 천티엔찬스(承天禪寺)를 건립하여 고풍의 범패와 보수적 승풍을 이어 오고 있다. 

2005년 음력 7월, 한달 간 행해지는 천티엔찬스의 집중 수행에 참여해 보니 노스님들도 빠지지 않고 새벽예불에 참석하였다. 그중 지팡이를 짚고 간신히 걸으시는 한 노스님이 있었는데, 열반 직전까지 “나모(숨쉬고) 아미(숨쉬고) 타(숨쉬고)불”을 외시던 광친 큰스님을 뵙는 듯 가슴이 찡하였다. 밤이 되어 염불과 참선을 하고 숙소로 내려오면 얼마나 가뿐한지, 폴짝 뛰면 하늘로 날아가 버릴 것만 같던 그 환희심은 광친 큰스님의 수행력이 가득한 도량의 은덕이었다. 

국민당 이주와 함께 대륙에서 여러 불자들이 몰려오던 그 무렵, 대만 서북부 지역에는 명대부터 들어와 있던 기존 승단이 있었지만 새로 들어온 총림이 주류가 되었다. 광대한 대륙에서 모여든 이들이 한데 어울려 의례를 행하는 과정에서 서로 다른 관습과 전통, 각 지역 언어들로 혼란이 일자 표준어 운동과 함께 국어 범패가 형성되었다. 그리하여 지금도 대만에는 똑같은 의례집과 범패라도 국어 범패와 대어(台語) 범패가 따로 있다. 

2007년 불광산 수륙법회 때 성운대사는 표준어로 법문을 하고, 한 승려가 민난어로 통역을 하였다. 불광산 수륙법회 초기에는 성운대사가 직접 어장(대만에서는 주법(主法)이라 함)을 맡았었다. 주법은 정표(正表)와 조표(助表)를 대동하여 모든 의례를 이끌어가며, 의례문을 노래한다. 

성운(星雲·1927~2023)대사는 장쑤성(江蘇省) 장두현(江都縣)에서 태어나 12세에 난징 시시아스(西霞寺)에서 삭발하고, 1944년 창주(常主) 티엔닝스(天寧寺)와 쟈오산불학원(蕉山佛學院)에서 수학하였다. 대만으로 이주한 초기, 그 어떤 불사보다 범패 교육을 먼저 시작하였다. 1952년 이란(宜蘭) 레이잉스(雷音寺)에서 대사를 따라 출가한 츠롱(慈容)·츠주앙(慈莊)·츠웨이(慈惠)·츠지아(慈嘉) 스님을 주축으로 이란 염불회와 청년합창단을 만들어 대사가 직접 가르쳤다. 이때 신체단숙(身體端肅)·구출청음(口出淸音)으로 의수문현(意隨文現)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10여 년이 지난 1964년, 불학원을 창설하여 정식으로 제자를 받아들였고 그때부터 불학원 학생들이 본격적으로 범패를 배우기 시작했다.

2005년 필자가 성운대사를 만났을 때 “제자들이 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고 남은 창립 멤버들이 모두 여기에 있다”고 소개하며 마치 이웃집 할아버지와도 같이 “궁금한 것 있으면 모두 물어보라” 하시는데, 표정에 미소가 가득하였다. 대륙 전통과 대만 범패의 맥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여쭈었더니 “나는 대륙에서 배운 대로 가르쳤고, 지금 불광산 범패는 그대로다”며 “이란 청년합창단이 1957년에 발간한 앨범 6장이 불광산사 박물관에 있으니 가서 들어보라”고 하셨다. 인터뷰가 끝나고 “불교음악을 연구하는 이 샤오지에(小姐)를 적극 도와주라”고 당부하셨기에 전국 가는 곳마다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불광산과 성운대사의 은혜를 말로 다 할 수 없다. 

대사께서 “범패는 불보살이 들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들으라고 하는 것”임을 설파하며 범패를 무대에서 공연하기 시작하였다. 당시만 하더라도 범패는 의식을 할 때만 하는 것이었으므로, 이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나타내는 승려들도 있었고, 필자가 대만에서 만난 학자들 중에도 그런 분이 있었다. 이러한 반발에도 굽힘 없었던 대사는 직접 가사를 지어 인간음연(人間音緣)이라는 창작불교음악대회를 열어 세계적 불교음악축제로 자리잡았다. 그 결과 오늘날 ‘중국 불교음악’이라면 대만 불광산 범패를 꼽을 정도로 그 저력이 막강하다.

윤소희 음악인류학 박사·동국대 대우교수 ysh3586@hanmail.net

[1721호 / 2024년 3월 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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