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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이색이상분(離色離相分 - 색과 상을 여읨4)

기자명 진우 스님

모든 상은 법신 여의지 못하고 법신은 또한 모든 상 여의지 못해 

각양각색 얼굴 지어도 모든 얼굴은 결국 본 얼굴서 파생된 것
모든 얼굴이 본 얼굴이고 본 얼굴이 모든 얼굴로 다르지 않아
무애자재해 걸림 없어야 하나 상에 걸림으로 결국 인과 생겨

모든 문제는 나의 고락업 가운데 있으니, 고락 분별의 인과 업을 말끔히 소멸하는 것이 문제 해결의 근원이다.[법보신문]
모든 문제는 나의 고락업 가운데 있으니, 고락 분별의 인과 업을 말끔히 소멸하는 것이 문제 해결의 근원이다.[법보신문]

하이고 여래설제상구족 즉비구족 시명제상구족(何以故 如來說諸相具足 卽非具足 是名諸相具足)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모든 모습이 완벽히 갖추어진 상’ 이란, 곧 ‘모든 모습이 완벽히 갖추어진 상’이 아니라 그 이름을 ‘모든 모습이 완벽히 갖추어진 상’이라고 합니다.”

모든 상은 색신에 딸린 것이므로, 색신이 물속의 달에 비유할진댄 이 모든 상호 또한 따라서 물속의 달이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이 단정한 얼굴을 가졌다 한다면, 때로는 웃는 얼굴, 혹은 우는 얼굴, 찡그리고 성난 얼굴 등 천의 모습을 나타낼 것이다. 그러나 한번 표정은 곧 사라지고 다시는 얻지 못할 것이고 본래의 얼굴로 다시 돌아갈 것이다. 따라서 갖가지의 표정은 본 얼굴에서 나오는 것이니, 즉 가지가지의 얼굴은 본 얼굴을 여의지 않고 본래의 얼굴은 가지가지의 얼굴을 벗어나지 않음이다. 그렇다면 본 얼굴도 얼굴이고, 갖가지의 얼굴도 얼굴일 것이다. 여기서 가지가지의 얼굴에 집착하여 만약 웃는 얼굴을 다른 사람으로 보거나, 또 본 얼굴을 다른 사람으로 보는 것은 틀린 것이다.

여래의 구족색신(具足色身)도 이와 같아서, 구족색신이 가지가지의 얼굴과 같고, 법신은 본 얼굴과 같음이다. 그러므로 모든 상은 법신을 여의지 못하고 법신은 모든 상을 여의지 못하는 고로, 제상이 곧 법신이요, 법신이 곧 제상일지다. 만약 구족제상에 집착하여 복보로 아는 것은, 가지가지의 얼굴에 집착하여 본 얼굴을 잊음과 같으니, 본 얼굴을 잊는다면 가지가지의 얼굴이 어떤 사람임을 모름과 같고, 구족제상에 집착해서는 여래의 구족제상이 어떤 것인 줄 모를 것이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본래 완벽히 구족된 성품을 가지고 있다. 어느 때 어느 곳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든, 모든 것이 완벽한 모습 구족제상이다. 그러나 좋고 싫은 고락의 분별심 때문에 이를 인식하지도 못하고 믿지 못한다는 것, 따라서 내가 부처의 성품이 되면 부처님의 구족제상은 바로 나의 모습이 된다.

한마디로 즐거움을 느끼고 좋은 것을 찾는 이상, 그만큼의 괴롭고 싫은 현상들은 언제 어느 곳이든 나타나고야 만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결론부터 말하자면, 자신의 분별심으로 만들어진 좋고 싫은 고락의 업을 모두 없앤다면, 고통과 괴로움을 주는 모든 악조건들이 끊어질 것이다. 분별로 인한 고락의 업을 멸한, 소위 마음을 깨친 역대 조사들은 이런 악조건과 인연이 닿을 일도 없겠거니와, 설사 옆에서 보기에 분명한 악조건이라 하더라도, 정작 마음을 깨친 이는, 불편한 마음이나 괴로운 고통을 전혀 느끼지 못할 것이다. 좋고 싫은 고락업의 분별심이 없기 때문이다.

좋은 것을 탐하는 마음에 의해 나쁜 과보가 나타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자업자득의 인과법이니, 모든 고락의 업을 만나는 것은, 바로 자신이 지은 인과업의 과보라는 것을 빨리 깨달아야 한다. 그러니 기도와 참선, 보시와 정진을 통하여 분별심이라는 고락의 업을 없애야 할 것인 즉, 고락의 분별 인과업이 사라지게 되면 전염병은 물론 일체의 모든 악조건의 인연을 만나지 않게 될 것이므로, 신심을 키워야 할 것이다.

실무유법(實無有法)인 아뇩보리법(阿耨菩提法)을 성취한 여래의 복보(福報)는 수행으로 얻은 깨달음에서 나온 완벽한 모습의 구족제상도 아니요, 본래의 성품인 청정법신상도 아니요, 임의로 나타난 임의자재상(任意自在相)도 아니다. 구족상(具足相), 청정상(淸淨相), 임의상(任意相)에 의지하지 않고 그대로 여여하게 나오는 그것이 여래상의 묘용이고 복보라고 하겠다.

그렇다면 이 구족상으로써 여래의 복보로 보는 이들은 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일까? 이는 가지가지의 상이더라도 본래 있지 않은 것인 줄 모르는 탓이요, 또 가지가지의 모습이 본래의 상인 줄 모르는 오류에서 나온 것이다. 즉 청정법신처에 제상구족이 어찌 해당할 것인가. 제상구족이 본래 있지 않은 비유의 허망무실인 줄을 모르는 까닭이요, 아니 제상구족이 본시 청정법신인 줄을 알지 못하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여래께서 설하신 제상구족이 곧 제상구족이 아니요 이름이 제상구족이라 할 것입니다’한 것이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마음을 깨치면 삼십이상 팔십종호의 완벽한 몸이 되는데, 이러한 구족색신을 구족색신으로 보면 그렇게 보는 즉시, 구족색신이 아닌 것이 생겨나므로, 구족색신으로 보면 구족색신이 아닌 것이 된다.

또 구족제상 즉 모든 상이 완벽한 상이 되는 것, 무엇을 봐도 완전한 모습이요, 그 어떤 것도 완벽한 것으로 본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완벽한 구족제상이라고 생각하는 즉시, 완벽하지 않은 상이 같이 생겨나므로, 구족제상이 구족제상 아닌 것이 되어 버린다. 따라서 구족색신이던 구족색신이 아니던, 구족제상이든 구족제상이 아니던, 이에 집착하지 않고 분별하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 여여하게 본다면, 이를 구족색신, 구족제상의 실무유법, 아뇩다라삼먁삼보리, 그리고 여래복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설명하고 이해를 돕는다 해도 못 알아듣는 이가 있다. 설명을 하는 이가 속이 터질 지경이다. 사람들 가운데는 이런 사람이 의외로 많다고 느낄 것이다. 아니 같은 식구 가족이라 하더라도 말귀를 못 알아듣는 경우에 처하게 되면, 서로가 감정이 극에 달하여 기어코 싸움으로 이어질 때가 많다. 설명을 하는 측이나, 설명을 듣는 측이나, 이를 알아듣고 못 알아듣고 에만 집중하게 될 것이나, 그러나 문제의 본질은 알아듣고 못 알아듣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설명을 하는 사람이 알아듣게 하던 못 알아듣게 하던, 듣는 사람 역시 알아듣던 못 알아듣던, 각자의 마음이 평안하느냐 평안치 않느냐가 문제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상대방이 내가 하는 말을 잘못 알아듣고, 화가 내거나 기분이 상하게 되는 것은 오롯이 그의 몫이다. 자신의 괴로운 고업이 생길 때가 되어서 그런 것이다. 마찬가지로 듣는 사람이 못 알아듣게 설명한다 해서 화가 나거나 기분이 나쁘게 되는 것 역시 나의 몫이다. 기분이 나쁜 고업이 생길 시절 인연의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또 한 경우는, 나는 처음부터 아무렇지 않았는데, 상대방이 내 말을 듣고 화를 내면서 기분 나빠하는 것을 보고, 오히려 내가 또 기분이 좋지 않게 되어서 화를 내게 된다면, 이 두 사람 모두가 기분 나쁜 고업이 생길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누가 옳고 그른 시시비비를 떠나서, 둘 중에 한사람이 기분이 나쁘다고 한다면 이는 그 사람의 괴로운 고업이 생겨나는 때라 할 것이고, 두 사람 모두 화가 나고 기분이 나빠지게 되었다면, 이는 기분 나쁜 고업이 각자에게 모두 나타날 때가 된 것이다. 또 두 사람 모두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던, 무슨 말을 듣던, 둘 모두 기분이 나쁘지 않고 좋다면, 이는 각자의 즐겁고 좋은 낙업이 나타날 때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든, 화가 나고 기분이 몹시 나빠지는 것은, 나의 기분 나쁘고 괴로운 고업(苦業)이 나타날 시절 인연이 되었다는 것이니, 오롯이 나의 몫, 나의 업이라 할 것이다. 옳고 그른 것은 나의 업에 의한 연기의 현상으로서 순전히 내 업이 작동하는 모습이다.

그러니 어떤 무슨 현상이 벌어지더라도, 그 현상에만 끄달려 집착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의 소치를 모르는 탓이다. 나의 고락업 가운데 모든 문제의 근원이 있고 열쇠가 있다. 그러므로 나의 고락 분별의 인과 업을 소멸하는 것만이 문제를 깨끗이 해결하는 근원이라 할 것이다.
 

비설소설분(非說所說分 - 말씀하시지만 말씀한 바가 없음) 

수보리 여물위 여래작시념 아당유소설법 막작시념(須菩提 汝勿謂 如來作是念 我當有所說法 莫作是念) “수보리야! 네가 생각하기에 여래께서 ‘법을 설한 바 있다’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생각한다면 그런 생각을 짓지 말지니라.”

대중이 설하는 이가 공하다고 하신 말씀까지도 들은 것은 분명하지만, 또 설하시는 음성과 설하시는 법에 다시 미혹한 생각을 하는 것을 여래께서 보시고, 대중에게 이 한 말씀으로써 설이 설이 아니요, 법이 법이 아니니, 어찌 내가 무슨 법이 있을 것이며, 무슨 설이 있겠는가? 하심이다. 즉 여래인 내가 종일토록 법을 말하여도 법이라는 생각이 없고, 법을 설한 장소도 없고, 설한 상이 없으니, 설하는 것을 본 자가 과연 누구인가? 또 설이 없으니, 법이 어디메에 있을 것이며, 또 음성이 없지는 않다해도, 음향의 소리가 허망하여 머무를 곳이 없으니, 소리와 사람이 스스로 공했음이고, 또 법을 제시하는 것이 없지는 않으나, 법 역시 허망하여 정법이 없으므로, 법과 사람이 모두 공했음이다.

인과 법과 설이 모두 공했으므로 여기에 무슨 설이 있을 것이며, 무슨 법을 생각하겠는가? 생각이 곧 법이 되고 말이 되니, 이러한 생각 자체를 아예 하지 말라 하심이다. 일체의 생각을 하지 않을 때, 생각 아님과 말 아님과 법 아님이 그대로 드러나서, 법이 스스로 구족하게 되고 설이 스스로 구족하게 되며, 생각이 스스로 구족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이 생각, 이 법, 이 설은 곧 너의 생각과 말로 치자면, 이름하여 무념 무법 무설이라 하심이다.

한마디로 여래의 입장에서는 일체의 좋고 싫은 고락의 분별이 없음이니 이렇다 저렇다 하는 것조차도 들어설 것이 하나도 없음이다. 그야말로 생각과 말과 행이 모두 공하여 끊어졌으므로, 더 이상의 언설이 필요치 않음이다. 그러니 무애자재하여 걸림이 하나도 없음이니, 모든 상이 완벽히 구족하다 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중의 입장에서는 분별을 끊지 못하는 고로, 법에 묶이고, 설에 묶이고, 상에 묶여서 계속적으로 자기의 관념인 좋고 싫은 고락의 분별 인과에 걸리게 되는 것이므로, 여래께서는 이를 지적하셨음이다.

기분 좋은 감정과 기분 나쁜 감정은 항상 교차한다. 상대적인 분별 감정이 인과적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말이다. 심할 때는 죽을 만큼 기쁠 때도 있고, 죽을 만큼 기분이 나쁠 때도 있다. 기분 좋은 감정을 가질 때는 즐겁고 기쁘겠지만, 기분 나쁜 감정에는 괴로워지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어느 하나만을 선택할 수가 없는 것이 또한 인과의 현상이므로, 두 감정을 모두 여의고, 일어나고 사라지는 생사생멸을 벗어나서 항상 평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마음을 살피고 정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분 좋은 것에 대한 탐심을 자제할 줄 알아야 하고, 기분 나쁜 일에 대해서는 고락의 인과 업이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을 직관하여, 인욕할 수있는 힘을 내어야 할 것이다.

진우 스님 조계종 총무원장 sansng@hanmail.net

[1721호 / 2024년 3월 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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