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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종로 원각사지-하

기자명 임석규

원각사지 고려한 탑골공원 정비안 계획돼야

‘독립운동’ 성역화 계획…시굴조사서 원각사 유물 다량 출토
교계·학계 “전면적 발굴 실시해야” 의견·민원에 추진 백지화
23년만에 ‘탑골공원 정비안’ 선포했지만 원각사 역사는 누락

탑골공원 전경. [서울역사아카이브]
탑골공원 전경. [서울역사아카이브]

원각사는 세조11년(1465) 창건 이후 예종대까지 왕이 직접 방문하거나 왕실의 제사 또는 기우제를 시행하는 등 높은 사격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성종 이후 점차 사세가 축소된다. 특히 연산군대가 되자 1503년 1월 18일에 도성 외곽에 거주하는 승려의 원각사 출입을 금지하였고, 1504년에는 연산군이 이곳을 ‘연방원(聯芳院)’이라는 이름의 기생집으로 만들어 승려들을 내보냄으로써 실질적으로 법등이 끊기게 되었다.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은 경성을 번듯한 황제의 도시로 조성하기 위해 근대적 도시개조사업을 시작한다. 이 무렵 해관 총세무사였던 영국인 존 맥리비 브라운이 원각사 10층석탑 주변 부지에 도시공원을 건립하자는 제안을 했고, 고종은 이를 받아들였다. 원각사가 연산군에 의해 폐사된 이래 근 400년 만에 근대식 공원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당시 외국인들의 기행문에 따르면 석탑 주변에는 이미 백성들의 주택이 빽빽이 들어서 있었다고 한다. 1899년 본격적인 공원 부지 조성이 시작되면서 민가들을 철거하기 시작했다. 1901년 담장과 출입문을 설치하고 1902년 정식으로 공원을 개원하였다. 

탑골공원의 초기 명칭은 원각사 10층석탑을 상징으로 해 ‘파고다공원’ 또는 ‘탑동공원’이라 불렀으나 정작 공원을 설계한 영국인 브라운에게 석탑의 건립 근거였던 원각사는 그다지 의미가 없었던 것 같다. 아직 도성 내에서 어떤 기능을 할지 정해지지 않았던 공원에서 가장 중요한 구조물은 팔각정이었다. 팔각정은 대략 1904년 이전에 준공된 것으로 여겨지는데, 당시 탑골공원 근처로 이전해 온 대한제국 군악대의 연주공간으로 사용하기 위해 건립한 것이다. 당시 공원은 일반인에게는 공개되지 않았고, 매주 목요일 오후 음악회를 개최할 때 허가된 사람들에게만 공개했다. 1904년 이후부터는 새로운 음악당이 생기면서 일반인에게도 연주회가 공개되었으며, 공원도 개방하게 된다. 이후 공원은 군악대의 음악회 뿐만 아니라 연설, 토론 등을 위한 집회장소로도 사용되었다. 

그리고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은 태화관에서, 학생대표와 민중들은 탑골공원 팔각정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동시에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3.1운동의 역사적 가치는 다 알다시피 이후 대한민국 독립의 기반이 되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팔각정은 1989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탑골공원은 독립운동의 발상지라는 역사적 공간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1991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즉, 현재 사적 탑골공원의 역사성과 장소성의 핵심가치는 팔각정이며, 사적 지정 이후 이루어진 공원의 정비는 팔각정의 경관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종로구는 지난 3월 1일 종로 탑골공원에서 제105주년 3.1절 기념식을 개최하고 3시 1분에는 탑골공원 개선사업 선포식 ‘탑골공원이 돌아온다’를 진행했다. 구는 선포식에서 ‘처음 모습 그대로, 탑골공원이 돌아옵니다’라는 부제로 사업의 시작을 알렸다. 종로구는 우선 탑골공원 서쪽 담장 일부를 허물고 1897년 개장 당시 있었던 서문을 복원한다는 계획이다. 그리고 중장기적으로 나머지 담장까지 전부 허물어 탑골공원 일대를 ‘역사공원’으로 정비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 정비에 대해 한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원각사가 있던 자리에서 추진하는 역사공원의 역사 속에 원각사가 없다는 점이다. 이 문제는 이미 2001년 탑골공원 성역화사업에서도 드러난 바 있다. 

원각사지 출토 우물.
원각사지 출토 우물.

서울시는 2001년 2월 탑골공원 성역화사업 계획을 수립하였다. 내용은 탑골공원을 3.1운동의 의미와 교훈을 되새길 수 있는 공간으로 조성함으로써 독립운동의 성지라는 공원의 위상을 바로 세운다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총 19억원의 예산을 들여 식수(植樹) 및 연못 조성, 3·1 운동과 관련된 상징광장 등을 만드는 성역화 작업을 8월 15일까지 끝마친다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이곳은 이미 사적으로 지정된 유적지였기 때문에 공사 전 발굴조사를 해야만 했다. 본격적인 발굴조사전 시굴조사를 실시한 서울특별시립박물관이 발표한 설명회 자료에 따르면 동문 쪽 지하 170∼200cm 사이에서 구 원각사 건물지가 존재하는 것이 확인됐으며, 산스크리트어 문양(紋樣) 수막새와 법당에 사용했을 것으로 보이는 청기와편도 발견됐다. 특히 건물지로 추정할 수 있는 석렬과 기둥의 받침대로 사용된 대형 초석(밑변 105cm, 높이 50cm, 너비 75cm)도 발견돼 이곳 건물지가 회랑지(回廊址)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하였다. 또 현 대원각사비(보물) 뒤편에서는 원각사 창건 당시에 사용됐을 것으로 보이는 우물이 새롭게 발견되었다. 

40여 일 정도되는 단기간 시굴조사였음에도 중요한 유구와 유물들이 다량 출토되었다. 조사 구역도 원각사지 영역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지만 원각사 가람배치를 규명하는데 하나의 실마리가 될 수 있는 중요한 성과였다. 따라서 당연히 발굴 범위를 확장해 전면 조사를 실시하고 탑골공원 부지 지하에 켜켜이 묻혀 있을 조계종의 본사였던 흥복사와 조선 초기 원각사의 가람배치를 밝혀야 한다는게 불교계와 학계의 의견이었다. 왜냐하면 일단 성역화를 끝내면 다시 발굴 조사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역화 사업을 미루더라도 전면적인 발굴을 반드시 실시해야 한다는게 조계종을 포함한 각계의 의견이기도 했다. 이에 결국 서울시는 2001년 7월 성역화사업 추진 상 여러 민원이 제기됨을 이유로 공원 유료화를 포함한 성역화사업 전체를 백지화하였다. 

서울시와 종로구는 2001년 탑골공원 성역화사업 백지화 이후 23년만에 다시 탑골공원 개선사업이라는 정비안을 ‘선포’했다. 유적정비 사업의 기본원칙은 복원하고자 하는 연대를 정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문화재의 원형을 연구하고 보존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탑골공원 정비안은 시간과 내용면에서 근대 이후 역사적 가치만을 강조한 정비안이었다. 원각사지를 고려하지 않은 탑골공원 정비안은 납득하기 어렵다. 탑골공원에는 현재 팔각정을 중심으로 원각사지 십층석탑과 대원각사비가 상하에 배치되어 있어 전체적으로 3.1운동을 상징하는 영역과 원각사지 영역이 혼합된 상태이다. 즉 원각사는 지하 뿐 아니라 지상에도 이미 뚜렷한 영역을 구축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영한 정비안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다시 만날 탑골공원에서는 ‘대한독립만세’ 함성소리와 함께 세조가 백성들을 위해 한글로 번역한 원각경 독경소리도 들을 수 있다면 좋겠다. 

임석규 불교문화재연구소 수석연구관 noalin@daum.net

[1722호 / 2024년 3월 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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