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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금강반야바라밀경오가해서설[br](金剛般若波羅密經五家解序說)

기자명 법보신문

道를 道라 하면 道가 아니다


<사진설명>덕민 스님의 금강경오가해 강의 모습

보려해도 보이지 않는 것이 夷요
들으려 해도 들을 수 없는 것이 希요
더듬어도 잡회지 않는 것이 微라

無는 천지의 시초를 이름 함이며
有는 만물의 어머니를 칭하는 것
삼라만상 차별 모습서 道 찾아야


이것은 일물서(一物序)라고도 하는데 금강경오가해에 대한 함허스님의 서문입니다. 나옹선사-무학대사의 뒤를 이은 함허스님은 선에도 경에도 통달했고 유학에도 조예가 깊어 세종대왕으로부터 각별한 예우를 받았습니다. 세종대왕이 소헌왕후를 잃고 깊은 시름에 잠겼을 때 함허스님은 창제된 한글로 석가세존의 일대기를 번역하도록 권유했습니다.

수양대군은 세종대왕의 명을 받들어 석가세존의 일대기를 번역했는데 그것이 바로 석보상절입니다. 세종대왕은 한글로 편집된 석보상절을 읽으며 소헌왕후를 잃은 슬픔에서도 초연해질 수 있었고 세존의 일생과 가르침에 대해서도 감격했습니다. 그래서 그 감격을 ‘월인천강지곡’이라는 서사시로 남겼습니다. 세종대왕의 큰 스승이었던 함허스님의 비는 봉암사에 세워져 있습니다.

일물서는 금강경오가해 전체가 잘 압축되어 있어서 두루 찬탄되는 뛰어난 글입니다. 문장이 아름답고 간결하고 짧지만 그 속에 내포된 의미는 깊고 광활합니다.

有一物於此
一物何物 � 祇這一著子 希夷焉 絶情謂 焉 看似有 響然 難可追 恍惚然 難可測 非迷非悟 不可以凡聖 稱 無我無人 不可以自他 名 故 但云一物 六祖云 有一物 無頭無尾 無名無字 上柱天下柱地 明如日黑似 常在動用中 動用中 收不得者 是 然雖如是 一物之言 亦强稱之而已 故 南嶽讓和尙 道 ‘說似一物 卽不中’ 有一物於此者 不離當處常湛然故 云爾

여기에 한 물건이 있으니
‘한 물건’은 어떤 물건인가? “�” 이 ‘하나’란 것은 소리도 없고(希) 빛깔도 없어서(夷) 뜻으로도(情) 말(謂)로도 표현할 길이 끊어졌으며, 알쏭달쏭해서 보면 있는 듯하다가 메아리처럼 홀연히 사라져서 뒤쫓을 수 없고 황홀하여 헤아릴 수도 없으니, 미혹이라 할 수도 없고 깨달음이라 할 수도 없어 범부다 성인이다 구별할 수 없으며, 나(我)와 남(人)이 없어 나의 것이다(自) 남의 것이다(他)도 일컬을 수 없어서 다만 ‘한 물건(一物)’이라 말했을 뿐이다. 육조스님은 ‘한 물건이 있는데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으며, 이름도 문자도 붙일 수 없으며, 위로는 하늘을 받쳐주고 아래로는 땅을 버텨주면서 밝기는 해보다 더 밝고 어둡기는 칠흑보다 더 검은데, 항상 움직이고 쓰는 가운데 존재하지만 움직이고 쓰면서 거두어 가질 수 없는 것이 이것(一物)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한 물건’이란 말도 역시 억지로 칭했을 뿐이다. 그래서 남악회양화상은 ‘설사 한 물건이라 하더라도 맞지 않다’ 라고 하셨으니, ‘한 물건이 여기 있다’ 함은 바로 당처(삼라만상이 벌어지기 이전, 텅 비어있는 실상)를 떠나있지 않으면서 항상 깨끗하고 맑은 까닭으로 그렇게 지칭한 것이다.
〈보충설명〉 금강경이 중국에 유입되기 전, 중국은 이미 노장사상이 무르익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금강경은 바로 그 노장사상이 뿌리가 되어 활짝 꽃피울 수가 있었습니다. 함허스님이 인용한 希와 夷, 絶情謂, 焉, 看似有, 響然, 難可追, 恍惚然, 難可測 등의 출처는 노자의 도덕경입니다. 이제 希夷 등에 관해 좀 더 상세한 개념을 살피기 위해 도덕경을 소개합니다.

視之不見名曰夷 聽之不聞名曰希 搏之不得名曰微
此三者不可致詰 故混而爲一
보려 해도 보이지 않는 것이 이름 하여 이(夷)요, 들으려 해도 들을 수 없는 것이 이름 하여 희(希)요, 더듬어도 잡히지 않는 것이 이름 하여 미(微)라. (평평하여 어디든지 꽉 차고 툭 틔어있어 보고 또 보아도 아득하여 보이지 않음이 夷, 희유함이 希)
이 세 가지는 왈가왈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뭉쳐서 ‘하나(一物)’로 만들었다.
其上不其下不昧 繩繩兮不可名 復歸乎無物
그 위로는 더 이상 밝은 것이 없고 그 아래로는 더 이상 어두운 것이 없는데, 끄나풀처럼 엮이고 꿰여 있어 (시간과 공간의 어우러짐) 이름을 붙일 수가 없으니, 다시 ‘아무 것도 없는 것(無物)’으로 돌아가도다.
是謂無狀之狀 無象之象 是謂惚恍
형용하려 해도 형용할 수 없는 모습이고, 조짐 없는 가운데의 조짐이어서, 황홀이라 말할 뿐이로다.
迎之不見其首 隨之不見其後 執古之道以御今之有 能知古始是謂道紀
우리가 마중하지만 그 머리를 볼 수 없고, 뒤를 따르지만 그 뒷모습을 볼 수 없으나
古來의 道로 현재의 삶을 다스려 나가며 능히 ‘옛’과 ‘처음’을 잘 아는 것이 ‘도’를 실천하는 실마리로다.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道를 도라 하면 항상된 도가 아니고, 이름을 이름이라 하면 항상된 이름이 아니도다.(名相이 끊어져 텅 빈, 道의 體에 관한 설명)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無는 천지의 시초를 이름 함이며 有는 만물의 어머니를 이름 함이로다.(體에서 무와 유로 벌어지는 道의 用에 관한 설명)
故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
그러므로 언제나 無에서 그 玄妙함을 관찰하려 해야하고, 有(삼라만상 차별의 모습)에서 道의 그림자를 관찰코자 해야 하노라. (道에 이르는 方便에 관한 설명) -老子 道德經에서-

지금까지 도덕경에서 인용된 ‘一物序의’ ‘希’와 ‘夷’에 대해 보충설명 했습니다. 지금부터는 지난 강의에 이어 ‘一物序’의 ‘上柱天下柱地의’ 개념을 좀더 명료하게 이해하도록, 원효스님의 沒柯斧 노래를(출처는 삼국유사) 소개하겠습니다. 원효스님께서는 그 당시 귀족적 색채가 농후한 불교의 대중화를 위해 저자거리에서 무애가(無碍歌) 등 많은 노래를 부르곤 하셨습니다.

1) 誰許沒柯斧 我斫天柱
누가 나에게 자루 없는 도끼를 주겠는가?
내가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만들리라.
- 원효 -

〈보충설명〉 많은 사람들이 원효스님의 ‘沒柯斧’를 詩經의 「伐柯」에서 그 뜻을 미루어 여자의 의미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원효가 짝을 구해 설총을 낳으려고 이 노래를 불렀다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傳法을 위해 노력하신 원효스님의 일화들을 근거로 추론하면 자루 없는 도끼가 결코 여자일 까닭이 없습니다. 많은 일화 중 한 가지를 소개해볼까요?
어느 날 원효스님은 분황사 도량의 낙엽을 쓸고 있는 설총에게 “총아! 넌 이 세상에서 착한 일이라고는 하지 마라.”하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설총이 의아하게 묻습니다. “스님! 그럼 악한 일을 해야합니까?” 설총의 이 말을 듣고 원효스님은 다시 호령하셨습니다. “이놈아! 착한 일도 하지 말라는데 악한 일을 해서야 되겠느냐?” 이 때 설총은 원효스님의 큰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일화 속의 원효스님을 보건대 ‘沒柯斧’는 눈에 보이는 세간의 도끼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고, 모든 것을 초월한 금강왕보검(金剛王寶劍)입니다. ‘누가 세상의 잣대로 잴 수 없는 금강왕보검을 빌려 주겠는가? 그러면 내가 하늘을 버티고 땅을 버티는 그런 불국토를 건설하겠다.’ 라는 뜻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원효스님의 위대한 발자취는 우리나라에서 보다 오히려 중국이나 일본에서 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원효스님의 큰 뜻을 잘 헤아리지 못하고 沒枷斧를 여자로 해석하듯 원효스님의 본래 뜻을 왜곡하는 경우가 또 있습니다. 발심수행장의 行者羅網狗被象皮 道人戀懷蝟入鼠宮이라는 句에서 前句의 해석을 대부분 ‘수행자가 비단 옷을 입으면 개가 코끼리 가죽을 걸침과 같다’고 해석하지만 ‘비단羅’字를 ‘걸릴罹’字로 해석해야 옳습니다. 그래야 고승 원효의 본래의 큰 뜻이 살아나게 됩니다. 즉, 行者罹網狗被象皮 道人戀懷蝟入鼠宮(수행자가 법망에 걸리면 개가 코끼리 가죽을 입는 것과 같고 도인이 세속적 생각에 연연하면 고슴도치가 쥐구멍에 들어감과 같다)이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면, 원효스님의 沒柯斧를 여자라고 풀이하게 만든 배경이 된 詩經의 「伐柯」를 살펴볼까요? 「伐柯」는 道가 일상생활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내용입니다.

2) 伐柯
伐柯如何 匪斧不克 取妻如何 匪媒不得.
도끼자루 만들려면 어찌하지? 도끼가 없으면 아니 되지
장가를 가려면 어찌하지? 중매장이 없으면 아니 되지
伐柯伐柯 其則不遠 我之子 豆有踐
도끼자루 만들려고 도끼로 베노니 그 법칙이 멀지 않듯
내가 그 사람을 만나려면 변두의 실천이 필요하네.
- 詩經에서 -

<보충설명> 알맞은 치수의 도끼자루를 베어내려면 바로 나무를 베려고 손에 쥔 도끼자루의 칫수를 재면 됩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을 만나고 어른을 모시는 일도 가깝게 있는 기본적 예절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예절은 우리생활과 가까워 실천이 어렵지 않습니다. 이 「伐柯」노래에는 일상생활에서 해결해야할 문제의 해답이 멀리 있지 않다는 것과, 문제 해결에 접근하려면 가까이 있는 기본을 갖추어야 한다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柯: 도끼자루. 도끼자루의 칫수 단위. *克: 能의 의미. *: 만난다는 뜻. *豆: 제기. 예를 다 갖춘다는 뜻.

絶名相
蕭焉空寂 湛爾沖虛 無名可名 無相可睹故也
이름이나 모습으로 표현할 수 없지만
쌀쌀함이 감돌 듯 텅 비고 고요하며, 맑고 깨끗함이 가득찬 듯 덩그마니 비어서, 어떤 이름으로 가히 이름 지어 부를 수가 없고, 어떤 모습이라고 가히 볼 수 없는 까닭이다.

貫古今
歷千劫而不古 亘萬歲而長今 多經海岳相遷 幾見風雲變態
옛날과 지금을 꿰었고
천만겁을 지냈어도 고풍스럽지 않고 만세에 뻗치겠지만 ‘지금’으로서 장구할 것이다. 산과 바다의 상호변천을 얼마나 지냈으며 바람과 구름의 변하는 모습을 얼마나 보았는가?

處一塵 圍六合
凡有事物 小不能大大不能小 此則反是 能小而細入虛能大而廣包法界
한 티끌에 처해도 동서남북상하를 에워싸고 있다.
무릇 갖가지 사물이 적은 것은 능히 큰 것이 될 수 없고, 큰 것은 능히 작은 것이 될 수 없으나, 이 한 물건은 이와 반대로 능히 작아져 가늘게는 인허에 들어갈 수 있고, 능히 커져서 넓게는 법계를 두루 포함할 수 있다.

內含衆妙
體量 恢恢 恒沙性德 無量妙用 元自具足
안으로는 온갖 미묘함을 포함하고 있으며
몸통과 도량이 크고도 넓어서 항하사와 같은 성덕과 한량없는 묘용을 원래 스스로 갖추고 있다.

外應群機
物來卽應 感而遂通 如明鏡 當臺 胡來胡現 漢來漢現 洪鍾 在虞 大大鳴 小小鳴
밖으로는 뭇 사물을 응접하며
사물이 다가오면 곧 응해 느낌으로 서로 통함이, 마치 밝은 거울이 경대에 올려질 때 검은 것이 오면 검게 비추고 붉은 것이 오면 붉게 비춤과 같고, 큰 종이 종틀에 걸려 있을 때 크게 치면 크게 울리고 작게 치면 작게 울리는 것과 같다.

主於三才 王於萬法
天以之覆 地以之載 人以之處乎其中 以至日月星辰 草木昆 凡有貌像形色者 莫不以之爲宗 而得成立
천·지·인의 주인노릇을 하고 만법의 왕노릇 함이니
하늘도 이 것으로써 만물을 덮어주고, 땅도 이 것으로써 만물을 실어주며, 사람은 이것으로써 그 중간에 존재하고, 나아가 해, 달, 별, 초목, 곤충 등 무릇 모양 있고 색깔 있는 모든 것들이 이 한 물건을 종지 삼아 성립되지 않은 것이 없다.

蕩蕩乎其無比 巍巍乎其無倫
蕩蕩云云 廣大勝第一者 是 巍巍云云 最尊極無上者 是 此所以爲王爲主之勢也
탕탕함이여! 무엇과도 비길 수 없으며, 외외함이여! 무엇과도 짝할 수 없다.
탕탕이라고 말함은 넓고 크고 수승하기가 으뜸이라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며, 외외라고 말함은 높고 지극하여 위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것이 왕도 되고 주인도 되는 형세이다.

*蕭: 낙엽지고 바람부는 가을날처럼 쌀쌀함이 감도는 것. (번뇌의 멸진상태) *湛: 미세한 모래알까지 들여다 보일만큼 물이 맑고 깨끗함. (망념의 정화 상태) *貫古今: 옛과 지금을 꿰었다는 뜻. 시간과 공간에 자유자재하다는 뜻. *六合: 동서남북과 상하의 육방위 *虛: 창틈에 햇빛이 비칠 때 눈에 보이는 미세한 먼지의 칠분의 일 크기 *主於三才: 主는 主人노릇 한다는 동사. 三才는 천·지·인. *巍巍: 인간이 범접할 수 없이 높은 것. 짝할 것 없는 위대함의 표현.

(참고) ‘一物序’에서의 ‘貫古今’은, 曾子에게 ‘吾道는 一以貫之라’ 고 말한 공자의 가르침에서도 엿볼 수 있다. ‘一以貫之’는 ‘하나’를 강조하려고 ‘一以’를 도치시켜서, 無實無虛의 속성인 道가 하나(一物)로써 삼라만상을 꿰었음을 말한 것이다. 증자는 공자의 가르침을 그 즉시 이해했으나 이해가 더딘 문중에게는 쉽게 풀어서 공자의 가르침을 ‘忠恕’라고 전했다. 여기서의 ‘忠’은 渾然一理의 天道를, ‘恕’는 泛應曲堂의 人道를 의미한다. 즉, ‘忠’은 원만한 하나의 진리로서 法의 體를, ‘恕’는 能所가 갈라지지 않는 六波羅蜜의 실천(用)을 의미한다.
*子曰參乎吾道一以貫之. 曾子曰唯. 子出門人問曰何謂也. 曾子曰夫子之之道忠恕而已矣

3) 敬義
請看千碩鐘 非大無聲 爭似頭流山 天鳴猶不鳴
청컨대 보십시오. 千碩의 鍾을!
크게 치지 않으면 울리지 않습니다.
아니---, 어찌 지리산과 비교하겠습니까?
하늘이 뇌성벽력을 쳐도 결코 울리지 않는 것을.
- 南溟, 曺植 -
〈보충설명〉 世間의 名利를 떠나 지리산에서 隱居中인 남명선생이, 스승으로 모시고자 한 선조의 부름을 받았을 때, 그 부름을 물리치기 위해 이 詩를 지었습니다. 큰 종은 크게 치지 않으면 여간해서 울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큰 종이라도 종이란 치면 결국 울리기 마련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위대한 인물이라도 명리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면 비록 세간을 떠나 살아도 부귀영화의 유혹이 크게 찾아 올 때는 그 것을 따라 세간에 다시 나아가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와 달리 지리산은 하늘에서 아무리 무서운 뇌성벽력을 치더라도 결코 동요하지 않습니다. 絶名相 貫古今의 지리산이 能所가 끊어졌는데 어찌 동요가 있겠습니까? 남명은 자신을 부귀영화에 동요하지 않는 지리산에 비유했지만 不動의 ‘한 물건’이 어찌 남명에게만 있겠습니까?

*敬義: 敬以直內義以方外(‘공경으로써 內心을 바르게 하고 의리로써 外界를 가린다.’는 周易의 大義. 敬은 일체중생을 향한 공경심을 의미하고 義는 긍정적 사랑으로 善을 증장시키고 惡을 단절시키는 현실적 실천을 의미함. 부처님의 탁발도 중생을 향한 공경심의 표현.)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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