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⑪ 라즈기르 Ⅰ

기자명 법보신문

최초사원 죽림정사 터엔 대나무 그득

사리자와 목건련이
붓다와 조우한 땅에 서니
긴 대숲바람 순례자를 반기누나


<사진설명>1만여 학인 스님들이 기숙하며 공부했던 세계 최대·최고의 대학 나란다 전경.

마가다(Magadha) 왕국의 수도 라즈기르(Rajgir)는 붓다의 일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곳이다. 우리에게는 왕사성(王舍城)으로 더 잘 알려진 라즈기르는 가는 곳마다 붓다의 흔적이 가득한 불교 8대 성지 중의 하나이다. 그 유명한 최초의 불교사원 죽림정사(竹林精舍)가 위치해 있고, 붓다와 깊은 인연을 맺고 외호자가 되었던 빔비사라 왕, 그의 아들 아자타샤트루, 붓다의 수제자로 승단에 큰 영향을 미친 사리푸트라(사리불)와 목갈랴야나(목건련), 붓다 입멸 후 교단을 이끈 상수제자 마하 카사파 등이 이곳에서 붓다와 인연을 맺었다.

『묘법연화경』 설법 터로 널리 알려진 영축산과, 붓다의 주치의였던 지이비카가 머물렀던 망고동산, 제1결집이 이루어졌던 칠엽굴 등 불교사적으로 중요한 유적들 라즈기르 도처에 자리하고 있다.

바이샬리의 제2결집 추정 터를 끝으로 바이샬리 일정을 마친 순례 일행은 다시 강가를 건너 라즈기르로 향하고 있다. 라즈기르로 가는 도중 틈을 내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세계 최대, 최고의 대학인 나란다(Nalanda) 방문 일정이 잡혀 있다.


<사진설명>말끔하게 정비된 나란다 대학 입구.

바이샬리에서 나란다 대학까지는 버스로 약 3시간 남짓 달려야 하는 만만치 않은 거리. 정오경에 도착한 나란다는 옛 학구열을 상징이나 하는 듯 작열하는 햇볕 속에 이글거리고 있다. 벽돌로 쌓아올린 학교건물, 사원 터, 승방 터 등이 옛날의 웅장했던 규모를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하게 한다. 지금까지 개발된 것은 전체의 10% 정도에 불과하다고 하니 본래의 규모는 쉽게 상상이 되지 않는다.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2세기경 아쇼카 대왕은 이곳을 찾아와 사리푸트라 부도에 예배를 한 후 사원을 건립했다. A.D 2세기에는 소승과 대승의 쇠퇴를 막기 위해 108개의 사원이 세워졌으나 1199년 이슬람의 침공으로 나란다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어찌나 잔혹하게 파괴되었는지 1860년 컨닝험에 의해 발굴되면서야 비로소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벽돌로 만들어진 사원 벽들 사이를 헤치고 다니며 느껴보는 나란다 대학은 마치 거대한 수용소의 미로를 헤매는 것과 흡사하다. 이곳에서 학인 1만여 명이 기숙하면서 공부했다고 하니 그 스케일이 놀라울 뿐이다. 인도는 물론이요, 멀리 중국, 한국 등에서 찾아온 고승까지 이곳에서 불교를 공부하고 열띤 토론을 벌였을 광경이 눈앞에 삼삼하게 떠오른다.

이슬람 세력이 침공하여 이곳을 폐허로 만들어버린 것은 이곳을 철저히 파괴하지 않고서는 불교의 위세를 꺾고 이슬람으로 하여금 인도를 지배하게 하는 것이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을 했기 때문일 듯하다. 흔적 없이 파괴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렇듯 거대한 사원과 승방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은 그만큼 이곳이 어마어마한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하고, 아울러 설사 정법이라고 해도 그것을 지키는 후학들이 실력과 힘을 갖고 있지 않으면 이렇게 무참히 멸실될 수 있다는 교훈을 남기려는 불보살의 웅변일지도 모른다.

나란다 마을은 붓다와 그의 상수제자였던 사리푸트라와의 풋풋한 사제의 정이 어린 곳이기도 하다. 80세 고령이 되어 열반을 위해 라즈기르에서 북쪽, 그러니까 고향 카필라바스투를 향해 마지막 유행 길에 나선 붓다가 이곳을 들렀을 때, 사리푸트라는 자신이 병약하여 스승의 마지막 길을 함께 하지 못하고 먼저 세상을 하직하게 된 것을 불경스럽게 여기고 용서를 구하려 붓다의 처소를 찾았던 것이다.

붓다와 사리푸트라는 사제지간이긴 했지만 평생에 걸쳐 두터운 우정과 신뢰를 나눠온, 벗과 같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붓다가 이끄는 교단이 현재처럼 규모를 갖추고 영원히 이어질 수 있는 토대를 갖춘 것에 사리푸트라와 그의 친구 목갈랴야나의 역할이 결정적인 것이었기에 붓다는 언제나 이들에게 감사와 경애의 감정을 품고 있었다. 붓다 앞에 이르러 정중히 무릎을 꿇은 사리푸트라가 말했다.

“스승이시여, 이 몸은 이제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젊은 시절 저는 오직 한 가지 소원, 즉 훌륭한 스승을 만나 그 발에 엎드리고 싶다는 소망을 안고 수행자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헌데 과분하게도 붓다를 뵙게 되었고, 그 소원이 이루어졌기에 지금 이 순간 아무런 여한이 없습니다. 스승이시여, 스승님을 친견하는 자리는 이것이 마지막일 것입니다. 먼저 떠남을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붓다는 사리푸트라의 두 손을 잡고는 그동안 그가 보여준 헌신과 우의에 누누이 경의를 표했다. 붓다는 직접 사리푸트라를 처소 입구까지 배웅하며 그와의 마지막 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대와 처음 만나던 날, 나는 무척 행복했습니다. 지금도 그 마음엔 아무 변화가 없습니다. 그대와의 날들을 오래오래 보람과 기쁨으로 간직할 것입니다.”

붓다는 몇몇 제자들에게 일러 사리푸트라를 따라가 그의 임종을 지키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사리푸트라는 여러 도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입적했다. 제자들은 그의 유골을 붓다에게 전했다.

사리푸트라의 사리탑으로 추정되는 스투파는 지금도 나란다 대학 사원 터에 남아 있다. 이곳에 세계 최대의 대학을 세운 것은 지혜를 상징하는 사리푸트라와 어떤 연관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경전을 통해서나 아니면 법문에서 듣던 지명과 유적들을 직접 찾아가서 예배하고 돌아보는 느낌은 언설로 표현키 어려운 감동을 주기 마련이다. 붓다의 성지 순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나는 이런 감동을 만끽하고 있다. 붓다의 성지를 돌아볼 때 비로소 붓다를 제대로 이해할 것이라는 점을 실감하고 있는 것이다.


<사진설명>나란다 승원 터의 사리푸트라 사리탑.


나란다 대학을 둘러본 후 우리 일행은 다시 라즈기르로 향하고 있다. 이제 얼마 가지 않으면 귀에 익숙하도록 들어왔던 라즈기르에 도착하게 된다. 그런데, 사실 우리나라에 출간된 여러 종류의 붓다 일대기들은 그 내용이 다 일치하지 않는다. 저마다 붓다의 삶을 추적하여 전기와 기행서를 펴내고 있지만 특히 바이샬리와 라즈기르, 그리고 우루벨라 사이를 오가는 붓다의 행적에 대해서는 엇갈리거나 상이한 부분이 없지 않은 것이다.

어떤 전기에 따르면 붓다가 바이샬리가 아니라 라즈기르에서 웃다카 선인을 만났다는 기록도 있고, 바이샬리에서 아라라 선인과 웃다카 선인을 만난 후 라즈기르가 아니라 우루벨라 고행촌으로 갔다는 기록도 있다. 또 어떤 이는 붓다가 웃다카 선인을 찾았을 땐 이미 웃다카가 세상을 떠난 후였으므로, 붓다가 가르침을 배운 선인은 웃다카의 아들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기도 하다. 아마도 이런 연유는 라즈기르와 우루벨라가 인접한 곳에 있고, 붓다가 생전 시 바이샬리와 라즈기르를 자주 오갔던 데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아무려나, 2600여 년 전, 기록이 없던 시대의 일이 명명백백하게 남아 있기를 기대하는 것은 욕심일 것이다.

이런 이유로 앞으로의 붓다 기행은 우리가 그동안 알고 있었던 붓다의 일대기와는 조금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예컨대, 붓다가 고행촌에서 6년 고행을 마친 후 기력을 되찾은 것은 한국 불자들이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수자타 처녀의 유미죽 공양의 덕이 아니라 근처에 살던 목동과 그 가족에 의해서였다는 점 등이다.

우루벨라 고행촌에서 6년 고행을 마친 붓다는 단순한 명상이나 극단적 고행으로는 결코 자신이 풀고자 했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알았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어디로 가서 무엇으로 이 의문을 해결한단 말인가. 붓다는 깊은 고민에 빠져들었다. 이윽고 붓다는 마가다국의 라즈기르로 갈 것을 결심했다. 신흥강국이었던 마가다국의 수도 라즈기르는 각종 사상가와 수행자들이 자유롭게 자신들의 철학과 수행을 펼쳐 보일 수 있는 수행자들에겐 더없이 좋은 조건을 갖춘 곳이기 때문이었다. 마가다국 왕 빔비사라가 수행자들을 보호하고 배려를 아끼지 않는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 있는 것도 라즈기르 행을 선택한 원인이 되었다.

라즈기르에 도착한 붓다는 교외에 있는 산의 작은 동굴을 거처로 삼아 홀로 수행에 들어갔다. 누구도 그의 스승이 될 수 없음을 알았으므로, 이제 일대사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는 것이었다.

수행자들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빔비사라 왕에게 붓다가 눈에 띤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어느 날 빔비사라 왕은 당시 사문들의 관례에 따라 라즈기르의 거리에 나타나 탁발을 하던 붓다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 모습이 하도 고귀하고 아름다워 빔비사라 왕은 넋을 놓고 있었다. 왕이 신하에게 말했다.

“모두들 저 사람을 똑똑히 바라보거라. 의젓하지 않은가. 저 용모와 행동거지로 볼 때 아마 천한 출신은 아닌 것이 확실하다. 저 사람 있는 곳을 알아오너라.”

명령을 받은 신하는 붓다의 뒤를 밟아 그가 라즈기르를 에워싼 다섯 산 중의 하나인 판다바 산의 동굴에서 수행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그가 궁으로 돌아와 왕에게 고했다.

“대왕이시여, 그 사문은 판다바의 전면에 있는 암굴 속에 호랑이처럼 사자처럼 앉아 있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빔비사라 왕은 직접 동굴로 찾아가 붓다와 마주 앉았다. 그리고는 함께 마가다국을 다스리자고 제안했다.

“그대는 아직 젊어서 인생의 봄이 충만한 청년이다. 피어나는 청춘의 용모를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유서 깊은 무사계급의 출신임에 틀림이 없다. 바라는 대로 녹을 주겠으니 나의 정예 군대에 참가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왕이시여, 저 히말라야 기슭에 예부터 코살라에 속하는 재물과 용기를 겸비한 단정한 한 부족이 있습니다. 그 부족은 태양의 후예라고 불리며 나의 씨족은 샤카라고 불립니다. 나는 그 가문에서 출가한 것으로 온갖 욕망을 채우기 위함이 아닙니다.”

왕은 다시 자기의 국토 일부를 떼어줄테니 라즈기르에 머물기를 요청했으나 붓다는 완곡히 거절할 뿐이었다.


<사진설명>불교 최초사찰 죽림정사 터. 대나무 숲이 인상적이다.

urubella@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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