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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정일 선사 행장

기자명 법보신문
  • 교계
  • 입력 2004.09.07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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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정일 선사 행장
南山 正日 禪師 行狀


남산 정일 큰스님은 1932년 서울에서 태어나셨다. 부친은 고정록 씨, 모친은 정간난 씨이다.

여덟 살 되시던 해, 도살장에서 죽을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소의 눈망울을 보고 생사를 초월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시게 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형편이 어렵던 집안일을 돌보며 지내시다가 어느 날 고서점에서 선서(禪書) 선가귀감을 발견하셨다. 스님께서 수십 년 동안 후학들에게 수행의 거울삼아 읽을 것을 강조하셨던 선가귀감을 당시의 스님은 뜻도 모르면서 수십 번을 되풀이해 읽으셨다.

그런 인연으로 조계사로 출가하여 1958년 금오 선사를 계사로 하여 사미계를 수계하셨다. 법명은 정일(正日)이시고 당호는 남산(南山)이시다.

스님께서는 은사 스님이 주지로 계시던 구례 화엄사로 거처를 옮기셨는데, 사중에서 쓸 양곡을 마련하기 위해 진주까지 걸어서 탁발 행각을 떠나셨다. 이 때에도 화두일념을 하시다가 동네 골목길을 잘못 들어가신 적이 무수히 많았다.

이후 스님께서는 망월사에서 천일기도를 시작하셨다. 당시 스님은 염불 기도시간이 끝나면 곧바로 참선을 시작하여 화두에 매진하셨다.

기도를 시작한 후 오백일까지는 졸음을 쫓기 위해 매일 새벽 두 시에 일어나 냉수욕(冷水浴)을 하셨다. 그렇게 오백일이 지나자 냉기가 뼛속 깊이 사무쳐 들어와 소화가 안 되는 등 냉병이 생겨났다. 그래서 여름에도 따뜻한 화로에 기와를 구워서 배에 한참 동안 대고 있어야만 소화가 될 정도였다. 그 후 지나친 고행을 하거나 몸을 혹사시키는 것은 오히려 수행에 장애가 된다는 것을 느끼시고 나머지 오백일 동안은 냉수욕을 삼가셨다.

천일기도를 회향하신 후 동산스님이 조실로 계시던 범어사에서 본격적인 참선 수행을 시작하셨다. 동안거 결제 기간 중 어느 날 화두와 별개로 새벽종송에 나오는 장엄염불 중 ‘육문상방자금광(六門常放紫金光)’이라는 대목의 뜻과 화엄경 약찬게에 나오는 ‘육육육사급여삼(六六六四及與三)’의 뜻이 확연히 드러났다. 이 때부터 화두가 풀려서 의심도 없어지고 들리지 않기 시작했다.

스님께서는 경계가 바뀐 것으로 이해하시고 그것이 올바른 견처(見處)인지 점검받기 위해 해제 후 전강 선사를 찾아갔다. 스님께서 경계를 이르시니 전강 스님은 일원상(一圓相)을 그리시고는 ‘입야타 불야타(入也打 不也打)’ 공안을 물으셨다. 스님께서 걸망을 지고 원 안으로 들어가시는 시늉을 하자 전강 선사께서는 주장자로 어깨를 한 번 치셨다. 이에 스님께서 ‘무엇을 치셨습니까?’라고 하시니 전강 선사께서 재차 주장자를 치셨다. 스님께서 ‘수고하셨습니다’라고 답하니 전강 선사께서 다시 치셨다.

이렇게 여러 번 오고간 후 전강 선사께서는 방법을 바꾸시어 ‘의리(義理)로 일러보소’라고 하셨다. 스님께서 ‘의리’라는 단어의 뜻을 몰라 꽉 막혀 잠자코 있었더니 다시 공부를 지으라고 하셨다.

전강 선사의 질문으로 인하여 그 동안 들리지 않았던 화두가 다시 들리기 시작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바른 선지식의 점검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사무치게 깨달으셨다. 이후 스님께서는 전강 선사 곁을 떠나지 않기로 결심을 하시고 범어사에서 3년, 인천 용화사에서 3년, 수원 용주사에서 3년 등 전강 선사 문하에서만 약 10년 간 참선 수행 정진하셨다.

그 후 화엄사 구층암에서 수행정진하시고, 해인사 선원장을 거쳐 통도사 극락암 등에서 안거를 성만하셨다. 공부 도중 홀연히 마음의 눈이 열려 현실경계 그대로가 실상이고 열반인 도리에 계합(契合)하시고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으셨다.

극빈자는 이슬 맺힌 갈대숲이 좋다
홀연 한 가닥 시광이 온 대지를 투과하니
만년 전사 부처님 열반이 드러났네


極貧者喜歡帶露的蘆葦叢
渾然間一縷始光透過整個大地
萬年前事佛已涅槃

안개비가 내리는구나, 안개비가 내리는구나
마지막 이별을 고하는 슬픔과 같이
전인 미답지가 궁금하느냐?
잔물결 이는 개울로 가서 세수나 하거라

霧雨下着霧雨下着
最後如告別時的傷痛
對前人未踏地掛念呼
到靜靜地泛着水波的小溪去洗一把臉吧


그 후 스님께서는 속가의 어머님을 모시고 정진하시다가 모친 별세 후 ‘밝은 진리를 전하기 위해 홀로 길을 떠나라’라는 부처님의 말씀을 떠올리고 불은(佛恩)에 보답하기 위하여 포교의 원(願)을 세우시고 서울로 올라오셨다.

1979년, 스님께서는 북한산 자락에 도량을 건립하기로 원력을 세우시며 사찰명을 보광사(普光寺)라고 명명하시는 한편, 1987년 관음전 불사를 필두로 하여 요사채를 세우셨고,1990년 보광선원,1993년년 대웅전을 조성하셨으며 2004년에는 회관 불사를 이루어내셨다.

이후 스님께서는 보광사를 중심으로 하여 도심 포교에 전념하시는 한편, 보광선원을 개설하여 조실로 주석하셨다. 또한, 불교의 정맥을 이어오는 데 큰 역할을 한 대한불교 조계종의 모체(母體) 선학원 원장(1983~1985)을 역임하셨고, 1992년부터 선학원 이사장으로 재임하시면서 부처님 정법(正法)을 수호하셨다. 이사장으로 재임하시는 동안 대한불교 조계종 종단과, 종단의 모체(母體)인 선학원과의 갈등이 격화되어 분파될 뻔하였으나, 사욕을 떠난 스님의 혼신을 다한 덕화와 화합의 노력 덕분에 문제가 원만하게 해결되었다.

지리산 정각사 죽림선원 조실(1991~2004)과 속리산 법주사 주지(1992~1994)를 역임하셨으며, 지방에도 포교의 거점을 마련하시고자 충남 금산 서대산에 선문사, 부산 김해에 보광사를 건립하셨다. 또한 1999년 충북 청주에 충북불교문화회관을 건립하셨다.

스님께서는 부처님의 정법과 참선법을 수호하시며 수좌들을 바르게 이끌기 위해 노력하셨다. 부처님과 조사스님들의 혜명(慧命)을 이어 바른 선(禪)을 펴기 위해 애쓰셨으며, 스스로 수행과 일상 삶에서 모범을 보이시며 평상심의 법을 대중에게 펴 보이셨다.

스님께서는 또한 대중 교화의 방편으로 소승에서 대승, 대승에서 최상승선으로 이끄는 차제적(次梯的)인 교화법을 택하셨다. 그리하여 스님께서는 광명진언과 지장경에서부터 시작하여 금강경·선가귀감·원각경·법화경으로 심화된 후 다시 선가귀감으로 마무리하게 되어 있는 수행법을 널리 펴셨다.

스님께서는 대중 속에서 더불어 함께 하시면서 염불·간경·참선 등 원효대사께서 보이셨던 통불교적(通佛敎的)인 수행 방법을 통하여, 인간 뿐 아니라 법계의 모든 중생들을 제도하는 보살도를 행함으로써 일체중생에게 이익이 되는 보살의 삶을 살도록 대중들을 이끄셨다. 대승 불교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육바라밀법을 수행의 근간으로 삼도록 하셨으며, 설법을 하실 때마다 이를 특히 강조하는 것을 잊지 않으셨다.

또한, 대승불교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화엄경 보현행원품에 나오는 ‘보현보살의 행원’에 따라 일체중생의 근기에 수순해 줄 것을 강조하셨던 스님께서는, 무한히 따뜻한 자비로움으로 일체중생들을 포용하시며 진리의 밝은 세계로 인도하셨다.

최상승선을 수행하는 수좌들과 학인들에게는 서릿발 같은 엄격함으로 질책하심으로써 후학들을 올바로 지도하셨다.

무량한 복덕과 지혜를 고루 갖추시고 바르고 곧으며 따뜻한 성품을 지니신 남산 정일 선사께서는 오랜 세월 동안 북한산 자락의 청정도량 보광사에서 일체중생과 더불어 동고동락(同苦同樂)하시었다.


어느 날 시자를 불러 이렇게 이르시고 열반에 드셨다.

“이제 갈 곳 없는 곳을 가야만 한다.”
“어디로 가신단 말씀입니까?”
“창문을 열고 자세히 살펴보거라.”


不能去的也要去
您到底要去何方
打開窗戶看一看


때는 불기 2548 년 음력 7월 23 일 새벽 5시44 분이었다.
세수 73 세 법랍 47 년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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