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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특별인터뷰 - 청소(靑昭) 큰스님

기자명 이학종

“조주의 無, 板齒生毛, 이 뭐꼬가 경계를 치고 나가는 화두”

“‘의리선’으로는 절대 부처될 수 없어. 선을 하되 일념으로 정진해야”

“지계는 바른 공부의 첫단계, 불효자는 공부 성취할 가능성 없어”



2002년 새해를 맞아 호남의 한 산사에 주석하며 정진 중인 청소(靑昭) 큰스님을 친견하고 부처님 공부 잘하며 바르게 살아가는 방법을 물었다. 세상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청소 큰스님은 염불과 참선 정진을 통해 개안(開眼)의 경지에 오른 선지식으로 주변에 알려져 있는 스님이다. 언론과의 접촉을 극도로 꺼려하는 것은 물론이요, 그 내용이 보도되는 것을 극구 사양하시는 스님의 간곡한 뜻에도 불구하고 새해 벽두 법보신문 독자들에게 큰스님의 청량 법음을 전해야겠다는 마음으로 불경함을 무릅쓰고 스님의 말씀을 정리해 게재한다.(편집자)



“옛날 조주(趙州)가 아직은 으스스 추운 이른 봄날 남전(南泉)을 찾아갔어요. 남전은 마침 양지 바른 곳에서 낮잠을 즐기고 있다가 조주를 보고는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지. 그러자, 조주가 ‘네, 서상원(瑞像院)에서 왔습니다.’고 했거든. 이에 남전이 ‘그럼 서상은 벌써 보았겠군.’하고 떠보는 거라. 조주가 답하기를 ‘아뇨, 서상은 모릅니다만 와여래(臥如來)는 보았습니다.’라고 받아 쳤어. 그러자 남전이 ‘허 이놈이 보통이 아니구나’라며 내심 놀라 벌떡 일어나 앉아서는 ‘네게 스승이 있느냐?’고 물었지. 그러자 조주가 대답하길 ‘아직 추운 계절인데 스승께서 건안(建安)하시니 무엇보다도 다행입니다’라고 했다는 거라. 이렇게 남전과 조주의 만남에서도 알 수 있듯이, 법의 경지란 지식이나 의리로 따져서 아는 게 아닙니다. 마음과 마음으로 통해야 되는 것이지. 1700가지 공안이 있다고들 하지만 대개가 의리에 떨어지는 것들이란 말이지. 공부하는 이는 마땅히 조주의 무(無)자 화두나, 판치생모(板齒生毛), 이뭐꼬와 같은 공안을 참구해야 합니다. 이런 화두들은 의리에 떨어지는 게 아니라 경계를 그대로 치고 나가는 것들이거든.”



세상을 다 맑히고 푸르게 할 법력 지녀



청소(靑昭) 스님(82). 법명처럼 세상을 다 맑고 푸르게 할만큼의 법력(法力)을 갖췄다는 입소문이 자자한 숨은 선지식이다.

스님은 현재 호남의 한 산사에 주석하고 있다.(스님과 사찰대중의 뜻을 존중해 주석 도량은 밝히지 않는다) 주석처는 의상스님이 창건했다는 구전이 전해내려 오고 있는 고찰답게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 위에 단출하게 세워져 있다. 그러나, 도량 전체에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채 스스로 그림자가 되어 살아가고 있는 스님의 법향(法香)이 충만해 있다.

친견 허락이 쉽지 않아서 부득이 저지른 “취재가 아니라 그저 법문을 듣기 위해 찾아 뵙는 것”이라는 ‘거짓말’을 모를 리 없으실 터인데도 스님은 별 내색도 없이 인사 끝나기가 무섭게 법의 경계를 설명하기에 바쁘다. 누구든 찾아와 법을 물으면 혼신의 힘을 다해 말씀을 해주시는 것이 스님의 천성이란다.

“세상에, 하루에 열 명이 찾아오면 열 번 법문을 하십니다. 큰스님에겐 거절하거나 꺼리는 표정이 없어요. 그저 한 시간도 좋고, 두 시간도 좋고, 당신 입가에 하얗게 마른침이 고이도록 말씀을 그칠 줄 모르시지요. 보다못해 대중들이 좇아 들어가 말리곤 할 정도니까요. 큰스님의 침 한 방울도 우리들에겐 너무나 소중한 것입니다.”

법문을 하는 스님에게 카메라를 들이대고 몇 컷 촬영을 하자, 주지 스님이 부리나케 좇아 들어와 찍지 말라고 호통을 치신다. 다 반갑지 않고, 신문에 나는 것도 싫다는 말씀이다. 그런 와중에도 스님은 웃음을 지긋이 머금은 채 부드러운 표정을 감추지 않는다. 잠시 후 소란이 가라앉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법문을 이어 나갈 뿐이다.



“정법 쇠약해 지기는 한국이나 외국이나”



“얼마 전, 염불수행으로 유명한 한 중국스님이 한국에 와서 여기 저기 법회를 하고 다닌다는 소식을 들었지. 그분이 대전에 왔다고 해서 내 달려가서 이것저것 물었어. 그렇게 이름이 난 사람인데도 영 아닌 것이라. 법이 쇠약해지기는 외국이나 한국이나 크게 다를 게 없는 모양이야. 참 걱정이 커요. 불교는 지식으로 하는 게 아닌데 말이지. 머리로 아는 것은 다 무너질 수밖에 없어. 도인으로 알려진 사람들도 잘 두고 보면 대개가 의리선에 빠진 경우가 허다해. 분명한 것은 의리선으론 절대로 부처가 될 수 없다는 것이지. 선을 하되 일념이 되어야 하는 것이라. 일념이 되어 정진을 계속하면 그 일념이 단단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보이는 것입니다. 법은 보는 것이지 아는 게 아니란 말이지. 이렇게 일념이 되어 관(觀)하게 되면 모든 것을 다 알게 되어 있어요. 한 가지만 꿰뚫어 알면 다 알게 되어 있는 것이지.”

청소 스님이 제시하는 바른 공부의 첫 단계는 계율을 철저히 지키는 것이다. 예불문에도 나오듯이 계향(戒香)과 정향(定香)이 있고, 거기에서 해탈향(解脫香)이 나오고 해탈지견(解脫智見)에 이르듯이 계는 공부의 터전이라는 것이다. 계 지키는 사람이 점차 줄어드는 것은 이런 점에서 볼 때 큰일이라고 지적한 스님은 기초 공사를 하지 않고 건물을 지을 수 없는 것처럼 계율을 지키지 않으면서 공부를 한다는 사람이 있다면 마구니라고 보면 틀림이 없다고 강조한다. 도인은 마음도 바르게 가져야 하지만 행동 또한 바르게 해야 한다는 것이 스님의 지론인 것이다.

스님은 특히 재가자들에게 효행(孝行)에 소홀하지 말 것을 강조한다. 바른 행동의 으뜸이 효라는 것을 한 시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효를 하지 않는 사람은 공부성취의 가능성이 없는 사람이고, 효행이 각별한 사람이어야 공부를 성취할 가능성이 큰 사람으로 생각하면 틀림없다는 것이다.

청소 스님은 또 염불이든 참선이든 간경이든 다 부처의 경지에 오를 수 있는 훌륭한 길이라고 강조한다. 마치 손가락 다섯 개가 있으나 그 뿌리는 팔뚝 하나인 것처럼 어느 문을 택하든 다 이루어지는 것인데, 이것은 되고 저것은 안 된다는 식의 험담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일반인은 참선보다 염불을”



“모든 게 다 부처되는 자리예요. 참선만 옳고 염불은 그르다는 그런 말이 어디에 있나. 난 오히려 일반인들에겐 염불을 권하고 싶어요. 왜냐. 염불을 하면 나도 모르게 부처님과 가까워짐을 느끼게 된단 말이지. 정이 든다 이 말이요. 염불을 열심히 하다보면 삼매에 들고, 마침내 일념이 되어 거기서 공부가 이뤄지는 것입니다. 참선 공부가 좋기야 좋지만 제대로 하기가 쉽지 않아요. 방법을 일러준다고 하는 사람조차 법을 모르는 경우가 많으니 어떻게 참선을 통해 마음자리를 볼 수 있겠는가. 소위 선지식이라는 분들의 행동을 보시오. 수좌들이 찾아가서 법을 물으면 대뜸 ‘너 오매일여하냐?’고 묻고는 ‘그렇다’고 하면, 벽력처럼 소리를 지르며 ‘저 놈 내쫓아라.’고 한단 말이지. 이런 현실에서 참선공부로 도인이 나오기는 쉽지 않습니다. 참선, 간경, 염불 중에 어떤 방법을 택하든 일념이 되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육조스님도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이라는 금강경 구절을 듣고 확철대오했다고 하지 않는가. 간경이든 염불이든 삼매에 들어 일념이 되고, 거기서 보면 이뤄지는 것입니다.”

청소 스님은 요즘 의리에 떨어져 도인 행세를 하는 가짜가 없지 않다며 이들을 향해서도 고언을 삼가지 않는다. 비난을 하고자 함이 아니라 바른 정법 선양을 위해 의리선사들은 가면을 벗어 던져야 하고, 그것이야말로 정법안장의 줄기를 되살리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소신에서다.

강원의 강사가 아무리 글을 잘해도 참으로 도가 없으면 제대로 된 강사라고 할 수 없으며 일등 강사가 되려면 선지(禪旨)가 있어야 하고, 계행은 구속하고 억압하는 게 아니라 바르게 사는 것이고, 그 근본은 효라는 것이 스님의 일관된 가르침이다.

생존해 계신 부모에게는 마음을 편하게 해드리고, 돌아가신 부모에겐 천도재나 제사를 정성껏 모시는 것이 효의 기본이라는 것. 자식에게 잘하면 겨자만큼의 복을 짓지만 부모에게 효도하면 태산같은 복을 짓는다고 거듭 강조한 스님은 그 이유로 부모는 근본이고 자식은 끝머리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근본을 저버리고 변죽만 울리는 짓을 그만두고 부모를 제일로 끔찍하게 봉양해야 하고 다음으로 동기간, 그 다음이 자식이라고 순서까지 일러준다.



“효도는 태산같은 복 짓는 기회”



11년전 지금의 주석처로 오기 전까지는 토굴생활을 하며 우리 나라의 유명 산천을 두루 섭렵한 스님은 은사가 누군 지(스님은 애써 밝히려 하지 않았다)도 모를 정도로 은유자재한 삶을 살아왔다. 그런 스님에게 상좌 또한 있을 리 만무하다.

비록 이것저것 물으려던 당초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지만 2시간 가까운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을 정도로 스님의 법문은 감동적이다. 절을 하고 물러 나오는 기자를 향해 스님은 문밖까지 나오시면서 “공부해요. 꼭 공부 열심히 해. 일념이 되면 되는 거야. 그러나 뭐든 열심히 해요.”라며 환한 미소를 머금은 채 배웅의 손짓을 보냈다. 지극한 마음으로 합장인사를 올린 채 눈이 살짝 덮인 산길을 내려오는 발걸음이 몹시 가벼웠다.



이학종 기자
urubella@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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