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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심수행장』 ⑦ - 계행 청정 없이 도를 이루려 하는가

기자명 법보신문
行智具備 如車二輪 自利利他 如鳥兩翼
得粥祝願 不解其意 亦不壇越 應羞恥乎
得食唱唄 不達其趣 亦不賢聖 應慚愧乎
수행과 지혜를 겸비하면 수레의 두 바퀴와 같고
자리와 이타를 함께하면 큰 새의 두 날개와 같다.
죽을 얻어 축원하면서도 뜻을 모르면 단월에게 부끄럽고, 밥을 얻어 염불 하면서도 그 뜻을 모르면 불보살께 부끄러운 일이다.

<사진설명>김득신의 '포대흠신도'

수행과 지혜는 수도인에게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생명과도 같은 것이다. 지구상에 인간들?이 존재하는 것은 아마도 어리석은 이보다는 지혜로운 이가 더 많은 까닭이 아닐까? 즉 좁아지는 지구의 엄청난 생명들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은 악인들 보다는 현자들이 더 많아서 일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몇 사람이 악인들의 무리와 마주쳤다. 이들은 아주 악질이며, 교활하고 잔인한 인간들이었다. 한 사람이 작은 소리로 ‘저 인간들은 모두 물에 빠져서 죽어버렸으면 좋겠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중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아니야 그런 생각을 가져서는 안돼. 그러면 그들과 똑 같은 인간이 돼! 아무리 이 인간들이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되더라도 그러한 일을 갈망해서는 안 돼요. 그 들이 없어지기 보다는 참회하는 것을 바라야 하오.’ ”

이렇게 같은 환경에서도 생각을 같이 못하는 것이 우자(愚者)와 지자(智者)의 현격한 차이이다. 그런데 어리석음을 퇴치하는 수행방법으로서 소승(小乘)불교와 대승(大乘)의 그것이 많이 변경되었던 것이다.

부처님 당시의 수행관은 철저히 자리(自利)를 추구하는 경향이 두드러졌었다. 중도(中道)와 사성제(四聖諦)에 팔정도(八正道),연기설(緣起說),삼십칠조도(三十七調道)등은 모두 초기불교에 있어서 대표적인 학설로서 당시의 수행관은 이러한 것들에서 기초된 것이다. 그러나 대승(大乘)불교에 들어와서는, 나 뿐만이 아니라 남을 동시에 구제한다는 동사섭(同事攝)이나, 십신(十信),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回向), 십지(十地)와 등각, 묘각, 불(佛)등의 53의 계제(階梯)를 논하여 보다 광범위적인 수행체계를 논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근기에 맞게 성문이면 성문, 보살의 성품을 가진 이는 보살의 수행을 해 나아가며 자리와 이타를 살펴야 된다.

죽과 밥 운운 하는 것은, 시주의 은혜에 부끄럽지 않는 수행을 지적함이다. 위앙조의 종조 위산스님에게 제자인 앙산이 말했다. “스님, 열반하시면 어디로 가십니까?” 위산이 말하길, “ 응, 저 아래 아무개 집 외양간 암소 배속으로 들어가!” 먹고 놀면 시주의 은혜를 몸으로 갚아야 한다는 인과응보의 벽력의 소리이다.

人惡微蟲 不辦淨穢 聖憎沙門 不辦淨穢
棄世間喧 乘空天上 戒爲善梯 是故破戒
爲他福田 如折翼鳥 負龜翔空
사람이 구더기의 깨끗함과 더러움을 가리지 못함을 미워하듯 성인도 사문이 더러움과 깨끗함을 가리지 못함을 싫어한다. 세상의 번잡함 버리고 텅 빈 하늘에 오르고자 하거든 계(戒)가 좋은 사다리가 된다. 파계자가 남의 복전이 된다 함은 날개 꺾인 새가 거북을 업고 허공을 남과 같다.

원효 스님은 수행의 기반이 엄격하고 철저한 계행을 실천하는 데 있으며, 계행이 청정치 못하고 더럽혀질 경우는 수행인에게 있어서 가장 부끄러운 일이고, 또한 수행에 크나큰 장애가 되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지계의 공덕을 경전에서 살펴보면,『월등삼매경』에서 “지계는 깨달음의 근본이요, 도(道)에 들어가는 요긴한 문이다. 보살이 계율을 굳건히 잘 지키고 보호하여 가지면, 10가지의 이익을 얻는다.

하나, 일체의 지행(智行)과 서원(誓願)을 만족한다. 둘, 정계(淨戒)를 지키면 부처님께서 배운 바와 같다. 셋, 지혜 있는 사람이 비방하지 않는다. 넷, 원(願)을 세워 물러나지 않는다. 다섯, 바른 행으로 편안하게 머문다. 여섯, 생사를 넘어 윤회의 고통을 벗어버린다. 일곱, 모든 망상을 끊고 열반의 즐거움을 사모한다. 여덟, 번뇌를 해탈하여 얽매임 없는 마음을 얻는다. 아홉, 마음이 청정하여 수승한 삼매를 얻는다. 열, 믿음과 재물이 부족함이 없다.”라고 하여, ‘계’의 중요성을 더욱 강조하였다.

법공 스님(동국대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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