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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짜익티요 페이야 2

기자명 법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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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5.06.07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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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야 기도로 영그는 미얀마의 내일

<사진설명>어둠이 내리기 직전의 짜익티요 페이야. 미끄러질 듯 시원하게 펼쳐진 대리석 바닥이 깔끔한 느낌을 더하고 있다.

짜익티요 페이야로 가는 길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불편한 교통편도 교통편이지만 차량 통행이 금지된 산 중턱에서 절까지 걸어 올라가야하는 산길은 불자가 아니라면 감내하기 힘든 여정이다.

길은 마치 똬리를 튼 뱀처럼 ‘S’자로 심하게 꺾여 있었다. 때문에 도착 지점을 가늠할 수 없어 훨씬 멀게만 느껴졌다. 게다가 더위는 어찌나 사납게 기승을 부리는지. 산길인 까닭에 나무들이 만들어 내는 시원한 그늘을 기대해 볼만도 하건만, 야속하게도 어디에도 그늘은 찾을 수 없다. 아니 그늘이 있다 해도 공기 자체가 뜨겁게 데워진 까닭에 산이라 해도 무더위는 어쩔 수가 없다. 덕분에 순례 일행은 달팽이처럼 흐느적거리며 힘들게 산을 올라야 했다.

산길에는 미얀마 사람들의 삶이 파노라마처럼 공존하고 있었다. 전통 그대로 맷돌에 곡식을 가는 아낙, 사탕수수에서 즙을 짜는 촌로, 페트병에 식수를 담아 운반하는 어린 아이까지. 이 곳 사람들의 일상이 날 것인 채로 길 위에서 생생하게 숨 쉬고 있었다. 길 옆에 드문드문 자리 잡은 가게들은 음료수와 음식, 불교용품을 팔며 생계를 연명하고 있었고 이마저 여의치 않은 사람들은 참배객의 짐을 나르는 지게꾼으로 굵은 땀방울로 고갯길을 적시고 있었다. 여기에 짜익티요를 참배하기 위해 천리 길을 마다않고 경향각지에서 모여든 다양한 종족의 미얀마 사람들이 어우러져, 산은 순례객과 주민, 일꾼으로 뒤엉켜 동물처럼 들썩거린다.

황금바위를 얼굴 삼아 몸을 숨기고 있던 짜익티요는 산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비로소 옷을 벗고 알몸을 드러냈다. 산의 정상에 어떻게 저런 공간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터는 시원스럽게 뻗어 있었다. 마치 이슬람 사원의 너른 광장을 연상시킨다고나 할까. 바닥에 깔린 뽀얀 우유 빛 대리석의 깔끔함으로 공간은 더욱 넓어 보인다.

짜익티요의 상징 성스러운 황금 바위는 경내가 끝나는 모서리에 위태하게 매달려 있다. 황금 빛깔로 온 몸을 치장 하고 허공 가운데 덩그러니 서 있는 모습이 마치 시 한수를 그림으로 옮겨 놓은 듯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파란 하늘과 시원스레 펼쳐진 도량, 그 끝에 우뚝 솟은 황금 바위, 비질하듯 쓸고 가는 시원한 바람에 몸과 마음에도 쌉쌀한 기운이 감돌고 있다. 산길에 뿌렸던 굵은 땀방울에 대한 불평불만도 시나브로 가신지 오래다.

그러나 이런 감상도 잠시, 길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한 탓일까? 그만 해는 발갛게 서쪽으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다. 짜익티요 경내 또한 한 점 불꽃처럼 붉게 피어났나 싶더니 이내 어둠 속 저편으로 건너가 버리고, 검은 물감처럼 어둠이 경내를 가득 덮어버렸다.

그러나 그리 서운해 할 일도 아니었다. 짜익티요의 풍경은 밤이 주빈이기 때문이다. 이곳의 낮은 참배객이라기보다 관광객이나, 연애를 목적으로 한 아베크족의 은애의 장소로 이용되는 바람에 경건함과는 약간의 거리가 있다. 그러나 어둠이 내리면 짜익티요는 신심 깊은 불자들의 도량으로 거듭난다. 머나먼 길을 쉬지 않고 달려 온 미얀마 불자들의 철야 기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숙소로 돌아와 간단하게 저녁을 해결하고 새벽녘에 다시 오른 짜익티요는 낮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일행을 맞이한다.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로 조금은 부산스럽던 절 입구는 산의 정령도 잠이 든 듯 고요했으며, 이따금 들려오는 풍경소리가 적막을 깨우고 있었다. 풀벌레 소리만이 세상의 중생이 내는 유일한 소리인 양 사방은 깊은 침묵에 휩싸여 있었다.

<사진설명>황금 바위 앞에 놓인 불단

이윽고, 계단을 올라 경내로 접어들자, 놀라운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한 낮의 한적한 분위기와는 달리 경내는 자욱한 향 연기로 뒤 덮여 있고, 여기 저기 자리를 깔고 기도하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조차 없다.

경건하고 고요하면서도 기도인파가 뿜어내는 엄청난 에너지가 경내 구석구석에 가득 드리워져 있다. 황금 바위는 햇볕 대신 조명으로 붉게 빛나고 있었다. 앞에 마련된 불단에는 촛불과 함께 불자들이 공양 올린 음료수와 과일이 줄을 지어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단 아래에는 종이배를 태우며 영가를 천도하는 이들과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공간을 나눠 앉아 경건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 뒤에 마련된 기도 공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앉아 염불하고, 기도하며, 절하고, 명상하며 간절한 염원을 발산하고 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성스러운지 보는 것만으로도 절로 마음이 정화되는 듯 고요해진다.

<사진설명>황금 바위에 금박을 입히며 기도하고 있는 불자들.

이들의 기도는 끝없이 계속됐다. 새벽 공기의 차가움에도 담요를 덮고 앉아 시작된 이들의 자세는 바위처럼 변함이 없었고, 태양이 떠올라 새로운 아침을 알릴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마치 세상의 모든 경건함을 모두 모아 조각으로 빚어놓은 것 같은 미얀마 불자들의 기도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문득 당나라 문장가 유우석의 시 ‘누실명(陋室銘)’이 떠오른다.

유우석은 “산의 명성은 높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선이 살고 있음에 있고(山不在高,有仙則名), 물의 가치는 깊은 데에 있지 않고 용이 살고 있어야 신령스런 물이라 할 수 있다(水不在深 有龍則靈), 이 좁은 집은 누추하지만 나의 덕으로 향기롭다(斯是陋室 唯吾德馨)”는 교훈적인 말을 남긴 바 있다. 짜익티요는 오직 불심으로 성지가 된 곳이니 이곳이야말로 「누실명」에서 언급한 그곳이 아닌가.

짜익티요는 어쩌면 평범한 도량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 곳은 황금 바위가 있음으로 해서 가장 성스러운 공간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더불어 그 황금 바위 역시 신심 깊은 미얀마 불자들이 아니었다면 그저 한낱 돌에 불과했으리라. 미얀마는 현재 정치, 경제적으로 많은 어려움에 처해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들에게 희망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이들에겐 어느 누구도 따라 올 수 없는 깊은 신심이 있기 때문이다. 미얀마 불자들의 불심이 바로 미얀마의 자존심이라는 말도 이래서 생겼을 것이다.

kimh@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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