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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고요함을 도반 삼아[br]불보살의 삶을 향유해야

기자명 법보신문

조계사 주지 원 담 스님

선이란 사유하는 것

선(禪)이란 팔리어 자나의 음역어로, 완전한 음사인 선나(禪那)의 준말입니다. 산스크리트의 디야나는 타연나(馱衍那)로 음역합니다. 이를 정려(靜慮), 사유수(思惟修) 등으로 의역하며, 음사와 의역을 합하여 선정(禪定)이라고도 합니다. 따라서 선이란 한마디로 사유하는 것입니다.

현대 자연과학의 총아라 하는 컴퓨터는 우리에게 ‘가상의 세계’를 열어 주었습니다. 컴퓨터는 법당을 짓는데도 임의대로 10평을 만들었다가 바로 100평, 1000평의 법당을 만들고, 부처님을 모셨다가도 바로 관세음, 문수보살을 모시기도 합니다. 컴퓨터를 조작하는 사람의 의지에 따라 마음대로 변화시킬 수 있지만 그 세계는 실재 세계가 아닌 분명 사이버 세계입니다. 이 세상도 깨닫지 못하면 자기 혼자 만족하며 사는 가상세계일 뿐입니다. 자연과학은 무한한 우주를 향해 가기도 하지만 무한하게 작은 세계로도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이 공부도 마찬가지로 깨달으면 이 우주보다 큰 마음을 열지만 깨닫지 못하면 미립자 한 톨도 비집고 들어갈 수 없습니다. 세속에서 쓰는 마음이 한 없이 옹졸해 본래 마음이 작은 것으로 생각하겠지만 한 번만 뒤집으면 우주를 떠안는 큰마음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최근 세계적인 사회문화 흐름 중 핵심 코드로 떠오르는 것이 ‘명상’입니다. 20세기 인류 사회 중심에는 막시즘이나 냉전과 같은 단어들이 주를 이루었지만 지금은 자본주의, 글로벌이라는 단어와 함께 ‘명상’이 전 세계에 파급되고 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개인적 영감이나 집단 평화를 추구하는 명상 문화가 인류 문화의 흐름을 주도할 것이라 예측하고 있습니다. 서양에서 말하는 명상은 우리로 말하면 참선이요, 남방불교 측에서 보면 위빠사나입니다. 물론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수행과 관계돼 있습니다. 다만 서양인의 눈에 비친 명상과 참선은 근본적으로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명상이란 집중을 통해 자기 마음을 고요하게 해 자신을 컨트롤 하는 것이지만, 참선은 선을 통해 마음을 고요하게 함은 물론 깨달음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명상과 참선의 차이입니다.
불교 수행법은 크게 북방불교의 참선과 남방불교의 위빠사나로 나뉘는데 둘 다 깨달음을 추구하기 때문에 근본 의미는 같습니다. 인도의 힌두명상도 알고 보면 우리 참선과도 유사한 점이 아주 많습니다. 1993년께 ‘힌두명상’을 알고 싶어 통역인과 함께 인도로 가 구루들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한 아슈람을 방문했을 때, 풍채 좋은 한 분이 나무 아래 평상에 앉아 있었는데 한 눈에도 범상치 않아 보였습니다. 구루를 만나기 전 담론을 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인도의 스승을 만나 힌두명상에 대해 알고 싶다고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 제자들은 “우리도 선을 알고 있다”며 두 손바닥을 부딪쳐 소리를 내고는 저에게 “이 소리는 어디서 왔는가?”라고 물었습니다. 순간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이러한 법거량은 중국과 우리나라 방식이지 않습니까? 그래 제가 “당신의 두 손이 잘린다면 그 소리가 어떻게 나왔겠는가?”라고 되물었습니다. 이 대화를 들은 풍채 좋은 구루가 저를 직접 불러 “어떻게 공부하고 있느냐”고 묻기에 우리나라와 힌두 명상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세계는 지금 명상에 눈 돌려

한국의 수행체계는 간화선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수행만 하면 되지 왜 묵조선이니 염불선이니 해서 여러 가지를 내놓았는지 의아해 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선지식들이 중생의 근기에 따라 나눴기 때문입니다.

‘염화미소’(拈花微笑) 같이 “이 도리를 알겠는가?”했을 때 곧바로 알면 끝나는데 대부분의 중생들이 잘 모른다는 겁니다. 이를 본 옛 선지식들은 중생이 좀 더 깨달음에 가깝게 다가갈 수 있도록 다양한 체계를 내놓은 것인데 그게 바로 묵조선이고 간화선이고 염불선입니다.

간화-묵조-염불선 근본 같아

간화선은 화두를 들고 공부하는 법입니다. 좌복 위에 앉아 가부좌를 틀고는 딴 생각만 하면 머리가 터져 앉아 있고 싶어도 앉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화두를 들고 앉아 있으면 번뇌망상을 조금씩 줄여갈 수 있습니다. ‘불성이 있는냐?’고 물었을 때 왜 조주 스님은 ‘무’(無)라고 했을까 하고 몰두해 보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오만가지 생각이 일지만 이 화두를 잡고 있으면 삿된 상념들이 줄어들고 나중에는 오로지 이 무자 화두만 성성하게 살아있습니다. 화롯불에 눈이 앉으면 바로 녹아 버리듯이 팔만사천 번뇌도 이 화두라는 불덩어리에 닿으면 바로 녹아버립니다. 이 단계를 지나면 깊은 선정에도 들고 나아가 말 끊어진 본래면목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아주 옛날 분들은 화두니 조사니 묵조니 하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수행에 있어 차제법을 공부한 것이 아니라 꽃을 든 이유를 바로 알아버렸기 때문입니다. 단지 중생들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차제법을 제시하다 보니 이런 수행법 저런 수행법이 생긴 것뿐입니다. 예를 들어 초등학교에서 산수만 하다가 중학교에 들어가 방정식을 풀어보려면 처음엔 쉽지 않습니다. 방정식 푸는 설명 한 번 듣고 이치를 알면 좋으련만 그렇지 못한 학생도 많기 때문에 방정식의 원리를 알려주기 위해 다양한 학습법을 개발하지 않습니까? 수행법의 다양화 원인도 이와 같은 것이라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묵조선은 우리 마음의 본래 모습이 마치 허공과 같음을 알고 산란스런 마음을 고요하게 한 후 그 속에서 진공묘유(眞空妙有)의 도리를 몰록 깨닫는 것입니다. 다만 여기에는 테크닉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호흡을 관하는 것인데, 처음에는 들이쉬고 내쉬는 호흡을 관하며 마음의 평정을 찾은 후 진일보 해 ‘이 호흡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관하다가 선정에 든 이후 몰록 깨닫는 것입니다.

如如해야 생사초월 할 것

염불선도 깨달음을 향해 가는 수행입니다. 처음에는 무슨 가피라도 얻을 까 하고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합니다만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본격적인 수행체계로 들어설 수 있습니다. 아무런 잡념 하나 없이 관세음 주력이 잘 될 때를 경험한 분이 이 자리에도 많이 계실 터인데 바로 그 자리가 염불을 통해 고요함에 들어간 상태입니다. 이 단계서 더 나아가면 관세음보살도 잊고 본인이 관세음보살로 남아 있게 됩니다. 관세음보살이 남아 있으면 자타, 즉 대립이 존재한 상태이지만 그 관세음보살도 잊고 오로지 홀로 남아 관세음보살과 자신이 하나가 되면 자타도 무너진 단계입니다.

어떤 수행법을 택해 정진하든 이것 하나만은 잊어서는 안 됩니다. 바로 무념무상의 고요함을 도반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정이라고도 하는 이 고요함을 통해 가지 않고는 기도하는 사람과 기도 받는 사람의 주객을 떨쳐내기 어렵습니다.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속에서도 화두나 주력이 성성이 살아있으면 불보살의 삶입니다. 그러나 성성하다 말다, 성성하다 말다 하면 아직 갈 길이 먼 것입니다. 성성하면 생(生)이요, 그렇지 못하면 사(死)이니 아직 생사를 초월하지 못한 중생의 삶일 뿐입니다.

무엇을 하든 집중과 고요함을 도반으로 삼아야 합니다. 자신의 수행을 선지식에게 점검 받으면 더 없이 좋은 소식이 있을 것입니다. 혹, 당장 선지식을 만나지 못했다 하더라도 이 두 도반과 함께 깨달음의 길을 걷고 있다면 최소한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수행법을 택하시든 집중과 고요함을 도반으로 삼아 평생 동안 정진의 끈을 놓지 말기 바랍니다.

채한기 기자 penshoot@beopbo.com

이 법문은 조계사 주지 원담 스님이 8월 21일 조계사 일요법회에서 설법한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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