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⑦ 가는 시간에 나이는 준다

기자명 법보신문
죽음에 기준 하면 ‘죽어간다’는 표현이 맞는 말
삶-죽음 집착 놓으면 시간은 그저 가고 있을 뿐


시간의 변화는 눈으로 볼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시간이 가고 있다거나 흐르고 있다고 한다. 사람살이는 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이어지고 달라져 가는 것이 사실이기도 하다. 그래서 부득불 시간의 단위를 정해 놓고 그 단위에 따라 변화의 값을 재고 있다. 한 사람의 삶에 이 시간 단위를 크게 갈라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다(生老病死) 한다. 이를 한 단위로 축약하여는 ‘평생’이라 하니, 평생이란 수평적인 삶의 외줄이다. 흐르는 시간에 기대어 가는대로 가는 것이다. 태어남의 삶(生)에다 출발점을 놓고 죽음을 종점으로 가정한 흘러감이다. 이를 우리는 살아간다는 말로 시간의 연속을 대신하고 있다.

삶과 죽음의 외줄 시간에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우리 삶을 표현하는 말이 다를 수 있다. 태어남의 순간에 기준을 두어 앞으로 갈 시간에다 맞추면 ‘살아간다’함이 옳고, 종점인 죽음의 결말에 기준을 둔다면 ‘죽어간다’함이 맞는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죽는 그날까지도 죽어간다는 말을 싫어함은 삶이 즐거움이고 죽음은 괴로움이라는 단순한 정감의 갈래에서 그러한 것이다. 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一卽一切多卽一)라는 인연 따라(隨緣) 이루어지는 원리로 본다면 삶이 곧 죽음이요 죽음이 곧 삶이니, 살아간다와 죽어간다에 차이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 범상한 사람들은 이 말의 실체를 시간의 변화에 따라 옳거나 그르거나 어느 한 쪽을 선택하게 된다. 살아간다 함이 자연스러울 때는 삶의 외줄이 중반을 넘기 이전까지 이고, 죽어간다 함이 맞는 듯이 느껴지면 이 외줄이 중반을 훨씬 넘겼구나 싶을 때이다. 이렇듯 같은 시간의 거리를 두고서도 자신의 처지에 따라 그 감각적 표현은 극과 극의 상반된 표현을 하게 된다. 그러니 삶과 죽음이라는 두 끝을 놓아버리고 그저 시간은 가고 있다 하고 여기면 내 한 몸의 젊음 죽음도 없어질 것이 아닌가. 두 끝에 떨어지지 말라(不落兩邊)의 가르침은 이래서 옳다.

한 해의 설날 아침 설떡국을 마주한 할아버지와 손자의 표정은 참으로 묘하다. 손자는 한 살 더 먹어 기쁘다 하고, 할아버지는 한 살 더 먹어 서글프다 한다. 손자의 시간은 살아감이지만, 할아버지의 시간은 죽어감이다. 이 살다 죽다의 언어적 정감이 이런 엄청난 극단적 상황을 연출한다. 나이 50을 넘기자 종점으로 가는 걸음이 싫어져 ‘오늘부터는 나이를 먹겠다’ 하고, 주변에서 “몇 살이냐” 물으면 49라 했다. 그 다음 해는 48, 다음 해는 47이라 했더니, 알아차린 친구가 “무슨 나이가 해마다 주는냐” 한다. 내 대답은 간단했다. “한 살 더 먹었으니 주는 것 아닌가. 떡국 한 그릇 먹으면 한 그릇이 비웠지 않는가. 먹으면 주는 것이 물리적 현상이니 떡국 한 그릇 먹은 내 나이도 주는 것이 당연하지 않나” 하며 웃고 말았다.

세상 만물의 상황에는 변함이 없다. 있는 그대로가 진실이고 그것이 진리이다. 그야말로 진여(眞如)의 참다움이다. 상황은 똑같은데 자신의 처지에 따라 달리 받아들이면서 나의 판단만이 옳다 한다. 나와 남 이쪽과 저쪽의 두 끝을 정해 놓고 시비를 따지면 어느 쪽도 옳지가 않다. 중심을 잡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중심을 정해 놓고 판단하면 이를 고집이라 하고, 이 고집이 바로 집착인 것이다. 이 집착도 버려야 한다.

조계종 2세인 진각(眞覺)국사가 새 해 설날 법당에 올라 법문을 하되,
“오늘 아침에 시절인연 들어 말하리라. 어린이는 한 살을 더하고 늙은 이는 한 살 감하기 바라리라. 그러나 늙은이 어린이 할 것 없이 더하는 것도 덜하는 것도 없다. 더함도 덜함도 없다는 그것마저 한쪽으로 집어 던져라”하였다.

간 해의 그믐 밤과 오는 해의 새벽은 그야말로 찰나의 시간이다. 시계의 초침이 찰칵할 사이다. 이 찰나의 경계에서 느끼는 사람 사람의 정감은 죽음과 삶도 가를 것 같은 거리로 받아 들이니, 이 더함도 덜함도 집어 치우라는 스님의 말씀이야 말로 그야말로 진리의 문으로 인도하는 법문이다. 나는 50대에 이 흉내내다 친구에게 들켰다.

동국대학교 명예교수
sosuk0508@freech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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