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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산〈하〉[br]“7바라밀 실천해야 참불자”

기자명 법보신문

<사진설명>불교정화운동을 독려하는 내용을 담은 구산 스님의 혈서.

구산 스님은 언제나 얼굴 가득히 스님특유의 잔잔한 미소를 담고 있었다. 그래서 스님은 ‘미소불’(微笑佛)이라는 별칭까지 얻게 되었다.

그러나 그 얼굴 가득히 번지는 잔잔한 미소 속에서도 선기(禪機)만은 그야말로 전광석화, 거침없이 번뜩였다.

한 때 불교계의 한 기자가, 오끼나와까지 가서 태평양 전쟁 전몰자 위령제를 지내고 막 돌아온 구산 스님을 만나 인터뷰를 한 일이 있었다.

“금여시(今如是) 고여시(古如是)야”

이 때 기자가 구산 스님께 다음과 같이 물었다.
“스님, 위령제를 지내고 오셨는데, ‘영’이란 정말 있는 걸까요? 만일 영이 있다면, 위령제를 지내주신 스님께 뭐라고 하던가요?”
이에 구산 스님은 거침없이 곧바로 대답했다.

“하하하… 죽은 줄로 알고 있다가 죽지 않았음을 깨우쳐주어 고맙다고 그러더구먼. 영가들이 도피안에 이르는 노래소리도 듣고 왔는걸. 하하하…”

또 한번은 다른 기자가 구산 스님께 당시 유행하고 있는 서양의 귀신영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여쭌 일이 있었다.

“스님, 귀신이 정말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큰 스님께서 선을 그어 주십시오.”
이에 구산 스님은 즉각 말씀하셨다.

“허허 점점 바보스러운 질문만 하는구먼. 집착하면 있고, 집착하지 않으면 없는 거지, 그걸 왜 물어?”

졸리면 잠자고, 배고프면 먹고, 목마르면 물마시고, 어제나 오늘이나 늘 같다는 이 말씀을 구산 스님은 한마디로 ‘금여시 고여시’라 했다.

그리고 스스로를 가리켜 ‘돌사자’(石獅子)라 칭했다.

“나는 조계산 숲 속에서 채마밭이나 매다가 오가는 운수객들이 묻는 말에 응답이나 하고, 동서양 다른 나라 사람들이 찾아와 인간의 행로를 물으면 방향을 가리키며 보내는 네거리의 돌사자야.”

스님은 당신의 말씀 그대로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해외포교에도 심혈을 기울여 미국 제자, 프랑스 제자, 스페인 제자 등 39명의 눈 푸른 제자들을 두었고 영어로 된 법어집을 발간하기도 했다.

호랑이굴 옆에서 3년 수행

언제나 잔잔하고 포근한 미소로 ‘미소불’이라는 별칭까지 얻은 구산 스님이지만, 자기 스스로에게는 무서우리만큼 냉엄했고, 칼날 같은 의지로 스스로를 엄격히 다스리는 분이었다.

젊었을 때 구산 스님은 지리산 깊숙이 들어가 토굴을 마련하고 정진에 들어갔다. 이 때 스님은 깊은 산 속에 밭을 개간하고 곡식도 심고 채소도 심어 자급자족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깊은 산속이라 산짐승들이 수시로 내려와 스님이 지어놓은 농사를 뜯어먹고 가는가 하면 어떤 때는 마구 짓밟아 놓고 가버리는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스님이 몽둥이를 들고 좇아가곤 했지만, 멧돼지들은 스님이 좇아가도 얼른 달아나지 않은 채 제멋대로 곡식을 마구 파헤쳐 먹고만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토굴 근처에 있던 또 하나의 굴속에서 난데없이 큰 호랑이가 튀어 나오더니, 멧돼지를 향해 포효하며 돌진, 멧돼지가 혼비백산하여 도망치는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스님은 토굴 근처에 있던 또 하나의 석굴이 바로 호랑이의 굴이었던 것이다. 그 후에도 스님은 토굴을 옮기지 않고 그 토굴에서 기어이 천일정진을 마쳤는데, 호랑이가 포효한 그 후로는 멧돼지가 근처에 나타나는 일도 없어서 농사를 망치는 일도 면할 수 있었다.

큰 도인이 될 스님의 수행정진을 호랑이가 알아보고 호법신장처럼 구산 스님을 지켜주었다는 전설같은 일화를 남길 만큼 구산 스님은 깊고 깊은 산속에서 홀로 수행을 했던 셈이다.

1954년 음력 11월, 불교정화운동이 한창 벌어지고 있던 서울, 지금의 조계사 법당에서는 한 젊은 비구가 지지부진한 불교정화운동을 보다 못해 손가락을 자르고 500자 혈서(血書)로 불교정화운동을 다짐하는 격문을 써서 수많은 비구스님들을 분발시키는 일이 벌어졌다.

손가락을 자르고 무려 500자의 혈서를 쓴 비구 스님이 바로 효봉 스님을 모시고 서울로 올라와 불교정화운동에 참여한 구산 스님이었다.

혈서는 가끔씩 쓰는 일이 있었다. 그러나 손가락 끝에서 흐르는 피로 무려 500자(字)에 이르는 장문의 혈서를 쓴다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그런 일이 아니다. 목숨도 버리겠다는 비장한 각오가 없으면 500자에 달하는 장문의 격문을 피로 쓸 수는 없는 ‘지독한 결단과 무서운 의지’였다.

이 때 곁에서 지켜본 스님들의 증언에 의하면 구산 스님은 나중에 손가락 끝에서 더 이상 피가 나오지 아니하자, 망치로 손가락 끝을 두들겨가며 기어이, 500자 혈서 격문을 완성했다고 하니, 그 무서운 결의를 감히 누가 흉내낼 수 있으랴.

6바라밀에서 7바라밀로

구산 스님은 불자들에게 새로운 수행법을 제시, ‘7바라밀’을 요일에 따라 실천할 것을 간곡히 당부하셨다.

“사람마다 나름대로 나란 멋에 살건만 이 몸은 언젠가 한 줌 재가 아니리. 묻노라 주인공아, 어느 것이 참나련고.”

이렇게 전제한 구산 스님은 ‘7바라밀’을 다음과 같이 실천하라 이르셨다.

월요일은 베푸는 날 보시바라밀, 화요일은 올바른 날 지계바라밀, 수요일은 참는 날 인욕바라밀, 목요일은 힘쓰는 날 정진바라밀, 금요일은 안정의 날 선정바라밀, 토요일은 슬기의 날 지혜바라밀, 일요일은 봉사의 날 만행(萬行)바라밀.

원래 불교의 가르침 속에 있던 육바라밀에 한 가지를 더하여 일요일에는 반드시 자비행을 실천하고 봉사하는 ‘만행의 날’로 지키라는 당부였으니 7일 단위의 현대생활인들에게 딱 들어맞는 새로운 수행법이었다.

월화수목금토일, 7일동안 내내 7가지 바라밀을 실천하는 불자가 된다면 바로 그것이 이 세상을 불국정토로 만드는 길이라고 강조하고 당부하셨던 구산 스님.
이제와 생각해 보면 당신께선 과연 먼 훗날을 미리 내다보신 혜안을 지니신 큰 스님이셨으니, 참으로 그립고 그립습니다.

윤청광(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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