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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래리 로젠버그〈상〉

기자명 법보신문

하버드 대신 구도 선택한 숭산의 제자

<사진설명>래리는 유태인 출신으로 하버드대 정신과 의사였지만 이제는 가장 유능한 위빠사나 지도자다.

래리 로젠버그(Larry Gosenberg 1932 ~ )는 하버드 대학 근처의 캠브릿지 위빠사나 수행센터(the Cambridge Insight Meditation Center, CIMC)의 설립자이자 지도법사이자 배리(Barre)에 있는 통찰수행회(IMS)의 지도법사이기도 하다.

래리는 러시아계 유태인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14대째 랍비이었지만, 종교를 믿는 자는 바보라는 사상을 가지고 있던 막스주의를 배운 사람이었다.

래리는 브룩클린 대학(Brooklyn College)을 졸업했으며, 시카고 대학에서 사회심리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리고 선망의 직업인 하버드 의대 정신과에 취직하였다. 하지만 실망을 한 래리는 다시 시카고 대학으로 돌아왔고, 그곳에서 환각제를 가지고 실험을 시작하였다. 1960년대에 멕시코를 여행하던 중에 그는 성자라고 불리던 카우보이를 만나게 되었고, 그에게서 “마약으로 시간 낭비하지 마시오. 명상을 해야 합니다.”라는 말을 들었다.

그 후, 정신적 길을 찾아 많은 스승을 만났다. 그 스승들은 인도의 크리슈나무르티, 위말라 타카르(Vimala Thakar), 한국 조계종의 숭산 스님, 일본 조동동의 가타기리 스님이었다. 이 분들과 함께 8년이라는 시간을 보낸 후, 문인드라-지를 통해 처음으로 위빠사나 수행을 접하게 되었다. 그 후 래리가 많은 영향을 받은 수행전통은 태국의 숲속 수행의 전통의 스승들인 아찬 마하부와, 아찬 수왓(Suwat), 아찬 붓다다사였다. 그리고 틱낫 한 스님의 지도아래 수행도 했다.

지금은 하버드 대학 바로 옆에 위치한 캠브릿지 위빠사나 수행센터(1985년 설립)에서 위빠사나 수행을 지도하고 있다. 이제 래리 로젠버그가 걸어온 정신적인 길을 돌아보면서 한 서양인의 진지한 구도여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틱낫한 스님 등 선지식 탐방

래리가 첫 번째 스승인 크리슈나무르티와 처음 만난 때는 1968년이었다. 당시 래리는 브랜다이스(Brandeis)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었을 때였다. 당시 이 대학에서는 일주일에 한 사람을 초청해서 강연을 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그 때 초청된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크리슈나무르티였는데, 초면인 크리슈나무르티와 함께 걸으면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래리는 크리슈나무르티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처럼 깨어있는 사람은 처음이었다고 회상하고 있다.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곧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이 편하게 느껴졌다. 대학교 교수였던 래리는 학문적인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 깨달았다. 박사학위를 받고 좋은 직업을 얻는 일에 불타올랐던 래리의 삶은 크리슈나무르티와의 만남을 통해서 일대 전환을 가져왔던 것이다. 학자들 사이에 회자되던 오래된 속담인 “출판하라 아니면 망한다.”는 “출판하고 망한다.”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래리는 크리슈나무르티를 만나기 전에는 자신이 어떻게 느끼는지 언어로 말할 수가 없었다.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크리슈나무르티의 가르침은 래리의 인식을 바꾸어 놓았다. 크리슈나무르티는 말했다. “단지 가르침에 다가가서 당신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하시오. 당신이 실제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아차리기 시작하시오.” “당신이 실제로 사는 방식”이라는 표현을 크리슈나무르티는 반복해서 사용했다.

한국에서 참선 수행도

크리슈나무르티에게서 영향을 받고 난 래리는 인도로 가서 산스크리트와 베단타 철학을 배우려고 하였다. 그 때 한 친구의 소개로 한국에서 온 숭산스님을 알게 되었다. 숭산스님이 지도하는 수련회에 참가했고, 인도로 갈 이유가 없어져 버렸다. “그 동안 배웠던 교과서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 보다고 4년간 숭산스님 아래서 성취한 것이 더 많아.”라고 생각했다.

래리는 선 수행을 통해서 한 두번 큰 기쁨과 평화와 사랑을 맛보았다고 회고하고 있다. 그러한 체험에 의해서 래리의 학문적인 경력은 막을 내리고 있었다. 하버드 대학에서 배웠던 것은, 자신이 잘못된 곳에서 행복을 찾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래리는 하버드 대학에서 행복할 수 없다면 도대체 어디에서 행복할 수 있을 것인가 자문하였다. 그리고 브랜다이스 대학 교수직을 그만두고 전적으로 수행에 몰두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후, 미국 로드 아일랜드 프로비던스에 있는 숭산스님의 절에서 얼마간 지내다가, 1년 반 정도는 아시아에서 보냈고, 1년 간은 숭산스님의 지도아래 한국 선방에서 재가자로 수행을 하였다. 당시 간화선을 지도받았던 래리는 숭산스님의 지도아래 4년 정도 수행을 하였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돌아와서 미국의 선센터에서 지내게 되었는데, 매일 조석 예불을 위시로 절하고 발우공양하는 등 많은 의례적인 일을 하게 되었다.

미국 대표적인 위빠사나 지도자

그러는 동안 친한 도반이었던 존 카밧 진(Jon Kabat-Zinn)은 위빠사나 집중수행에 참여하게 되었다. 집중수행에 갔다 와서 그는 나에게 “래리, 자네가 찾고 있는 것을 내가 발견했어.”라고 말했다. 래리는 항상 의례적인 행사를 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는데, 위빠사나에는 그런 의례가 없다는 것을 존은 말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래리는 선수행 자체는 좋았기 때문에 그대로 선수행을 하겠다고 존에게 말했다. 그러자 존은 “내가 자네를 묶을 수만 있다면, 꽁꽁 묶어서 내 픽업 트럭에 실어서 다음 위빠사나 집중수행에 데리고 갈거야.”라고 말했다. 그리고 돌아오는 래리의 생일에 존은 잭 콘필드가 지도하는 위빠사나 수행을 선물하였다.

이렇게 해서 래리는 처음으로 위빠사나 수행을 접하게 되었고, 그 수행법의 단순함에 매료되었다. 집중수행은 기본적으로 좌선과 행선(경행)만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마음으로 알아차리면서 호흡에 집중하는 것이 주된 방법이었다. 염불도 없었고, 선방에서처럼 발우공양의 복잡한 절차도 없었다. 먹을 때는 오직 먹는 행위를 마음챙겨 알아차리면 되었다. “맙소사! 이 얼마나 간편한가!”라고 래리는 생각했다. 래리는 그 때까지 동양의 선불교 전통의 의례가 미국인에게 얼마나 부담스러운지 몰랐다고 고백하고 있다.

김재성(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교수)
metta4u@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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