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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상〉

기자명 법보신문

“첫째도 참선, 셋째도 참선” 강조한 월자 문중의 스승

평생 “수행정진”당부

금오(金烏) 스님은 이른바 한국불교의 덕숭선맥(德崇禪脈) 가운데 우뚝 솟아오른 큰 봉우리였고 오늘의 한국불교계를 이끌어가고 있는 ‘월자문중’(月字門中)을 이룬 큰 스님이었다.

금오 스님은 1896년 전남 강진군 병영면 박동리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나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던 중 ‘공부를 게을리 한다’는 이유로 형으로부터 매를 맞고 분한 마음에 “그까짓 글공부만 해서 무엇을 하느냐” 생각하고 그 길로 가출, 16세의 나이로 무작정 금강산으로 들어가 마하연선원에서 도암(道庵) 스님께 나아가 삭발, 득도하였다. 그 후 금오 스님은 오대산 월정사, 영축산 통도사, 천성산 미타암, 예산 보덕사의 보월선사 문하에서 수행정진 끝에 문득 깨달음을 얻었고, 이후 3천리 방방곡곡을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며 선기를 가다듬고 수많은 제자들을 키워 기라성 같은 인재들을 덕숭선맥에 심어놓고 1968년 법주사에서 홀연 열반에 들었다.

특히 금오 스님은 제자들에게 늘 다음과 같이 당부하였다.
“내 그대에게 꼭 당부할 말이 있으니 첫째도 참선이요, 둘째도 참선이요, 셋째도 참선이요....아홉째도 참선이요, 열째도 참선, 오직 참선이 제일이니라.”
금오 스님은 수행자로서 철저한 하심(下心)을 기르기 위해 걸인이 되기로 결심하고 전라북도 전주시 변두리 다리 밑에 있던 걸인들의 움막을 찾아갔다.

“나는 이래 뵈어도 출가한 수행자다”하는 아만심을 송두리째 뽑고 “나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보잘 것 없는 하찮은 인간이다”하는 하심을 기르려면, 승려의 신분으로 목탁을 치면서 탁발을 하는 것만으로는 어딘지 불완전하기 짝이 없었다. 비록 목탁을 치고 염불을 하면서 식은밥도 얻어먹고 곡식도 탁발했지만, 그래도 마음 한 구석에는 “나는 이래 뵈도 도를 닦는 출가수행자이지 그냥 얻어 먹고 사는 거지가 아니다”하는 아만심이 남아 있음을 문득문득 깨달았던 것이었다.

그래서 금오 스님은 마음 밑바닥에 남아 있는 그 아만심마저 깡그리 버리고 철저한 하심을 기르기 위해 완전한 거지가 되기로 작정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신분을 속이고 거지가 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 전주의 거지대장은 금오 스님에게 거지가 되려면 세 가지 맹세부터 하라고 다그쳤다. 금오 스님은 별수 없이 수많은 거지들이 보는 가운데서 거지대장에게 맹세를 해야만 했다.
“첫째, 밥은 식은 밥이든 쉰밥이든, 먹다 남은 밥이든, 누릉밥이든 가리지 않고 먹는다. 둘째, 옷은 닳아지고 찢어져서 속살이 삐져나와도 가리지 않고 입는다. 셋째, 잠은 논둑이든 밭둑이든 다리 밑이든 가리지 않고 잔다.”

下心 배우려고 걸인생활

그리고 그날부터 장타령을 배워 함께 구걸하고, 함께 먹고, 함께 잠자는 완전무결한 거지가 되어 세상을 돌아다니며 ‘살아있는 참선수행’을 다져나갔다. 2년여에 걸친 거지생활은 결국 길거리에서 구걸 중 맞닥뜨린 어느 스님에 의해 금오 스님의 승려신분이 드러남으로써 중단되었는데, 훗날 스님은 걸인시절을 회상하면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몸뚱이 하나 먹여 살리는 거지노릇을 하는데도 세 가지 맹세를 해야 했거늘, 하물며 온 세상의 스승이 되어 모든 중생들을 제도하겠다는 출가 수행자가 죽느냐, 사느냐, 사생결단을 해서 도(道)를 깨치겠다는 비장한 각오가 없다면 말이 되겠느냐?”

금오 스님은 “어느 스님이 큰 깨달음을 얻은 선지식이다”하면 곧바로 그 선지식을 찾아가 법을 구했다. 1920년대 왜정시대에 있었던 일이었는데, 당시 경허 선사의 제자 가운데 월자(月字)를 가진 3명의 선사가 ‘당대의 으뜸가는 선지식’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남쪽으로 내려가 있던 경남 천성산의 혜월 스님, 충남 예산 덕숭산을 지키고 있던 월면 만공 스님, 그리고 멀리 만주에 가있던 수월 스님이 바로 월(月)자(字)를 가진 3명의 선지식들이었다.

금오 스님은 이미 혜월 스님과 만공 스님의 문하에서는 여러 철 직접 모시고 수행한 적이 있었으나 수월 스님만은 직접 모시고 가르침을 받아본 적이 없었으므로 기어이 수월 스님을 찾아뵙고자 무작정 만주 봉천행 기차에 올랐다.

그런데 당시는 왜놈들의 식민지 치하였으므로 조선국경을 넘어 밖으로 나가려면 출국증명서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도 모른 체 기차를 탔던 것인데, 기차가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진입하자 국경 경비대 경찰이 기차 안으로 들어와, 한 사람 한 사람 출국증명서를 확인하기 시작했고, 출국증명서가 없는 사람은 여지없이 기차에서 끌어내리는 판이었다.

드디어 금오 스님 앞에 이른 경비대 경찰이 금오 스님에게 출국증명서를 제시하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금오 스님은 짊어지고 있던 걸망 안에서 이상한 증명서 한 장을 꺼내 천연덕스럽게 경비대 경찰에게 내밀었다.

그 증명서는 사찰 선원에서 발행한 안거증(安居證)이었는데, 온통 한자(漢字)로만 되어 있는 증명서라 보통 다른 사람이 보아서는 무슨 증명서인지 알아보기가 쉽지 않은 내용이었다.

선지식 찾아 만주까지

그 안거증에는 승명과 하안거를 성만했다는 것을 확인 하는 내용이 한문으로 기록되어 있어서 일본인 경비병이 그 불교용어를 알아먹을 수 없었던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도무지 무슨 증명인지 짐작도 못한 국경경비대원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무슨 증명이냐는 듯 스님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금오 스님은 시치미를 떼고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이거야 말로 나라가 인정하는 제1급 출국증이라오.”
무슨 증명서인지도 알 수 없었던 경비병은 더 이상 대꾸도 못한 체 통과시켜 주었다. 금오 스님의 두둑한 배짱과 전광석화 같은 선기(禪機)가 이처럼 곤경에 처할 경우에는 임기응변 또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두둑한 배짱과 무서운 뚝심과 전광석화 같은 임기응변으로 금오 스님은 저 멀고 먼 북쪽 만주벌판에서부터 맨 남쪽 바다 전라도 보길도에 이르기까지 걸림 없는 당신의 선풍을 드날리고 다녔다.

윤청광(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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