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잿더미서 일어서는 한국불교의 저력

기자명 법보신문
  • 교계
  • 입력 2006.01.04 10:00
  • 댓글 0

희망을 일구는 낙산사 화재 복구 현장

지난해 4월 강한 바람을 타고 시작된 양양 산불은 천년고찰 낙산사를 모두 집어삼키고서야 비로소 그 위세를 잠재웠다. 보물 제479호 동종을 비롯해 전각 21개 동 전소. 거대한 불더미가 할퀴고 간 상처는 ‘참혹함’ 자체였다. 그로부터 9개월. 아직까지 화마의 상처는 곳곳에 역력했지만 자연의 위대한 복원력과 천년고찰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는 불자들의 집념은 천년고찰의 상처를 조금씩 아물게 하고 있었다. 동장군의 위세가 하늘을 찌르는 듯 살을 애는 듯한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는 새해 벽두 양양 낙산사를 찾았다.

폐허같은 적막감 도량 곳곳에

넘실대는 동해의 푸른 물결은 변함없건만 천년고찰을 외호하던 양양 오봉산은 거센 불길이 핥고 간 상처로 민둥산이 돼 있었다. 해수관음상을 향하는 오솔길과 사찰을 둘러싼 울창한 소나무 숲길은 오간데 없고, 융단폭격을 맞은 듯 검게 그을린 나뭇가지들과 여기저기 흩어진 목조 건물의 잔해들이 그 날의 참담했던 상황을 재현하듯 고스란히 놓여 있었다. 기이함마저 느끼게 했던 홍예루 역시 흔적 없이 사라지고, 고풍스런 멋을 한껏 느끼게 해주던 담벽도 불길에 그을려 색조차 검게 변해버린 석축만 남아 있었다.

사방에서 볼 수 있었던 원통보전의 아름다움이 이젠 추억 속으로 사라졌고, 그 자리엔 그 날의 참담한 모습을 생생히 지켜봤을 7층 석탑만이 덩그러니 남아 이방객을 맞았다.

검게 그을린 초목, 전각과 돌들, 원통보전 앞에 외로이 남겨진 범종. 이 모두 감정이야 있을까만 그 엄청난 불바다에 살점을 태우며 겪어야 했을 그들을 떠올리니 가슴 한구석이 저미어 왔다.

비록 불길이 스쳐지나간 의상대와 홍련암도 스산하기는 마찬가지. 해돋이 명소라는 명성은 찾을 길 없고, 아직도 화마의 공포에 질린 듯 피곤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불길이 지나간 낙산사의 흉터는 짐작했던 것보다 끔찍하도록 깊고 넓었다. 발길이 닿는 곳, 눈길 옮기는 곳마다 아름다움이 묻어나던 낙산사의 비경은 온통 타버리고 주저앉은 화상의 흉터들로 가득하기만 했다.

참담하고 비통한 심정으로 경내를 거닐고 있자니, 자연의 위력 앞에 한없이 초라한 인간의 모습이 여실히 와 닿았다. 조금만 주위를 기울였으면 이 엄청난 재앙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밀려들었다.

오봉산 정상에 올라 동해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을 맞으며 침울해진 마음을 가다듬고, 임시 종무소가 마련된 의상교육관에 들어섰다.

폐허나 다름없는 적막감과 쓸쓸함이 느껴지던 경내와는 달리, 낙산사 복원 계획을 마련하느라 분주한 종무소 안은 열기로 가득했다. 찬바람에 얼었던 몸과 마음이 녹아들 쯤 시야에 수십 개의 오색 돼지저금통들이 들어왔다. 낙산사 복원을 위해 문화재지킴이 연합회 소속 어린이들이 자신들의 용돈을 조금씩 모아 보내온 후원금이다. 그 뿐 아니었다. 종무소 한쪽에 걸려있는 후원금 명단에는 초등학생에서부터 70대가 넘은 노보살님들의 이름이 빽빽이 적혀 있었다. 한국기독교연합회 회원들과 양양 천주교회의 명단도 눈에 띄었다. 순간 경내에서 느꼈던 참담함에도 시나브로 입가엔 엷은 미소가 지어졌다.

희망이리라. 비록 우리가 천년고찰 낙산사를 화마로부터 지켜내지는 못했지만 천년 만년 이어질 낙산사를 다시 지으려는 불자들의, 우리 국민들의 바람인 것이다.
다음날 새벽. 서둘러 지난밤 묵었던 숙소를 빠져나와 다시 낙산사 경내에 들어섰다. 안타까웠던 전날과는 달리 오히려 발걸음은 한결 가볍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발끝에서 새롭게 솟아오르려는 생명의 몸부림이 샘솟는다. 뭇 중생의 간절한 소원이 검게 그을린 폐허의 땅에 새 생명을 불어넣고 있다는 믿음 때문이리라. 검게 그을린 고목 사이로 새로운 생명을 만들려는 새순들이 삐쭉 얼굴을 내밀 준비를 하고 있고, 쓰러진 건축물을 다시 일으키려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새벽부터 바쁘다.

타종교인도 복구 동참… 희망 불씨 살려

어느덧 동해가 붉은 빛을 가득 머금었다. 새로운 희망을 열어제끼는 태양이 막 오르는 순간이다. 서둘러 오봉산 언덕을 다시 올라 끝없이 펼쳐진 동해를 바라본다. 멀리 수평선 너머로 희망을 간직한 붉은 태양이 힘차게 솟아오른다. 어둠으로 가려진 세상의 모든 곳을 밝히는 빛의 근원. 페허가 된 원통보전 앞을 쓸쓸히 지키고 서있는 7층 석탑에도 찬란한 빛이 희망의 열기를 불어 넣는다.

이제 새로운 날이 밝았다. 희망의 시작이다. 비록 우리의 가슴에 남아 있던 지난날의 낙산사는 없을지라도 새로운 ‘마음의 고향’을 건설하려는 분주한 움직임은 우리의 후세들이 영원히 간직할 새로운 터전이 되리라. 잿더미에서 생명의 싹을 다시 틔우고 천년고찰이 새로운 위용을 드러내는 그 날, 한국불교의 꺼지지 않는 생명력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것이리라.

양양 낙산사=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
“화합-상생 가득한 도량 만들 터”

- 낙산사 주지 정 념 스님

낙산사 주지 정념〈사진〉 스님은 “화마가 할퀴고 간 상처를 아직 모두 치유하지는 못했지만 불자들이 보내준 작은 정성들이 하나 씩 모여 커다란 희망의 빛으로 살아나고 있다”며 “앞으로 낙산사를 올곧게 복원해 그 동안 불자들이 가지고 있던 상실감과 걱정을 털어버리고 활기차게 다시 낙산사를 찾을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4월 천년고찰 낙산사가 잿더미로 변해 가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며 누구보다 마음 아파했던 정념 스님. 여느 사찰보다 관람객이 많고 또 산중에 있는 사찰이기 때문에 누구보다 산불에 대비해 소화장비를 구축하고, 만일의 사태에 만전을 기했던 스님이기에 안타까움은 더했다. 특히 산불 재발에 대비해 소방헬기를 요청했던 자신의 뜻이 관계당국에서 받아졌다면 지금과 같은 참담함은 없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에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 게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러나 스님은 옳고 그름을 가리기보다 모든 일을 수행이 덜 된 자신의 탓으로 돌렸다. 남을 탓하는 순간 갈등과 반목이 생기고 낙산사 재건은 오히려 멀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무엇보다 시시비비를 가리기 위해 나서는 것은 종교인의 올바른 모습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종교인의 올바른 자세는 사회에서 발생하는 모든 반목과 갈등을 화해와 상생으로 이끌어 줄 의무가 있습니다. 잘잘못을 가리기 보다는 오히려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모아 천년고찰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는 데 힘을 모으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요.”

이 같은 스님의 마음에 관세음보살님이 감흥한 때문일까. 낙산사 화재 이후 어린 아이에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전국의 수많은 불자들이 후원금을 아끼지 않았고, 화재로 잿더미가 된 현장을 방문, 도움의 손길을 보탰으며 이웃 종교인들의 동참도 줄을 잇고 있다. ‘병을 앓았던 사람이 남의 아픔도 안다고 했던가’ 스님은 낙산사 복구에도 부족한 후원금 일부를 이번 화재로 삶의 터전을 잃은 지역 주민들과 함께 나눴다. 또 지역의 불우한 이웃을 위해서도 후원금을 아끼지 않고 지원하고 있다.

정념 스님은 “사찰이 불우한 이웃을 외면한다면 지금 당장 낙산사가 복원된다하더라도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라며 “낙산사의 복원이 잠시 지연되더라도 이웃과 함께 상생하고 서로 화합하는 마음을 배우는 것, 그것이 낙산사를 다시 복원하는 참 뜻”이라고 강조했다.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