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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긷고 나무 하는 게[br]신통묘용이요 불공이라

기자명 법보신문

경주 기림사 주지 종 광 스님

「화엄경」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모든 부처님께서는 무량주를 하시나니 이른바 상주 대비에 주하신다. 모든 불사를 지으심에 주하시며, 평등한 이 뜻으로 정법륜을 굴리는 데 주하시며, 불사의한 일체 불법에 주하시고, 청정한 음성으로 무량한 국토에 두루하심에 주하시며, 말할 수 없는 심심한 법계에 머무르시며 일체 최승 신통을 발현하시는데 주하시며, 필경에는 장애가 없는 법에 주하는 것이니라.”

부처님이 ‘상주 대비에 머무르신다’는 말은 대자대비에 머무르신다는 뜻입니다. 대자대비가 이뤄지는 순간 부처님이 나투신다는 말이므로, 이를 다시 말하면 대자대비를 발현하는 순간 그 당사자는 중생이 아닌 부처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이 누군가를 보살펴주면 여러분들은 중생에서 부처로 전환됐음을 뜻합니다.

집안일도 기도하듯 해야

또 부처님은 ‘가지가지 몸으로 모든 불사를 짓는 것에 머무르신다’했습니다. 우리는 불사 하면 절 짓는 것만 떠올립니다. ‘처처불상’(處處佛像)이라 하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이 계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부처님은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앉아있는 이 자리 앞에는 불상을 모시지 않았습니다.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보궁이기에 모시지 않았습니다. 언뜻 생각하면 불상 대신 사리가 있구나 하고 지나쳐 버릴지 모르지만 실상은 여기에 많은 의미가 함축돼 있습니다. 우리가 늘 보고 말하는 불상에 얽매이지 말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상은 굳이 나무에 새기고 돌에 쪼아야만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실, 여러분들이 불심을 갖고 하는 일 하나하나는 모두 불공입니다. 꼭 통도사에 와서 불공을 드리지 않아도 어디에서나 가능한 일입니다.

좀 쉽게 설명을 올리면 집에서 남편은 남편 부처님, 아들은 아들 부처님, 딸은 딸 부처라 생각하고 예우한다면 그 가정은 어떻겠습니까? 싸울 일이 없겠지요. 그리고 여러분들이 하시는 모든 일을 불공하는 마음으로 한다면 스트레스 받을 일도 없겠지요.

저희들이 모셨던 노(老) 스님들은 청소나 빨래는 꼭 손수 하셨습니다. 곁에서 도와드리려 하면 굉장히 싫어하셨습니다. 그 때 저희들은 ‘어르신 참 유별나시다’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게 아닙니다. 그 어른은 그런 일들을 우리가 경전 보듯이, 또 화두 들 듯이, 기도하듯이 그렇게 하신 것 같습니다. 그 일이 ‘무슨 일이다’ 하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겁니다.

통도사에 와서 부처님께 헌공하는 마음가짐이 일상에서도 그대로 실천한다면 ‘모든 일이 불공’이라 할 수 있는데 저나 여러분들은 이게 쉽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부처님 앞에 와서 기도하고 예배하고 법문 듣고 헌공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평등한 뜻으로 전법륜을 굴린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누구에게나 바른 삶이 어떤 것인지를 늘 설파하셨습니다. 제가 재가불자들에게 늘 아쉬운 생각을 갖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경전을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간혹 듣는 것이 ‘우리 옆집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말을 어찌나 잘 하는지 말로 어떻게 해볼 재간이 없다’그럽니다. 왜그렇습니까? 그 사람들은 자신들의 경전 즉 성전을 열심히 보기 때문에 자신의 종교에 대한 달변이 가능합니다. 우리는 불법이 좋다고 하면서 경전은 보지 않습니다. 한국불교가 흔히 선불교라고 해서 경전을 소홀히 하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개인적으로 그것은 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참선을 하건 기도를 하건 관계없이 우리가 의지할 것은 경전 이외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전법 취약 원인은 경전 소홀

또 한 가지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불도의 길’이 바른 길이라고 확신했다면 자신만 아는데 그치지 말고 이웃에게 전해야 합니다. ‘인연따라 알겠지’하고 지나치는 것은 배려가 아니라 인색함입니다. ‘인연’은 이 때 쓰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전법 역시 경전을 보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솔직히 전법이 약한 이면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경전을 소홀히 한데서 비롯됐다고 봅니다.

그리고 왜 ‘부사의(不思義) 한 일체 불법에 머무르신다’ 했을까요?
우리는 사량분별로 인한 헤아릴 수 없는 번뇌망상을 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번뇌망상 하나하나를 부처님 말씀에 따라 전환만 시키면 바로 그것이 곧 부처님의 공덕이고 위신력이고 신통묘용입니다. 그래서 부사의 한 것입니다. 우리 일상에서 보면 친했던 사람들도 어느 순간 틀어지면 눈꼽만큼도 용서가 안 됩니다. 정말 바늘귀만큼도 용서가 안 됩니다. 마음 한번 옹색해지면 그렇게 됩니다. 그런데 용서와 자비로 풀리면 그 어떤 것도 다 수용합니다. 마음이 좁아지면 바늘귀 하나도 수용 못하지만 마음을 넓히면 그 어떤 것도 담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참으로 오묘한 마음의 작용입니다. 그런 마음을 우리는 갖고 있는 겁니다. 어떤 마음을 쓸 것인가는 여러분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방거사가 쓴 오도송을 보면 ‘신통과 묘용이라는 것은 물 긷고 나무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물 긷고 나무하는 것! 우리가 하는 행위 하나하나가 신통묘용합니다. 더욱이 다른 사람을 위한 실천해동이라 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신통입니다. 여러분들이 홀로 계시는 노인을 위해서 가서 음식을 만들어 드리거나 방 청소를 해주는 것은 거룩한 신통입니다.

화엄경은 조화의 삶 함축

「화엄경」은 어려운 경전이 아닙니다. 어떻게 사람과 사람이 조화롭게 살 것인가. 또 생명과 생명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것인가를 가르치는 경전입니다. 온갖 꽃으로 장식한, 다시말하면 그것은 많은 꽃들이 예쁘게 피어있는 화단처럼 생명의 조화됨을 가르치는 경전입니다. 따라서 오늘 제가 말씀드렸던 신통묘용은 특별한 어떤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의 언어 하나하나, 행위 하나하나, 생각 하나하나가 전부 다 신통묘용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기왕이면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바로 이러한 신통묘용을 통해 안과 밖에 걸림 없는 삶, 바로 그러한 삶에 부처님이 머무르십니다.

부처님께서는 “광장설을 가지고 계셔서 묘한 음성을 내어서 법계에 두루하게 한다” 하셨습니다. 이 얘기는 지금 말씀드린 것처럼 내 말들이 다른 사람을 즐겁게 하고 다른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의 말들은 입 안에 있으면 내 의지를 따릅니다. 그러나 일단 나가 버리면 내 뜻과는 아무 상관없습니다. 자기 멋대로 헤집고 다니면서 타인을 아프게도 하도 고통도 줍니다. 그러니까 항상 가능하면 입 안에 가두어 놓는 것이 좋습니다.

따뜻한 말 한마디가 묘음

이 말씀은 가능하면 덜 말씀하시는 것이 좋다는 것이고 말씀을 하시더라도 사람을 아프게 하거나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말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뜻입니다. 아픔과 고통을 주는 말은 중생의 언어이고, 즐거움과 편안함을 주는 말은 부처님의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 절에 가면 많이 보신 글입니다. 이것도 「화엄경」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성 안내는 그 얼굴이 참다운 공양이구요, 부드러운 말 한마디 미묘한 향이로다.” 특별하고 맛있는 것이 공양거리가 아닙니다. 부드러운 웃음, 따뜻한 말이 공양입니다. 문수보살 게송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부처님의 언어는 모두를 편안케 하는 말이기 때문에 이것을 묘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도 가능하면 부처님의 말씀을 닮아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지금 당장 깨달음을 얻었다는 선언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지금 당장, 어느 정도의 삼매에 들었다는 선언 또한 중요한 게 아닙니다. 여기에 조급하시면 안 됩니다. 이러한 단계에 오르기에 앞서 근본을 튼튼하게 다져야 합니다.

그 근본의 첫 시작은 바로 경전을 펴는 일입니다. 깨달음을 향한 첫 걸음은 경전을 펴는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부산=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이 법문은 지난해 12월 21일 영축총림 통도사 설법전에서 봉행된 통도사 화엄산림 대법회에서 ‘화엄경 수량품’을 주제로 설한 내용을 요약 게재한 것이다.


종광 스님은

종광 스님은 1968년 10월 15일 법주사에서 월산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수지하고, 1971년 5월 15일 해인사에서 고암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1971년 동화사에서 대교과를 졸업한 스님은 1991년 법주사 불교전문강원 강주, 1995년 실상사 화엄학림 강주를 역임했으며 조계종 제 11대, 12대, 13대 중앙종회 의원을 지내고 2003년부터 중앙종회 일승회 회장을 맡고 있다.

1999년부터 조계종 제 11교구 불국사 말사인 경주 기림사 주지를 맡아 경주 지역의 대중 포교에 앞장서 온 스님은 복지불사에 대한 남다른 원력으로 경주시 장애인 종합복지관을 이끌고 있다. 현재 경상북도장애인복지관협회 협회장을 맡고 있으며 학교법인 능인학원 이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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