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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자유론-Ⅴ(끝)

기자명 법보신문

걸림없이 노닐다 간 진정한 풍류인

성스러움은 세속적 삶의 현장과 함께 존재
『기신론』 저술은 진속 집착 해결 위한 방편


<사진설명>「화엄연기회권」 중 원효와 의상이 헤어지는 장면. 무덤에서 해골에 담긴 물을 마신후 원효는 신라로 발길을 돌리고 의상은 당나라를 향해 홀로 떠났다.

우리는 어떻게 이 고통의 현실 세계를 뛰어넘을 수 있을까요. 원효는 “그 어떤 상황에도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 이것이 삼계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무애의 몸짓은 대중 교화를 위한 유희신통(遊戱神通)이기도 합니다. 원효가 “유희신통으로 중생을 교화한다”고 했던 것도 이 때문입니다. 대각국사 의천은 “신통은 헤아리기 어렵고, 묘용은 생각하기 어렵다”고 찬양했습니다. 물론 진실한 마음에 바탕 하지 않은 무애행이란 방종이고, 파계입니다. 그러나 원효의 무애행은 일찍부터 대중 교화를 위한 화광동진(和光同塵)으로 이해되었으니 의천이 “티끌과 어울렸으나 그 진심을 더럽히지 않았고, 빛을 섞었으나 그 본체는 변하지 않았다”라고 했던 것 등이 그 예입니다. 찬녕이 찬술한 『송고승전』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처음 그 자취를 나타냄에 항상 됨이 없었고, 교화 또한 일정하지 않았다. 혹 반을 던져 뭇사람을 구하고 혹 물을 뿜어 불을 끄고, 혹 여러 곳에 모습을 나타내기도 하고, 혹 육방(六方)에 입멸을 알리기도 했다. 역시 배도(盃渡)·지공(誌公)의 무리인가?

찬녕은 원효의 신통을 양나라 때의 고승이자 대단한 신통력의 소유자들인 배도와 지공에 비견하기도 했습니다. 원효는 물을 뿜어서 불을 끄기도 하고, 소반을 던져 대중을 구하기도 했다는 설화가 전합니다. 서당화상비문에 의하면, 당나라의 성선사(聖善寺)에 화재가 난 것을 신라 고선사에 있던 원효가 알고, 서쪽을 향해 물을 뿜어서 불을 껐는데, 고선사의 원효가 거처하던 방 앞에 있는 작은 못은 그때 물을 댄 곳이라고 합니다.

설화에 보이는 원효의 도력은 대단합니다. 그러나 원효 스스로는 인간 이외의 별난 존재를 자처한 일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세상의 길흉을 알거나 기이한 신통을 부려 사람들을 경이롭게 하거나 감동시키는 일 등은 삿된 짓일 뿐 결코 옳지 못한 일이다”라고 했을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통에 얽힌 많은 설화가 유포된 것은, 그의 위대함이 여러 사람들에 의해서 오랜 세월 찬양되고 윤색된 결과일 것입니다. 원효의 대중교화, 그것을 대중의 입장에서 보면 자비의 실천이지만, 원효 자신의 입장에서 보면 행입(行入)의 완성이기도 했습니다.

어떤 종교도 성스러움을 강조하지 않는 경우는 없습니다. 불교도 예외는 아닙니다. 아니 불교만큼 세속적인 것을 부정하고 출세간적인 것을 권유하는 종교도 드물 것입니다. 성(聖)은 분명 종교적 영역에 가까이 있는 개념입니다. 그러나 성스러움은 그 반대 개념인 속됨을 떠나서 따로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엘레아데의 말과 같이, “성과 속은 변증법적 합일의 법칙에 의하여 함께 있는 것”입니다. 신성하다는 것은 세속적인 것의 반대 개념이긴 하지만, 현실적이고 세속적인 인간의 삶을 떠나 홀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불교에서는 성과 속을 흔히 진과 속, 혹은 물듦과 깨끗함 등의 용어로 문제삼곤 했습니다. 혹은 진리의 세계(眞諦)와 세속의 진리(俗諦)로 표현하기도 했다. 한국불교사상 성과 속의 문제를 깊이 있게 논의하고, 둘 사이의 거리를 좁히고, 그 장벽을 허물어 버린 이는 원효입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진속이 원융무애함을 강조했고, 또한 온몸으로 실천했던 무애도인이기 때문입니다. 원효는 세속적인 진리와 출세간적인 진리 사이의 모순에 대한 문제를 깊이 인식하고, 그 모순의 극복을 위한 이론을 제시했습니다. 원효는 「대승기신론」이 진과 속을 별개로 구별하는 잘못된 집착을 다스리기 위한 것이라고 파악했습니다. 그의 이와 같은 해석은 매우 의미 있는 것입니다. 이를 토대로 그의 진속원융무애관이 형성되고 실천의 원리가 제공되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대승, 광활하기 마치 허공과 같아 사사로움이 없고, 큰 바다와 같아 지극히 공평하다. 지극히 공평 하기에 움직임(動)과 고요함(靜)이 이루어지며, 사사로움이 없기에 염과 정이 하나가 되고, 염과 정이 원융한 까닭에 진속이 평등하다.

이것은 원효가 「대승기신론별기」에서 밝힌 것이다. 또한 그는 맑고 흐린 일체의 법은 본성이 둘이 아니며, 참되고 거짓된 진망(眞妄)의 두 길이 다른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삼공(三空)의 바다는 진과 속을 원융하여 맑다. 맑기 때문에 둘을 융화해도 하나가 아니다. 하나가 아니면서 둘을 융통하였으므로, 진이 아닌 리(理)도 비로소 속이 되지 않고, 속이 아닌 리도 비로소 진이 되지 않는 것이다. 두 가지를 융통하여도 하나가 아닌 때문에 진과 속의 성이 성립되지 않음이 없고, 염정의 상(相)이 갖추어지지 않음이 없다.

「금강삼매경론」의 대의를 밝히는 중에서 한 말이다. 이같은 이론을 토대로 원효는 “무리지지리 불연지대연(無理之至理 不然之大然)”이라는 명언을 토로했습니다. 이것은 대명언입니다. 원효의 저서 중에 이 말이 서너번 나오는데, 원효가 결론을 맺을 때 이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치 없는 지극한 이치, 옳지 않은 것의 크게 옳음” 정도로 이 구절을 옮겨 보아도 그 진정한 의미는 잘 전달되지 않습니다. 그가 말하는 지극한 도리[至理], 크게 옳음[大然]」은 단순히 무리(無理)에 대한 리(理), 대연(不然)에 대한 연(然) 정도의 것이 아닙니다. 상대적 개념을 떠난 대전환과 대긍정의 입장에서 한 말이라고 이해됩니다. 진과 속이 원융하다고 해서 그것이 술에 술탄 듯 물에 물 탄 듯한 것은 아닙니다. 결코 비빔밥 정도로 이해될 성질의 것은 못 됩니다. 진과 속을 원융해도 그것이 곧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진속, 혹은 염정 등이 갖추어진다고 한 원효의 말이 곧 이를 설명해 줍니다.

불교에서는 처음부터 유무, 진속 등의 이원론적 사고의 병폐를 지적하고 있었지만, 특히 원효는 진과 속이 원융하고 무애함을 강조하면서 세속적인 진리와 출세간적인 진리가 따로 존재하지 않음을 밝혔습니다. 원효에 의하면, 진속(眞俗), 염정(染淨)을 분별하여 진에 종교적인 가치를 인정하는 것은 이미 속제(俗諦)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진실이란 것에까지도 집착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원효는 옛 사람의 말을 인용하여 선까지도 행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옛날에 현인이 그 아들을 훈계하여 “삼가 선을 행하지 말도록 하라”고 했다. 이에 그 아들은 “마땅히 악을 행하라는 말입니까”하고 물었다. 그 아버지가 다시 말하기를, “선도 행하지 말아야 하거늘 하물며 악을 행하란 말이겠느냐”고 했다.

원효가 인용했던 현인의 말은 『육조단경』의 “선도 생각지 말고 악도 생각지 말라”고 했던 구절을 상기시킵니다. 출세간적인 진리도 집착할 것이 못 되는데, 하물며 세속적인 진리야 말해서 무엇하겠습니까? 아니 진속을 분별하는 것부터가 이미 잘못된 것이다. 엘레아데는 말했습니다. “종교적인 요소는 비종교적인 요소들과 함께 하나의 현상이 되고 있는 것이지 순수한 종교의 독자적인 존재란 불가능한 것”이라고. 종교적인 요소가 성이라면, 비종교적인 요소는 곧 속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이 애써 추구하고자 하는 진리, 도, 그리고 성스러움은 가장 현실적이고 세속적인 삶의 현장과 더불어 있는 것입니다.

원효는 발심(發心)과 참회(懺悔)와 지관(止觀)의 수행 등 대승보살의 실천수행(實踐修行)에 대하여 깊이 있게 논의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런 것들을 알거나 좋아하는 단계를 뛰어 넘어 즐기던 사람입니다. 이입(理入)을 지나 행입(行入)의 경지에까지 이르렀기 때문이고, 온 몸으로 실천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효는 언제나 초월을 꿈꾸었고, 실제로 그 어떤 현실에도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초월과 자유의 경지를 그는 초출방외(超出方外)라고 표현했습니다.

원효가 살았던 7세기 신라 사회에는 풍류정신이 크게 영향을 주고 있었습니다. 화랑도는 말할 것도 없고, 승려들 중에도 풍류도에 관계하거나 이를 수행하는 경우가 적지 않을 정도로 풍류정신은 시대정신이었습니다. 원효가 화랑이나 낭도였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나 원효는 누구보다도 호방불기(豪放不羈)한 풍류인이었습니다. 화랑도의 풍류도 수행은 놀이[遊]적 성격이 강했고, 법계(法界)에 유행(遊行)하기를 염원하던 원효의 무애행도 유희적인 것이었습니다.

칼 야스퍼스가 “이 세상에 살되 이 세상에 사는 것처럼 살지 말라”고 말하기 오래 전부터 불교에서는 처염상정(處染常淨)의 묘법(妙法)을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원효는 혼란의 시대를 열심히 살았지만, 그 현실 속에 함몰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언제나 방외(方外)로의 초월(超越)을 꿈꾸었고, 실제로 흥겹고 신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노래했습니다. “두 편견 멀리 떠나 모든 죄 소멸하고, 한 맛의 평등한 진리 방외에서 놀리라(遠離二邊滅諸罪 等飡一味遊方外)”고. 부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집착하지 않음으로써 초월하게 되고, 초월함으로써 해방되는 것이다.”

정리=탁효정 기자 takhj@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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