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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심판과 무의식의 공업(共業)

기자명 법보신문
무의식적으로 어떤 공업에 젖어 있나
인식하게 하는것이 이 시대의 급선무


한국정신문화의 한 특징은 대단히 명분적이라는 것이다. 주자학적 정신문화가 낳은 업보겠다. 모든 가치론은 동시에 반(反)가치적인 어둠을 동반한다. 예컨대 선은 필연적으로 위선을 낳고, 정의는 편협한 마음으로 세상을 단죄하는 진노심을 낳고, 용기는 거칠은 만행을 낳고, 정직은 주위사람들을 숨막히게 하는 경직성을 낳고, 예의는 필연적으로 번례(煩禮)의 형식적 낭비를 빚는다.

우리는 그 동안 도덕적 선의지가 좋은 점만을 낳고, 나쁜 면과는 동거하지 않는다는 단순 도덕주의에 오랫동안 물들어 왔었다. 이것도 주자학적 도덕주의의 교조성이 낳은 결과겠다.

사람들은 현재 한국의 반도덕적 문화의 범람은 도덕교육의 강화로 청소되어야 한다고 외친다. 도덕성의 강화는 어느 정도 반도덕적 문화의 창궐을 다소 지연시키는데 일조할 수는 있겠지만, 사회를 실질적으로 좋게 바꾸는 일에는 아주 미흡하다.

명분적 정신문화에도 좋은 점이 있고, 반드시 그 부작용도 생긴다. 그 좋은 점은 일찍이 공자가 말한 바와 같이 명실(名實)이 상부하는 문화, 즉 아버지는 아버지답게, 대통령은 대통령답게 그 명칭에 걸맞는 내용을 채우는 그런 문화를 일구는데 있다 하겠다. 그 부작용은 명분이 사회를 좋은 이름에 알맞는 방향으로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채우는 일을 중시하는 역할을 하기 보다, 사회를 지배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인 정당성의 구실을 형식적으로 장악하기 위한 용도로 쓰이는 경우를 일컫는다 하겠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실질적인 내용을 조용히 채워나가는 변화보다 오히려 명분으로 상대방과 투쟁하여 승부하려는 그런 일에 열을 올리기 때문에, 실질에서 쉽게 합의 할 수 있는 사항도 명분 때문에 뒤틀려 이 땅의 정치문화가 우리를 늘 피곤케 한다.

그래서 무슨 도덕적 명분의 이름으로 사회가 쉽게 일희일비하면서 흥분하고 떠든다. 그런 가운데 늘 실질적 공동이익은 홧김에 공중에 날려보낸다. 이것이 쌓이면 무의식의 업보를 이룬다.

우리나라가 불국토에 가까워지기 위하여 지성인들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뻔한 선의 당위적 가치를 또 역설하는 대신에, 우리가 우리를 서로 도와주고 서로 잘한다고 긍정해주고, 잘난 척 하지 않고 젠 채 하지 않으면서 서로서로 격려하고 인정해 주는 그런 정신문화를 방해하는 우리의 무의식에 쌓인 공동업장이 무엇인가 깨닫게 하는 것이 더 귀중하리라 여겨진다.

지성인들은 무슨 선의 화신인 양 사회를 심판하겠다고 판결문을 낭독하지 말고, 우리 모두가 모르는 사이에 무의식적으로 어떤 역사적 공동업장에 젖어 있는지 알게 하는 것이 급선무일 것 같다. 부처님이 무명을 가장 경계하라고 일렀다. 무명은 캄캄해서 모른다는 것이다.

무명에서 벗어나서 아는 것이 곧 해방이다. 정신병도 자기의 과거를 아는 데서 해방의 길이 열린다. 우리도 우리의 공동업장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공동으로 아는 그 순간이 곧 우리가 지금의 잘난 체 하는 병에서 해방될 것이다. 알아야 공동참회가 가능하다. 모두 아끼는 것이 가리는 것보다 더 낫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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