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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를 타고 소를 찾으니 참으로 우습구나

기자명 법보신문

곡성 태안사 일 오 스님

이 몸이 나기 전에 그 무엇이 내 몸이며 (未生之前誰是我)
세상에 태어난 뒤 내가 과연 누구인가. (我生之後我是誰)
자라나 사람 노릇 잠깐 동안 내라 더니 (長大成人裳是我)
눈 한 번 감은 뒤에 내가 또한 누구던가. (合眼朦朧又是誰)

중국 청나라 세 번째 황제인 순치황제가 출가하며 세상에 내 보인 게송 중 일부입니다. 이른바 ‘순치황제의 출가시’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부모미생전 본래면목(父母未生前 本來面目)을 떠올리게 하는 게송입니다.

오온경계에만 집착

우리는 어머니 태중을 빌려 이 세상에 나왔지만 그 전에는 누가 나였겠습니까? 인연을 다해 죽음에 임박했을 때 그 때의 나는 누구입니까?‘이 뭣고’화두와 함께 순치 황제의 게송에 담긴 의미를 하나씩 맛보고자 합니다.

모든 중생들이 이 생 한번 멋지게 잘 살아보겠다며 삶의 터전을 가꾸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순간순간 우리의 터전을 방해하거나 파괴하는 요소들이 밀려옵니다. 우리의 편리를 위해 자동차를 만들어 사용하고 있지만 언제 사고가 발생할지 아무도 모릅니다. 자동차 뿐입니까? 배와 기차, 비행기 등도 우리 삶의 풍족을 위해 사용하고 있지만 사고로 인해 생을 마감해야 하는 일이 매일매일 벌어지고 있습니다. 지진이나 해일은 한 순간에 뭇 생명을 앗아가고 있습니다.

지금의 우리 자신을 들여다 보세요. 우리는 어떤 즐거움을 택하고 있습니까? 눈과 귀와 입을 즐겁게 해 주는 것에만 관심 있지 않습니까? 그에 대한 열정은 너무나 뜨겁습니다. 오온(五蘊) 경계에 딱 걸려 옴짝달싹 못 하고 있습니다. 오온이라는 속박의 사슬에 매여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사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적어도 오온의 속박 사슬에 매어있다는 것만은 알고 계시니 복 많이 받으신 분들입니다. 다만 아직도 그 사슬을 끊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 사슬을 끊어 보려 화두를 들지만 말이 쉽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저는 군에 입대하기 전 절집에 들어가 화두를 들었습니다. 그 때 “참선해 깨우치면 그만이니 글 배울 필요는 없다”는 말에 교학 공부를 게을리 했습니다. 당시 배운 것이라곤 ‘초발심자경문’하나였는데 솔직히 그 때 저 자신도 이 경문 하나 믿고 밀고 나가면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 보건데 참 어리석었다는 생각입니다. 솔직히 사람 근기에 따라 다르겠지만 저 경우에는 교학을 처음부터 멀리하고 참선에만 매진했더니 한계에 부딪혔습니다. 부처님 말씀의 뜻을 좀 더 깊게 새긴 후 참선정진 했다면 더 큰 성과가 있었을 것입니다. 한계에 부딪혔을 때 ‘이래서는 안 되겠다’싶어 경을 보았는데 그 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최근에는 스님들은 물론 재가불자 분들도 교리를 중심으로 한 교학 기초에 심신을 다하고 있는 듯 해 참으로 다행스럽습니다.

그렇다고 팔만대장경을 어느 세월에 다 보겠습니까? 그러니 최소한 부처님이 말씀하신 핵심만은 바로 알아야 합니다. 부처님 말씀 핵심은 바로 삼법인(三法印) 즉,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일체개고(一切皆苦)입니다. 물론 대승불교권에서는 ‘일체개고’ 대신 ‘열반적정’(涅槃寂靜)이라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일체개고’를 포함하는 것이 더 좋을듯 합니다. 왜냐하면 ‘열반적정’은 깨달은 후의 본상입니다. 부처님은 오후(悟後) 본상에 무게를 두기 보다는 어떻게 하면 중생들이 오온의 경계에서 벗어나 깨달을 수 있을까 하는데 역점을 두셨습니다. 따라서 삼법인에는 오후 본상인 ‘열반적정’ 보다는 ‘일체개고’를 포함시켜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는 오온과 더불어 육근육식을 통해 일어나는 것을 두고 ‘내 마음’이요 ‘나’라고 합니다. 문제는 이 속박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어떻게 벗어나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슬의 자물쇠를 풀 열쇠는 바로 ‘연기’입니다. 삼법인을 관통하는 도리가 연기이기 때문입니다.

연기는 삼법인을 관통

‘나’라고 집착하는 이 몸도 연기에 따라 생겨나 연기에 따라 사라집니다. 온 세상의 우주 만물이 연기에 의해 생하고 연기에 의해 멸합니다. 순간순간 찰나찰나에 생멸이 오고갑니다. 연기를 알면 무상을 알고 무상을 알면 고의 실체를 알아 마침내 그 고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텅텅 비우라 하는 것입니다. 이 비움은 허상으로 가득한 우리 자신을 똑바로 보라는 말입니다. 텅텅 비운 속에서 ‘참 나’를 찾으라고 옛 조사님들은 그토록 간절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나를 찾으려 하면 볼 수 없고, 찾지 않으려 하면 영원히 잃어버린다”했습니다.

서산 스님의 제자 소요(逍遙) 스님은 어느 날 스승에게 “이제 나 자신을 찾기 위해 다른 곳으로 가 공부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서산 스님은 글이 담긴 책 하나를 주었습니다. 그 책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림자 없는 나무를 베어다가
(斫來無影樹)
물 가운데 거품을 태워 다할지니라.
(憔盡水中, 憔盡海上)
가히 우습다 소를 찾는 사람이여
(可笑尋牛者,可笑騎牛者)
소를 타고 다시 소를 찾는구나.
(騎牛更覓牛)

이 부분을 참구하고 참구해 보았으나 알 도리가 없었습니다. 결국 소요 스님은 다시 서산 스님을 찾았습니다. 이 때 서산 스님이 말했습니다. “우습구나! 소를 타고 소를 찾는구나.” 이에 소요 스님은 확철대오 했습니다.

소요 스님은 자신을 찾으려 사방을 헤맸지만 찾지 못했습니다. 서산 스님의 말씀처럼 이미 자신 안에 갖추고 있음에도 보지 못해 찾지 못한 것인데 엉뚱한 곳에서 자신을 찾으려 하니 볼 수 없었던 겁니다.

‘본래부처’지만 무명에 가려 보지 못할 뿐이라 했습니다. 문제는 그 무명을 걷는 노력, 그리고 그 무명을 어떻게 거둘 것인가만 남아있는 겁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연기를 보는 사람 법을 보고, 여래를 보고, 나를 볼 것이다.”
연기를 통해 무아를 보고, 고를 보고, 무상을 보면 본래 자리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를 확고히 믿으셔야 합니다.

부설 거사의 열반송에 잠시 귀를 기울여 봅시다.

눈으로 보는 바 없으니 분별이 없고
(目無所見無分別)
귀로 듣는 소리 없으니 시비가 끊어졌다.
(耳聽無聲絶是非)
분별 시비를 모두 놓아 버리니
(分別是非都放下)
다만 심불이 스스로 귀의함을 보도다.
(但看心佛子歸依)

육근육식에 따라서만 만물을 보려 하니 시비가 끊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 육근육식이 모두 허구인 줄 알면 시비도 끊을 수 있고 그 시비가 끊긴 자리에 탐진치가 설리 만무합니다. 선지식의 한 마디에 이 도리를 알면 되는데 그렇지 못하니 화두를 들고 정진하는 것입니다.

화두는 생생하게 살아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화두가 생생히 살아 삼매에 들어야 참 공부를 한 것입니다. 다만 “화두 든 것도 잊어라”하는 말에 노파심으로 한 말씀 더 드리겠습니다.

화두 든 것도 잊어라?

그러나 초심자는 화두가 생생히 살아 있도록 애쓰고 애써야 합니다. 그래서 옛 조사 스님들이 “모든 것을 버려도 화두는 버리지 말라”당부 하신 겁니다. 앉으나 서나, 자나 깨나 화두가 살아 있도록 해야 하니 처음에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야 하겠습니까?

“현 시대에 화두 드는 것은 너무 어렵다”는 말 많이 합니다. 맞습니다. 화두 참구는 어려운 공부입니다. 평생을 목숨 바쳐 해도 끝나지 않는 공부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어렵습니다. 그러나 발심을 더욱 돈독히 해 보십시오. 최선의 발심을 하고도 안 된다 싶으면 그 때 다른 수행법을 찾아 보십시오. 이 생에 확철대오 못한다 해도 다음 생을 준비하는데는 충분합니다. 누구도 다음 생을 기약할 수 없습니다. 이 생에서 화두 참구하며 연기를 체득하는 순간 여러분은 이미 큰 공덕을 준비하신 겁니다. 초발심을 다시 한 번 더욱 굳건히 해 보시기 바랍니다.

채한기 기자 penshoot@beopbo.com

이 법문은 일오 스님이 3월 19일 봉은사에서 봉행된 ‘선원장 초청법회’에서 설한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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