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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암 4번 깨달아… 오도송 퇴짜 맞기도

  • 교학
  • 입력 2006.04.04 13:00
  • 수정 2020.05.29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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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창화 씨, ‘일생패궐’ 연구 논문서 밝혀
“스님 수행-오도과정 나타난 귀중한 자료”

조계종 초대 종정을 역임했던 한암 스님의 자전적 구도기인 ‘일생패궐(一生敗闕)’을 처음으로 번역해 이를 분석한 논문이 발표돼 주목받고 있다.

민족사 대표 윤창화〈사진〉 씨는 오는 4월 24일 오대산 월정사에서 개최되는 ‘한암 대종사 선사상 학술세미나’에 앞서 발표된 「(신자료)한암의 자전적 구도기 ‘일생패궐’」라는 논문을 통해 “최근에 발견된 ‘일생패궐’은 한암 스님의 생애와 사상, 수행과정, 오도(悟道)과정 등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며 “특히 한암 스님의 구도과정과 생애를 과장된 영웅담이 아닌 수행자의 구도 과정을 솔직히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자료가 지니는 가치는 매우 높다”고 강조했다.

‘일생패궐’은 한암 스님의 생애와 사상, 오도 과정 등을 자서전 형식으로 적은 것으로 폭 20cm, 길이 120cm의 순 한지(漢紙)에 만년필로 씌여진 두루마리 본이다. 글씨 서체로 보아 한암 스님의 수제자인 탄허 스님이 기록한 것으로 보이는 이 자료는 한암 스님이 구술하고 탄허 스님이 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 이 자료는 한암 스님의 제자였던 보문 스님이 간직하고 있었던 것으로 당시 보문 스님을 모셨던 초우 스님(전 통도사 주지)이 지난 2001년 월정사 주지로 있던 현해 스님에게 기증하면서 세상에 공개됐다.

‘일생패궐’에 의하면 한암 스님은 보조 지눌의 『수심결』을 읽다가 교학에서 선으로 전향했고, 발심한 이후 모두 4차에 걸친 오도 과정을 체험했다. 청암사 수도암에서 경허 스님이 설한 『금강경』의 경구를 듣고서 처음으로 개오(開悟)를 경험했으며 이후 통도사 백운암에서 수도하던 중 입선을 알리는 죽비 소리를 듣고 또 다시 크게 깨달았다. 또 해인사에서 하안거를 지낸 뒤 『전등록』의 약산화상과 석두화상의 대화 중에 ‘한 물건도 작용하지 않는다’는 대목에서 또 한번 크게 깨달았고, 나이 37세 되던 해인 1912년 우두암에서 겨울을 지내던 중 어느 날 부엌에서 아궁이에 불을 붙이다가 불현듯 확철대오를 경험했다.

이처럼 한암 스님의 4차례에 걸친 개오는 그 동안 3차례에 걸쳐 깨달았다고 알려진 것과는 다른 새로운 사실이라는 점에서 관심을 끈다.

그러나 한암 스님도 단박에 확철대오의 경지에 이르지는 못했다. 스님은 ‘일생패궐’에서 자신의 공부가 아직 미치지 못해 스승 경허 스님으로부터 지적을 받았던 일화를 솔직히 소개했다. 즉 “(경허)화상께서 하안거 해제일 법상에 올라 대중들을 돌아보시면서 말씀하시길 한암 중원의 공부가 개심(開心)의 경지를 넘었도다. 하지만 아직은 무엇이 체(體)고 무엇이 용(用)인지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는 대부분의 선사들이 수행담이나 오도담을 지나치게 과장시키는 것과는 달리 수행자의 인간적인 면모를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윤창화 씨는 “상당한 선사들이 자의든 타의든 정직한 수행담이나 오도담을 남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나치게 과장, 픽션화된 이야기를 남기고 있다”며 “이로 인해 이를 읽고 참구하는 상당한 수행자들이 환상을 추구하다가 허송세월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라고 지적했다. 따라서 윤 씨는 “오늘날 깨달음을 추구하는 수행자들도 한암 스님의 이 글을 통해 ‘혹시 자신이 걸어가고 있는 길이나 방향, 방법이 잘못된 것은 아닌가?’, 또는 ‘추구하는 세계가 환상의 막에 가려있는 것은 아닌가?’에 대해 진솔한 의문사를 던져보아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한편, 오는 4월 24일 월정사에서 개최되는 학술세미나에서는 중앙승가대 총장 종범 스님의 ‘한암 선사의 선사상’, 동국대 김호성 교수의 ‘한암 선사의 수행론’, 부천대 김광식 교수의 ‘조계종의 성립과 초대종정 한암 선사’ 등의 논문이 발표될 예정이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사진설명>한암 스님의 생애와 사상, 수행 및 구도 과정이 생생히 기록된 ‘일생패궐’.

아궁이 불 때다가 ‘아!’… 확철대오

‘일생패궐’ 번역문 전문

△내가 스물네 살 되던 기해년(己亥年 1899) 7월 어느 날 금강산 신계사 普雲講會(보운강원)에서 우연히 보조국사의 「수심결(修心訣)」을 읽다가, “만약 마음 밖에 따로 부처가 있고 성품 밖에 법이 있다는 생각에 굳게 집착하여 불도를 구하고자 한다면, 비록 티끌과 같은 세월(劫) 동안 몸과 팔을 태우며 운운(云云), 내지 모든 경전(經典)을 줄줄 읽고 갖가지 고행을 닦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마치 모래를 쪄서 밥을 짓는 것과 같아서 한갓 수고로움만 더할 뿐이다.”는 대목에 이르러, 나도 모르게 몸과 마음이 떨리면서 마치 커다란 후회를 맞이하는 듯 했다.

△게다가 장안사 해은암(海恩庵)이 하룻밤 사이에 전소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더욱 더 무상(無常)한 것이 마치 타오르는 불과 같아서 모든 계획이 다 몽환(夢幻)과 같이 느껴졌다.

△(신계사 강원에서) 하안거를 마친 뒤 도반 함해 선사(含海 禪師)와 함께 짐을 꾸려 행각 길에 올라 점점 남쪽으로 내려가 성주 청암사 수도암에 도착하여, 경허 화상께서 설하시는 『금강경』설법 중 “무릇 모습을 갖고 있는 것은 다 허망한 것이다. 만일 모든 형상이 허상임을 간파한다면 (그대는) 곧 바로 여래(如來)를 볼 수 있을 것이다.”는 대목에 이르러 문득 안광(眼光)이 확 열리면서 삼천대천세계를 덮어 다하니, 만나는 것마다 모두가 다 자기 아님에 없었다(한암의 첫 번째 깨달음, 1899년 가을).

△(수도암에서) 하룻밤을 묵고 나서 (다음 날) 경허화상을 따라 합천 해인사로 가는 도중에 (문득 화상께서) 나에게 물으셨다.

“고인(古人)이 이르기를 ‘사람이 다리 위를 지나가네. 다리가 흐르고 물은 흐르지 않네.’ 이것이 무슨 뜻인지 아는가?”

내가 답하였다.
“물은 진(眞)이요, 다리는 망(妄)입니다. 망(妄)은 흘러도 진(眞)은 흐르지 않습니다.”

경허화상께서 말씀하셨다.
“이치로 보면 참으로 그렇지만, 그러나 물은 밤낮으로 흘러도 흐르지 않는 이치가 있고 다리는 밤낮으로 서 있어도 서 있지 않는 이치가 있는 것이네.”
내가 다시 여쭈었다.

“일체 만물은 다 시작과 끝, 본(本)과 말(末)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 본래 마음은 탁 트여서 시종(始終)과 본말(本末)이 없습니다. 그 이치가 결국은 어떠한 것입니까?”

경허화상께서 답하셨다.
“그것이 바로 원각경계(圓覺境界)이네. 『경(經)』에 이르기를 ‘사유심(思惟心)’으로 여래(如來)의 원각경계를 헤아리고자 한다면 그것은 마치 반딧불로써 수미산을 태우려고 하는 것과 같아서 끝내는 태울 수 없다’고 하였네.”
내가 또 여쭈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만 (여래의 원각경계로) 들어갈 수(깨달을 수) 있습니까”
“화두를 들어서 계속 참구해 가면 끝내는 (원각경계로) 들어갈 수(깨달을 수) 있게 되는 것이네.”

“만약 화두도 망(妄)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화두도 망(妄)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것은 곧 (화두 참구가) 잘못된 것(失脚)이므로 그 자리에서 즉시 ‘무(無)’자 화두를 참구하게.”

△해인사 강원에서 동안거를 보내고 있던 중 하루는 게송을 하나 지었다.
“다리(脚) 밑에는 푸른 하늘이요 머리 위에는 땅이 있네.
쾌활한 남아(男兒)가 여기 이른다면
절름발이도 걷고 눈먼 자도 볼 수 있으리
북산(北山)은 말없이 남산(南山)을 마주하고 있네.”

경허화상께서 이 게송을 보시고는 웃으시면서 말씀하셨다.
“‘각하청천(脚下靑天)과 북산무어(北山無語)’ 이 두 구(句)는 맞지만 ‘쾌활남아(快活男兒)와 파자능행(跛者能行) 구(句)는 틀렸다.”고 하시었다.

△(해인사에서) 동안거를 지낸 뒤 화상께서는 통도사, 범어사 등으로 떠나셨지만, 나는 그대로 남아 있다가 우연히 병에 걸려 거의 죽을 뻔하다가 살아낫다. (해인사에서) 하안거를 마치고 곧바로 만행 길에 올라 통도사 백운암에 이르러 몇 달 있던 중 하루는 입선을 알리는 죽비 소리를 듣고 또다시 개오처가 있었다.(한암의 두 번째 깨달음).

△(그 뒤) 동행하는 스님에게 이끌려 범어사 안양암에서 겨울을 지내고 다음 해 봄에 다시 백운암으로 돌아와 하안거를 보내고 있었다. 당시 경허화상께서는 청암사 조실로 계셨는데, 급히 편지를 보내 나를 부르셨다. 나는 행장을 꾸려 가지고 청암사로 가서 화상을 뵈었다. 청암사에서 하안거를 지낸 다음 가을에 다시 해인사 선원으로 왔다. 계묘년(1903) 여름, 사중(해인사)으로부터 화상을 (조실로) 모시고자 청하였다. 그 때 화상께서는 범어사에 계시다가 해인사 선원으로 오시어 선원 대중 20여 명과 함께 하안거 결제를 하셨다.

△하루는 (대중들과 함께) 차를 마시던 중 어떤 수좌가『선요(禪要)』에 있는 구절을 가지고 경허화상에게 여쭈었다.

“(고봉화상의 『선요』에 보면) 어떤 것이 진정으로 참구하는 것이며, 진정으로 깨닫는 소식인고? 답하기를 남산(南山)에서 구름이 일어나니 북산(北山)에서는 비가 내리도다.” 이런 말이 있는데, 묻겠습니다만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화상께서 말씀하셨다.

“비유한다면 그것은 마치 자벌레가 한 자를 갈 때 (완전히) 한 바퀴 굴러야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하시고는 대중들에게 “이것이 무슨 도리인고?”하고 물으셨다.

내가 답하였다.
“창문을 열고 앉으니 담장이 앞에 있습니다.”

화상께서 다음 날(하안거 해제일) 법상에 올라 대중들을 돌아보시면서 말씀하셨다.

“원선화(漢岩 重遠)의 공부가 개심(開心)의 경지를 넘었도다. 하지만 아직은 무엇이 체(體)고 무엇이 용(用)인지 잘 모르고 있다.”

이어 동산(洞山)화상의 법어를 인용하여 설하시기를,
“늦여름 초가을 사형사제들이 각자 흩어져 떠나되 (곧바로) 일 만 리 풀 한 포기도 없는 곳으로 가라고 했지만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겠노라. 나라면 ‘늦여름 초가을 사형사제들이 각각 흩어져 떠나거든 길 위의 잡초를 밟고 가야만 비로소 옳다’고 말하리니, 나의 이 말이 동산의 말과 같은가 다른가?”

선-교 겸비한 오대산의 ‘학’

한암 스님은

한암 스님은 수행을 ‘소치는 구도행’이라고 비유하며 ‘돈오점수’를 설파했던 근대 대표적인 고승이다.

1876년 강원도 화천에서 태어난 한암 스님은 22세가 되던 해 삶의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오직 수행이라는 결론을 내고 출가를 결심했다. 금강산 장안사(長安寺)에서 수도를 시작한 스님은 이후 청암사 수도암에서 경허 스님을 만나 설법을 듣고 전법제자가 돼 수년간 문하에서 참선 공부를 했다.

1925년 봉은사 조실을 맡았으며 1941년 조계종 출범과 함께 초대 종정으로 추대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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