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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해안 스님(1901-1974) 끝

기자명 법보신문

선-교 능통한 대선사

불교전등회 회주 역임
출가 2년 만에 견성
『금강경』이해 독보적 수준
차별 없는 가르침에 헌신


“선교(禪敎)에 두루 조예가 깊은 걸출한 선지식”이라는 대한 불교 진흥원 이사장 서돈각 박사의 회고처럼 해안 스님은 선과 교에 통달한 대선사로 알려져 있다. 출가 2년만에 견성의 경지에 올랐지만, 스님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끊임없이 정진해 『금강경』에도 통달했기 때문이다. 스님은 평소 일하기를 즐기고 옷도 늘 간편하게 입을 수 있도록 개량하는 등 소박하고 근검한 일생을 보냈지만 ‘절은 전쟁터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는 스님의 말처럼 그 자신의 일상은 늘 치열함이 배어 있었다.

1901년 전북 부안에서 태어난 해안 스님은 어린 시절부터 한학을 두루 익혀 뛰어난 조예를 보였다. 붓 장수로부터 전해들은 한학자 고찬(高讚)선생을 찾아 변산의 내소사에 왔다가 만허 화상을 은사로 불연을 맺게 된 해안 스님은 3년 후 백양사에서 만암 화상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고 치열한 구도의 길로 접어든다.

1918년 성도절(成道節), 백양사 학림에서 학명 선사로부터 받은 ‘은산철벽을 뚫으라’는 화두를 들고 7일 용맹정진에 몰두하던 해안 스님은 불연을 맺은지 4년 만에 혜안이 열리는 경험을 한다. 하지만 해안 스님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동국대의 전신인 불교 중앙 학림에서 현대적인 불교교육을 받았고 만주로 건너가 중국의 선풍을 경험하는 등 정진을 거듭했다.

해안 스님은 자신의 절차탁마뿐 아니라 문맹 퇴치 운동 등 타인을 위한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미취학 아동과 무학자 등 가진 것이 없어 배우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1931년 내소사 앞 입암리 마을에 계명학원(啓明學院)을 설립하고 배움의 기회를 주고자 노력했던 사실에서 스님의 그런 노력들을 읽을 수 있다.

환갑이 되던 해, 60세까지의 삶을 매듭짓고 다시 태어났다는 각오로 수행에만 전념하기 위해 가상여(假喪輿)를 만들고 실제인양 자신의 장례식을 거행한 사건은 치열했던 스님의 구도정신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자 왜 그토록 많은 이들이 스님을 추앙했는지를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어릴 적부터 한학을 연마했기에 스님은 선뿐만 아니라 교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중에서도 『금강경』에 대한 이해는 독보적인 수준으로 아직까지도 스님의『금강경』주석은 많은 이들에게 『금강경』의 이해를 위한 필독서로 손꼽히고 있다.
해안 스님은 재가 신도들에게도 차별 없는 가르침을 전했기에 그의 주변으로 많은 재가 불자들이 모여들었다. 1969년 4월, 스님을 따르던 불자들을 중심으로 불교전등회(佛敎傳燈會)를 조직하고 매 계절마다 정진법회를 개최하자 해안 스님은 기꺼이 이 모임의 회주가 되어 성심 성의껏 이들을 지도하기도 했다.

해안 스님은 1974년 불교전등회 창립 4주년 법회에서 자신의 임종이 가까웠음을 알린지 이틀 뒤 그의 안부를 묻기 위해 찾아온 이들에게 “나 오늘 갈란다”라는 말을 남기고 세수 74세로 입적했다.

정하중 기자 raubone@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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