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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림당 대용 선사 49재 봉행

기자명 법보신문
  • 교계
  • 입력 2006.06.07 17:37
  • 댓글 0

6일 향천사 천불선원서…사부대중 200여명 참석

“나고 죽음이 둘이 아님을 늘 강조하셨던 스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용맹정진 하겠습니다.”

지난 4월 19일 입적한 향림당 대용 선사의 49재가 6월 6일 충남 예산 향천사에서 봉행됐다. 천불선원(선원장 옹산 스님)선덕을 역임했던 대용 스님의 49재는 의식을 알리는 타종을 시작으로 삼귀의, 헌향, 헌다, 행장 소개, 추도사 등의 식순으로 진행됐으며 이 자리에는 조계종 호계원장 월서 스님, 덕숭총림 수좌 설정 스님, 수덕사 주지 법정 스님, 대승사 선원장 철산 스님 등 200여명이 참석했다.

수덕사 주지 법정 스님은 추도사에서 “우리 교구 산하 금오산 향천사에 법력과 덕을 갖추신 대용 큰스님이 계셔 든든한 마음이 가득했는데 이제 스님이 가시고 나니 허전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며 “이제 대자유인이 되신 큰스님이 하루속히 이 사바세계에 다시 오셔서 중생들에게 감로의 법을 주시기를 사부대중과 함께 기원한다”고 밝혔다. 스님은 이어 “특히 대용 큰스님은 모든 것이 시작이었다면 끝이 있고, 오는 것이 있다면 가는 것이 있는 게 생멸법이라고 평생을 두고두고 말씀하신 분”이라며 “비록 스님은 가셨지만 그 높은 가르침은 영원토록 금오산 자락에 울려 퍼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덕숭총림 방장 원담 스님을 대신해 법어를 내린 수좌 설정 스님은 “대용 스님은 평생 청빈한 수행자로서 선가(禪家)에 귀감이 되셨던 분이었다”면서 “이제 스님의 모습은 뵐 수 없지만 우리에게 남기신 수많은 가르침을 받들어 금오산중에 불법이 성성하고 수행정진이 이어지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말했다.

향림당 대용 스님은 1929년 일본에서 태어났다. 일본에서 소학교를 졸업하고 해방과 더불어 귀국한 스님은 서울 체신학교 우편과를 수료, 대구시 중앙우체국에서 사무원으로 재직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스님은 조국을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참전을 결심했다. 이 과정에서 스님은 동료들의 죽음을 직면했고, 이때부터 생사가 덧없음을 깨닫고 출가를 단행했다.

1958년 예산 향천사에서 보산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수지한 스님은 이후 청암사 수도암을 시작으로 부안 월명암, 부산 선암사, 문경 김용사, 동화사 금당선원, 봉화 각화사 등 전국의 선방을 돌며 수행 정진에만 전념했다. 특히 스님은 “평상심이 곧 도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며 “일상이 곧 수행이요, 수행이 곧 일상이어야 한다”는 것을 일상에서 실천해 후배 수좌 스님들의 귀감이 되기도 했다.

70세가 넘은 고령에도 대중들과 함께 생활하며 청빈한 수행자로 일관했던 대용 스님은 지난 4월 19일 향천사 염화실에서 “춘래춘풍(春來春風)이면 백초일색(百草一色)이라 승속원융(僧俗圓融)하여 일월왕래(日月往來)로다 생사여시(生死如是)니라”는 임종게를 남긴 채 세수 78세, 법납 48세로 입적했다.

예산=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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