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⑦ 대승불교의 자취 아브하야기리 다고바

기자명 법보신문

무성한 잡초에 가려진 천년 대승의 황금시대

<사진설명>대승불교를 수용하며 개방적인 자세로 교세를 넓혀나갔던 아브하야기리 위하라 승단의 중심지. 쇠락한 부파의 역사를 전하듯 아브하야기리 다고바도 세월의 무게 속에서 조금씩 허물어져 가고 있다.

『증일아함경』에는 출가자들의 시비를 경계하는 대목이 있다. 붓다께서 구심성(拘深城)에 계셨을 때 구심(拘深)이라는 비구가 있었는데 그는 항상 싸우기를 좋아하여 심지어는 칼이나 몽둥이를 휘두르기도 하였다. 그의 악행으로 인해 승단이 소란스러워지자 어느 날 이른 아침 붓다께서 몸소 비구의 처소를 찾아가 말씀하기를 “너희 수행자들은 부디 싸우지 말고 서로 시비(是非)하지 말라. 너희들은 모두 한 스승을 섬기는 제자로서 마땅히 서로 화합하기를 물과 우유가 섞이듯 해야 한다.”며 구심 비구를 타이르셨다.

비구 사이의 시비가 칼과 몽둥이를 휘두르는 수준이었다면 이는 오늘날의 기준으로도 꽤나 심각한 지경이 아닐 수 없다. 오죽했으면 붓다께서 직접 찾아가 타이르고 당부 하셨을까. 그러고 보면 대중이 모인 곳에서 시시비비의 발생이란 부처님 재세 당시에도 피할 수 없었던 인간살이의 모습인 듯하다. 상좌부 불교의 중심인 스리랑카 불교계도 역시 예외는 아니다.

천년간 지속된 승단의 갈등

오늘날 스리랑카는 남방불교계를 대표하는 상좌부불교의 중심 국가이지만 역사를 살펴보면 부파의 발생으로 인한 승단의 분열과 갈등이 1천여 년 동안 계속되며 심각한 대립으로 치달았다. 그 첨예했던 갈등의 흔적이 바로 스리랑카의 고도 아누라다푸라에 남아있는 대탑 아브하야기리 다고바(Abhayagiri Dagoba)다. 이 탑은 한때 대승불교를 수용하며 스리랑카 불교계를 호령했던 아브하야기리위하라 승단(‘무외산사파’로 지칭)의 중심지인 동시에 상좌부와의 대립, 그리고 쇠망을 고스란히 기록하고 있는 역사의 증인이다.

고도 아누라다푸라에서 처음 만난 아브하야기리 다고바는 마치 ‘노쇠하고 잊혀진 옛 배우’같은 모습이었다. 왕관을 빼앗긴 군주처럼 높이 75미터에 달하는 아브하야기리 다고바의 웅장한 크기는 무채색의 그림자만을 더 길게 빚어내고 있었고 호수에 비친 그림자조차 자기 연민에 빠진 듯 우울하게 보였다. 우윳빛 고운 살결처럼 눈부시도록 희게 치장돼있는 스리랑카의 탑들과는 달리 켜켜이 쌓아올린 거친 흙벽돌이 무방비로 드러나 있는 이 탑은 한낱 이름 없는 잡초에게 머리를 내어준 채 묵묵히 시간의 뒤편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아브하야기리 다고바를 세운 것은 기원전 1세기 왓타가마니 아브하야(Vattagamani Abhaya) 왕이었다. 타밀족의 침략으로 수도인 아누라다푸라를 빼앗겼던 왓타가마니 아브하야는 담불라 등지를 은신처로 삼아 타밀에 대한 항전을 계속했다. 기록을 살펴보면 왕은 꽤나 급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며 그의 성격으로 인해 분노한 대신들의 일부가 왕을 버리고 타밀과 타협하려 했다고 한다. 하지만 정치인들의 행보란 자신들의 이익을 쫓는 경우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를리 없으니 대신들의 배신을 왕의 탓으로 돌리고 있는 옛 기록을 그대로 믿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다. 어찌되었든, 타밀족과의 합류를 위해 도망치던 대신들은 날이 어두워지자 근처의 사원에서 하룻밤 묵게 됐다. 이 사원에는 학승으로 이름이 높던 마하팃사(Mahatissa)라는 스님이 있었다. 대신들로부터 밤길을 나선 이유를 듣게 된 마하팃사 스님은 놀라움과 우려를 감추지 못하며 대신들을 타이르기 시작했다.

“이민족, 이교도의 침입을 받아 왕이 왕좌에서 밀려나고 기근까지 겹쳐 백성들의 삶이 더 없이 피폐해져가고 있는 이 어려운 시기에 왕과 대신들이 갈등을 빚어서는 안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타밀 왕과 싱할리 왕 가운데 누가 붓다의 가르침을 수호하고 법등을 후대에 까지 전하겠습니까.”
 
이 질문에 대신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경솔했음을 깨닫고 참회했다. 마하팃사 스님은 대신들을 이끌고 왕을 찾아가 지난 일들을 화해시켰고 이후 왕은 수도 아누라다푸라를 회복하여 왕좌에 복귀할 수 있었다.

불법 수호 위해 대신들 설득

왓타가마니 아브하야 왕은 왕좌에 복귀한 후 절체절명의 위기를 극복하도록 도와준 마하팃사 스님에게 감사를 표시하고자 아브하야기리 위하라와 다고바를 세워 마하팃사 스님에게 보시했다. 이후 왕은 지방에 머물고 있던 마하팃사 스님을 수도로 불러 곁에 두었고 자연히 정치인들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당시 아누라다푸라에는 마하위하라를 중심으로 승단이 형성돼 있었고 그때까지 스리랑카 불교의 중심은 분명 마하위하라의 승단(‘대사파’로 지칭)이었다. 마하위하라의 스님들은 아브하야기리 위하라의 건립과 마하팃사 스님의 영향력이 마하위하라의 권위를 실추시켰다고 느꼈으며 결국 마하팃사 스님이 재가자, 특히 정치인들과 교제하는 것을 비난하며 공개적인 징계까지 거론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마하팃사 스님을 지지했던 많은 스님들은 마하위하라 승단의 이 같은 지적에 강력히 항의하며 아브하야기리 위하라를 중심으로 별도의 승단을 만들었다. 이것이 스리랑카 승단의 첫 분열이었다.

인도로부터 대승불교 수용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마하위하라 승단과 신생 아브하야기리 위하라 승단 사이에는 교리적으로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 둘의 사이는 점점 더 멀어져 갔다. 아브하야기리 위하라는 당시 인도에서 발생하고 있던 다양한 교파와 활발히 교류하고 그들의 교리를 수용해 나갔다. 특히 마하위하라 승단이 싱할리어로 패엽경을 만들며 상좌부 불교의 전통을 고수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이 인도로부터 대승불교의 교리를 받아들이는 등 개방적인 자세로 외국과의 교류를 펼쳐나갔다. 아브하야기리 위하라 승단은 3세기에 이르러서 인도로부터 건너온 대승불교 계통의 스님들을 받아들였는데, 이들은 현재 아누라다푸라에 남아있는 제타와나 위하라(Jetavana Vihara)를 중심으로 승단을 구축(‘기타림사파’로 지칭)해 스리랑카에는 마침내 3개의 부파가 공존하게 되었다.

대승-상좌 공존의 시대

<사진설명>싱할라 왕조의 두 번째 수도 폴론나루와에는 한 때 스리랑카에 대승불교가 융성했음을 보여주는 정교한 조각의 보살상이 남아 있다.

이후로도 상당히 오랜 기간 아브하야기리 위하라 승단의 황금시대가 지속되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왕의 지지와 비호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아브하야기리 위하라에는 무려 5천여 명의 승려가 있었으며 이 가운데에는 인도 등 해외로부터 온 구법승들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3세기경부터 본격적으로 수용되기 시작한 대승불교도 이후 점차 확산돼 8세기경에 이르러서는 밀교가 성행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12세기 바라끄라마바후 1세(Parakramabahu I)는 마하위하라가 고수해온 상좌부를 정통으로 인정하며 아브하야기리와 제타와나에 대한 ‘정화’를 단행했다. 왕은 스리랑카의 불교를 상좌부로 통합하기 위해 이에 반대하는 승려에게는 생활기반을 마련해 주어 속퇴시켰다. 이로써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스리랑카 불교계의 상좌부 전통은 확고한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으며 1000년 이상 지속돼온 스리랑카 불교계의 부파간 갈등은 종식된 것이다. 아브하야기리 위하라 승단의 소멸과 함께 이 대탑도 돌보는 이 없이 조금씩 쇠락해갔다.

대승불교 쇠퇴 후 상좌부 견고

무성한 잡초에 덮여 있는 아브하야기리 다고바의 모습은 스리랑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진 대승불교의 오늘을 대변하고 있다. 하지만 아브하야기리 다고바는 그저 잊혀진 과거의 유물만은 아니다. 스리랑카 불교계가 상좌부를 중심으로 오늘날과 같이 견고한 전통을 확립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역설적으로 부파의 발생, 즉 대승불교와의 대립 속에서 상좌부 불교를 지키기 위한 노력에서 기인한 것이다. 역사란 두 손바닥 같아서 서로 반대편에 서 있는 두 손이 맞부딪혀야만 소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비록 눈앞에 보이는 아브하야기리 다고바의 모습은 스산하지만 그 안에는 스리랑카 불교의 오늘을 만든 천년의 역사가 오롯이 투영돼 담겨있었다.
 
namsy@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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