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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원사 문수동자 500도반 만났으니 미소 짓겠네

기자명 법보신문

‘500 문수보살-500 문수동자’ 조성
허 길 량 목조각장

<사진설명>부처님 조각 외길 40년. 그의 ‘신심의 조각칼’은 후대에 남을 걸작 ‘500 문수보살-500 문수동자’를 빚어 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처님 상을 꼽으라면 단연 석굴암 부처님이다. 조각과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나, 승·재가 사이에서 ‘석굴암 부처님에 버금가는 부처님 상호를 조성한다면 한국은 물론 세계 불교사에 이름을 올릴 것’이라고 말한다.

그만큼 불교 유물이나 예술 작품 중에서 가장 많이 접할 수 있는 상호가 부처님임에도 조성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님의 반증이다. 따라서 예술가가 자신의 작품 속에 부처님을 그려넣는 것과 신앙의 대상으로 모실 부처님을 조성하는 것은 예술 가치를 떠나 ‘성스러움’에서 이미 차별성이 크다.

불상조각 외길 40여년

국보급 목조각장 허길량. 그는 현 불교계에 손꼽히는 불상 조각가다. 2002년 그가 조성한 ‘33관음’이 세상에 출연했을 때 교계는 깜짝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관음보살의 위신력에 의해 민간에서도 널리 신앙되었던 관음보살은 33관음으로 정착 되었지만 그 전까지 33관음을 선보인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 명종 5년(1550년)에 인종의 명복을 빌기 위해 32관음 응신도가 조성돼 도갑사 금당에 봉안된 적이 있지만 이는 한 폭의 불화였다.
그로부터 4년에 접어든 허길량 목조각장은 파주 하읍의 작업실에서 제자들과 함께 또 하나의 금자탑이 될 만한 불사를 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 불사는 세로 2m에 가로 20m의 목각탱 대작불사. 화면 상단에는 500 문수보살이 나투어 있었고 하단에는 500문수 동자가 조각돼 있었다. 여법한 문수보살과 티 없이 맑은 다양한 형태의 문수동자는 복잡하게 얽혀 있으면서도 조화를 이루고 있어 한 폭의 불화를 보는 듯하다. 문득 한 화면의 동자상을 보는 순간 어릴 적 친구들과 어울려 놀았던 유년의 기억이 뇌리를 스친다.

피리를 부는 동자, 물장난을 치는 동자, 염주를 손에 들고 마냥 즐거워하는 동자, 잠시 졸고 있는 듯한 동자, 반가사유상을 연상시키는 동자, 연잎 위에서 서로의 어깨를 기댄 채 천진난만한 미소를 머금은 동자 등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동자들이 한 화면 속에서 자신들의 세상을 펼쳐 보이고 있다.

面上無瞋供養具
口裏無瞋吐妙香
心裏無瞋是眞寶
無染無著是眞如

성 안내는 그 얼굴이 참다운 공양구요,
부드러운 말 한마디 미묘한 향이로다.
깨끗해 티가 없는 진실한 그 마음이
언제나 변함없는 부처님 마음일세.

목각탱 길이만도 20m 걸작

<사진설명>상단에는 문수보살이 하단에는 문수동자가 조각돼 있는 한 화면. 이 화면들이 모여 길이 20m의 ‘목각탱’을 이룬다.

무착 스님이 들었다는 ‘문수보살게’ 그대로가 동자들의 표정에 그대로 배어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원래의 은행 통나무를 안으로 조각해 들어가며 500문수와 500동자를 형상화했다는 점이다. 즉 두꺼운 평면을 조각칼로 한 끌씩 파 들어가며 입체적인 화면을 탄생시킨 것이다. 일반 나무와 달리 은행나무가 조각 하기 어렵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 여기에 사용되는 조각칼만도 약 200여개. 일반 조각칼로는 엄두도 못 낼 일이어서 그가 직접 제작했다고 한다. 작업 특성상 특수한 조각칼도 필요했던 그는 둥근 조각칼과 일자형 조각칼, ‘L 자형’ 조각칼, 둥글듯 하더니 이내 45도 각도로 휘어진 조각칼 등 희귀(?)한 조각칼을 손수 제작했다.

‘500문수보살 500문수동자’는 40여년의 불상 조각의 외길을 걸어온 그의 신심이 빚어낸 걸작이라 할만하다.

어릴 적 그는 가난했다. 기술을 배우지 않고는 험난한 세상을 버틸 수 없다는 것을 15살 때 직감하고 한 공예방을 찾아 조각칼을 처음 들었다. 이후 1974년 이인호 씨를 만나며 조각 기법을 터득해 가기 시작했다.

“선생님의 호령과 등살에 하루에 열두 번도 더 그만두고 싶었지만 이것이 아니고는 살 수 없다는 일념으로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그래도 그 때 묵묵히 견뎌내 조각의 기본을 익혔다고 보아야 하겠지요.”

당시를 회고 하는 그의 표정에서 얼마나 고난했던 가를 직감할 수 있었다.

덕암 스님이 우일 스님에 천거

서울에서 작업 할 당시 그를 유심히 지켜보았던 스님이 한 분 계셨다. 바로 태고종 전 종정 덕암 스님. 덕암 스님은 그가 빚어 낸 비천상과 보살상을 보고는 당시 그림과 조각으로 명성이 높던 우일(又日) 스님에게 그를 천거했다고 한다. 이미 조각의 기본을 배운 그가 우일 스님으로부터 무엇을 체득했을까?

<사진설명>문수동자의 천진난만한 모습만 보아도 세간의 번뇌가 씻기는 듯 하다.

“흔히 불상 조각에 대해 말할 때 기법을 언급 하는데 실은 기법 자체는 차제입니다. 단순히 기술적인 솜씨가 뛰어나다 해도 신심이 돈독치 않으면 예배 대상의 부처님을 조성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우일 스님은 불상 조각을 위해 나무 한 그루를 베기 전 예부터 올렸습니다. 평소 계행을 철저히 했던 스님이었지만 조각칼 한 번을 나무에 대더라도 사전에 더더욱 몸가짐을 정갈히 하셨습니다.”

그래서일까! 그는 지금도 술을 가까이 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세상 사람들과의 만남도 그리 녹녹치 못한 게 사실. 이로 인해 세속에서 자신의 입지를 굳히는데 많은 장애가 있을 것은 너무도 자명한 일. 그러나 그는 묵묵히, 아주 묵묵히 나무를 다듬어 왔다. 저 깊은 마음 한 자락에서 피어오르는 석가모니, 비로자나, 관음을 쇠붙이 조각칼이 아닌 ‘신심의 조각칼’로 조금씩 형상화 해 왔다.

“부처님 앞에 모든 불자들은 절을 올리고 기도하며 염불합니다. 그 부처님을 조성하는 제 자신이 절을 올리고 기도하지 않는다면 이미 그 부처님은 부처님이 아닙니다. 나무를 벨 때부터 건조하고 조각하며 향을 입힌 후 봉안할 때까지 순진무구의 일심을 놓아서는 안됩니다.”

오대산 상원사 중대 주지 인광 스님이 그에게 이번 대작 불사를 맡긴 것도 그의 청정성 때문이라는 후문이다. 인광 스님은 후세에도 길이 남은직한 아니, 성보로 남을 만한 작품을 원했고 그 대작불사를 맡을 인물로 ‘허길량’을 택했던 것이다.

“청정한 마음이 조각의 기본”

이미 비로전에는 비로나자불과 닫집 그리고 불단이 그의 빼어난 솜씨에 의해 조성된 상태. 특히 수미산을 상징화한 ‘수미단(불단)’은 그의 예술성을 짐작케 한다.

40여년의 신심으로 빚어 낸 500문수보살과 동자의 목각탱은 10월 1일 오대산 중대에 봉안된다. 향후 100년 아니 500년이 지나도 고졸한 미를 간직할 목각탱과 함께 사람들은 기도하고 또 기도하며 법음을 이어갈 것이다.

그의 500 문수보살과 문수동자가 봉안 되는 날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국보 제221호)도 미소를 보낼 것이다. 한 도반만 만나도 좋을진데 500 도반이 곁에 있기에……
 
채한기 기자 penshoot@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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