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⑨ 일제의 사찰령 시행

기자명 법보신문

인사·재정 총독부 장악…유례없는 종교 악법

총독·지방관 인가 해야 본말사 주지 취임 가능
“사찰령은 조선승려 박멸 위한 것” 불교계 저항
30본사 체제 확립…불교의 관변화 빌미 제공

<사진설명>조선총독부 사사계(寺社係) 주임으로 사찰령 제정의 실무 담당자인 와 타나메 아키라(渡邊彰). (사진제공=민족사)

일본은 미국의 압력으로 문호를 개방하고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단행하여 근대국가 체제를 수립하였다.

천황제 국가 체제를 확립한 일본은 1910년 무력을 앞세워 조선을 강점하고 민중들에게서 일체의 정치적 권리를 박탈하고 식민통치에 순응할 것을 강요하였다. 당시 일본은 근대 법치국가 체제를 확립하였기 때문에 조선 통치에도 메이지 헌법을 적용해야 했다.
 
그러나 조선에서 일본 헌법을 적용하게 되면 조선인의 권리와 의무를 모두 법률에 보장된 대로 시행하여야 하였으므로 식민지로부터 수탈이 불가능하였다.

1910년 7월 12일 일본은 각료회의에서 조선을 일본 헌법의 적용 범위에서 제외하고 새로운 법규를 제정하여 시행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러한 결정에 따라서 총독부는 불교계를 통제하기 위하여 1911년 6월 3일자로 제령 제7호로 전문 7조의 사찰령(寺刹令)을 공포하였다. 이어서 7월 8일자로 사찰령시행규칙(寺刹令施行規則) 8개 조항을 발표하였다. 사찰령은 일본 문부성이 1898년 제14회 제국의회에 제출한 종교법안을 참조하여 만들어졌다. 종교법안은 천황제와 국가신도의 위상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모든 종교를 통치정책에 순응시키기 위하여 입안되어 제14회 제국의회에 상정되었으나 통과되지 못하였다.

종교법안은 이후에도 몇 차례에 걸쳐 상정되지만 번번이 부결되다가 1939년에 가서 종교단체법이라는 이름으로 통과되었다.

종교 법안이 부결되었던 이유는 헌법정신에 위배되고, 국가의 종교 간섭은 시대착오라는 반론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총독부는 본국에서 실행이 불가능하였던 법안을 조선에서 시행하였다.

사찰령은 1910년 총독부 내무국 지방과의 촉탁직이있던 와타나베 아키라(渡邊彰)에 의해서 입안되었다. 제1조는 사찰을 병합·이전·폐지하려면 조선총독의 허가를 받도록 규정하였다. 사찰의 병합·이전 폐지를 명시하면서 새로운 사찰의 창립에 관한 규정을 두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일제시대 불교계는 사찰을 창립할 수가 없었다. 제2조는 사찰은 전법·포교·법요집행 및 승려의 거주 목적 이외에 사용할 수 없도록 규정되어 있다. 불교도들이 사찰에 머무르면서 신앙생활을 하더라도 지방장관의 허가를 받아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제3조는 각 본사는 사법(寺法)을 정하여 총독의 허가를 받도록 규정하고 있다. 제4조는 사찰에는 주지를 두도록 규정하고 있으며, 제5조는 사찰의 재산을 매각할 때는 총독의 허가를 받도록 명시되어 있다. 이 조항으로써 총독부는 불교계의 재정권을 장악하였다. 총독의 허가를 받지 않고는 사찰은 재산을 양도하거나 담보로 제공할 수도 없고, 부채를 빌려 쓸 수도 없었다. 사찰 재산은 거의 관유 재산화되고 말았다. 제6조는 상기 조항을 위반하였을 때는 2년 이하의 징역이나 500원 벌금에 처한다는 내용이다. 제7조는 사찰령에 명시되지 않은 예기치 못한 사안이 발생하였을 때 총독은 임의로 법을 제정하여 통제를 가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사찰령시행규칙 제1조는 주지를 정하는 방법, 주지의 교체 절차 및 임기 중에 사망하거나 기타 사고를 당하였을 경우에 사법에 사찰의 업무 취급 방법을 명시하도록 하였다.

제2조는 전조선의 사찰 가운데 30개의 큰 사찰을 본사로 지정하였다. 30본사 체제는 1924년 11월 20일자로 전남 구례 화엄사가 본사로 승격됨으로써 31본사 체제가 된다. 나머지 사찰들은 소속 지역의 본사에 배속시켜 말사가 되게 하였다. 말사는 주지 임면에서부터 사찰의 제반 사항에 대하여 본사의 지시를 따라야 하였다.

일제시대 30본사 주지의 지위는 대단한 것이었다. 그들은 총독부로부터 불교계의 대표적인 승려로 인정되어 일본의 고급 관료인 주임관(奏任官)의 대우를 받았으며 새해에 총독 관저에서 열리는 신년하례회에 초청되었다.

본사 주지는 총독의 인가를 받아야 취임할 수 있었고, 말사 주지는 지방장관의 인가를 받아야 했다. 사찰령에는 소속 관청이 주지 인가권을 가지도록 되어있었기 때문에 공정한 선거를 통해 적임자를 선출하였더라도 관청의 비위에 맞지 않으면 인가하지 않는다는 압력이 내재되어 있었다. 이 조항은 총독부가 불교계의 인사권을 장악을 명시한 내용이다. 제3조, 4조, 5조, 6조는 주지가 될 수 있는 사람의 자격과 임기, 면직 사유 등을 규정하였다. 제7조는 주지는 취임 후 5개월 이내에 사찰에 소속된 토지△삼림△건물△불상△석물△고문서△고서화△범종△경권(經卷)△불기(佛器)△불구(佛具) 및 기타 귀중품의 목록을 작성하여 총독에게 제출하도록 명시되어 있다. 이렇게 제출된 재산의 증감이나 이동사항이 있을 때는 5일 이내에 총독에게 변동 상황을 제출하도록 규정하였다.

30본사 체제는 조선의 전통 사격(寺格)을 정밀하게 고려하지 않았다.

30본사 제도가 조선의 전통 사격을 엄밀하게 고려하지 않고 제정되어졌다는 대표적인 사례는 1924년 11월에 선암사 말사였던 화엄사가 본사로 승격된 데서 찾을 수 있다. 선암사는 1921년 광주 무등산 약사암 주지 김학산(金學傘)을 화엄사 주지로 임명하였다. 김학산이 주지로 부임하는 과정에서 선암사에서 임명한 주지를 거부하던 화엄사 승려들로부터 집단 구타를 당하여 절명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이 발생하자 총독부는 조사관을 파견하여 진상을 조사하고 화엄사를 본사로 승격시켰다. 이 밖에도 금산사·쌍계사 등 여러 사찰에서 본사 승격을 요구하였으나 모두 묵살당하였다.

사찰령과 사찰령시행규칙은 불교계의 모든 사안에 대해서 총독부의 허가를 받아야만 일을 할 수 있도록 규정한 법령이다. 이 법령 시행을 두고 불교계는 의견이 분분하였다. 사찰령의 시행을 찬성하는 측은 대개 교단지도부인 본사 주지들이거나 관변 지식인층이었다. 이들은 불교계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고 사찰령의 시행이 마치 빈사상태에 빠진 불교계를 회생시킬 수 있는 양약인 것처럼 찬양하였다. 그 까닭은 이들은 총독부 측과 연결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반해서 저항하는 측은 사찰령의 통제적 의미를 간파하고 강한 이의를 제기하였다고 생각되지만 이들은 소수였고, 남아 있는 기록들은 찾기가 힘든 상황이다.

<사진설명>조선총독부가 1911년 6월 3일자로 제령 제7호로 공포한 사찰령 전문.(사진제공=민족사)

불교계 일각에서는 사찰령이 불교계를 제약하는 악법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저항의 움직임이 일고 있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이러한 추측의 근거는 사찰령을 시행하면서 정무총감이 9월 18일자로 각도 장관에게 발송한 관통첩(官通牒)의 내용 가운데 다음과 같은 대목에서 찾을 수 있다.

“사찰령이 조선 사찰의 권리를 빼앗아 승려를 박멸하려 한다고 하여 조선 승려로 하여금 의구심을 야기시키는 자도 있다. 사찰령 시행에 장애가 있으면 이는 조선의 승려들이 이 법령의 취지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데서 기인하는 것이므로 각 사찰에 머무는 승려들에게 사찰령 시행의 취지를 잘 설명하라.” ‘사찰령이 조선 승려를 박멸하려 한다’라는 말이 유포될 정도로 불교계 내부의 반발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사찰령 시행을 반대하는 글이 활자로 출간되기 어려웠을 것이므로 당시의 자세한 정황은 알 수가 없다. 다만 『매일신보』1914년 8월 15일자 기사에서 한용운이 30본사 체제에 편입되지 않는 조선불교회를 창립하고자 하였다는 대목에서 임제종 설립운동의 주역들 사이에서 사찰령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뿐이다.

사찰령 비판에 대한 기록은 3·1운동 이후 성립된 상해 임시정부의 문건에서 찾을 수 있다. 임시정부는 일본의 조선통치가 부당하다는 사실을 국제연맹에 호소하고자 『조일관계사료집(朝日關係史料集)』이란 문건을 등사판으로 제작하였다. 여기에 사찰령에 대한 비판은 네 가지로 나타나며 그 요지는 이러하다.

첫째, 사찰령은 사찰의 신축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불교계를 고사(枯死)시키려 하였다. 둘째, 사찰 재산을 관유화시킴으로써 자유로운 재산권의 행사를 제한하였다. 셋째, 30본사를 정함으로써 조선승려로 하여금 단결력을 발휘할 수 없게 하였다. 넷째, 사찰 주지 선출방식을 종래의 산중공의제(山中公議制) 무시하고 일본식 선출방법을 강행함으로써 승려들의 불평이 그치기 어렵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찰령과 사찰령 시행규칙이 폐지되지 않으면 불교계의 불만은 종식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경고하였다.

총독부는 불교계를 식민통치에 활용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사찰령과 사찰령시행규칙을 만들었기 때문에 그 내용이 규제 일변도인 악법이었다. 조선의 전통 사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제정된 사찰령시행규칙은 불교계에 많은 부작용을 야기시켰다. 일제시기 사찰령의 폐지는 불교계의 염원이었다. 그런 까닭에 1920년대 초부터 사찰령 폐지운동이 청년 불교도들 사이에서 전개된다. 사찰령 철폐운동은 식민지 통치 권력과 정면으로 맞서는 일이라서 실효성을 거둘 수는 없었지만 불교계는 저항의 몸짓을 일제가 패망하는 순간까지 계속하였다.
 
김순석(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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