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끝’이라는 생각이 자살-살인 낳는다
‘죽음=끝’이라는 생각이 자살-살인 낳는다
  • 법보신문
  • 승인 2006.10.17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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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강 현대인의 죽음이해
정 진 홍 서울대 종교학과 명예교수

봉은사와 법보신문은 공동주최로 10월 9일부터 8회에 걸쳐 매주 월요일 봉은사 보우당에서 오진탁 교수의 ‘제2기 웰다잉 체험 교실’과 죽음관련 전문가 초청 ‘웰다잉 특강’을 진행하고 있다. 이에 본지에서는 ‘8인의 전문가에게 듣는 웰다잉 특강’을 총8회에 걸쳐 지상 중계한다. 편집자

현대인의 죽음관을 제대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다른 것과 비교를 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문제는 비교의 척도인데, 무엇과 비교를 할 것인가. 우리가 한국 사람이고 동양사람이기에 다른 문화와 비교해 보기보다는 우리 조상들, 이 땅에서 먼저 삶을 살던 분들은 어떻게 죽음을 이해했을까를 더듬어 보며 현대인들이 오늘 어떤 죽음 이해를 갖고 있는가를 비교해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분들이 갖고 있던 죽음 태도 가운데 좋은 점, 그 가운데 오늘날 우리가 잊어버린 것이 있다면 다시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혹시 우리가 오늘날 더 좋은 죽음관을 갖고 있다면 그것을 전승시켜가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조상들의 역사를 살펴보면 죽음에 관한 어떤 일관된 풍토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위대한 철악 체계나 어떤 사상가들이 제시한 잘 정리된 이론이라기보다는 우리의 생활 속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구전이야기, 관습적 행위 속 등에 숨겨져 있습니다.

죽음 이야기를 하기는 참 어렵습니다. 죽음 이야기는 쉽게 객관화 되지가 않습니다. 많은 대상을 객관화시켜 학문적으로 논의하고 있지만 유독 죽음은 그렇게 되질 않습니다. 죽음이 나로부터는 멀리 있으면 그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지만 죽음이 조금씩 다가오면 그것이 그렇게 분명해지질 않습니다. 죽음을 설명할 길이 없고 죽음은 당연한 사실이 아니라 불가사의한 것이 되어 버립니다. 더 나아가서 그것이 내 죽음이 되면 그때부터는 당혹스러워집니다. 이해 못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겁나고, 피하고 싶고, 두렵고, 절규하고 싶고, 그 고통을 어떻게 견디나 싶어 절망하고, 별리의 슬픔이 벌써부터 견디기 힘들어집니다. 그래서 죽음관에 대해서는 이야기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현대인들의 죽음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거친 우회를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저런 자료를 통해 정리를 해보면 우리 조상들이 갖고 있는 죽음관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죽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는 점입니다. 우리 조상들의 죽음관에는 죽음을 이상스러운 것 불가사의한 것 알 수없는 것이라는 색체가 강하지 않습니다. 살아있기 때문에 죽음은 당연한 것, 죽음은 어떻게 보면 삶의 일부였습니다. 살아있는데 죽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정상적이질 않았습니다. 죽어 마땅한 것이고 죽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어렸을 적 시골에 살았는데 저의 할머니께서는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할머니의 이야기는 “그래서 잘 살았단다”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늘 “그래서 잘 살다가 죽었단다”에서 끝났습니다. 잘 살았다는 이야기의 끝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굳이 우리 할머니만의 틀이 아니었습니다. 죽음을 이야기해야 삶을 다 이야기하는 것이 됩니다. 죽음은 삶의 이야기이고 삶 속에 있는 현장이었고 삶이 자연스러워야 하듯 죽음도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죽음에 대해 공포를 느끼고 회피하고 아니면 죽음과 영웅적인 대결을 한다는 것은 우리 조상들의 죽음관 속에는 없습니다. 그것을 그냥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습니다. 굳이 이야기한다면 자연주의적인 죽음 태도, 살아있으니 마땅히 죽는 것, 그것이 자연인 것, 그렇기에 죽음은 삶과 단절돼 있는 이질적인 것이 아니라 삶 안에 있는 현상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죽음 자체에 대한 공포라는 것이 그리 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죽음, 그 자체는 두렵지 않았지만 두려운 죽음들이 있었습니다. 죽긴 죽는데 ‘이런 죽음은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소원 같은 것들이 있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요사(夭死)라고 하는, 젊어 죽는 것입니다. 꽃봉오리가 피워보지도 못하고 젊은 나이에 죽는 것, 이것은 자연스럽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갑작스러운 죽음, 횡사(橫死)라고 했는데, 요즘말로 하면 사고사입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분석해 보면 ‘왜 죽음을 두려워하는가’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어떻게 죽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횡사는 그런 죽음의 가장 구체적인 모습입니다. 하나 덧붙이자면 원사(寃死), 원통하게, 억울하게, 한 맺혀 죽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원혼이 떠돈다고 하고 원혼이 떠돌면 음습한 혼의 기운 때문에 사람살이가 엉망이 된다고 했죠.

그런데 병사에 대해서는 그렇게 두려워한 기색이 많지 않습니다. 물론 부모의 병을 고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다는 이야기도 많지만 늙어 죽는데 병은 반드시 수반해야 하는 도구처럼 여겨졌습니다. 병은 인간이 죽음에 도달하기 위한 동반자 같은 것이었습니다.

종교학과에 교수로 있을 때 학생들과 함께 해인사에서 일주일을 지내며 스님들과 똑같이 생활한 적이 있습니다. 전 그때 몸이 너무 안 좋아서 고생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성철스님의 법문을 듣고 있는데 몸이 안 좋아서 그런지 한 말씀 한 말씀이 무척이나 듣기 싫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몸뚱이 가진 인간이 안 아프길 바래?”하시는데 가슴이 ‘꽝’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순간부터 마디마디가 진리로 들렸습니다. 몸뚱이 가진 인간이 어떻게 안 아프길 바라겠습니까. 우리조상들은 그런 지혜를 갖고 있었습니다. 병사는 두려운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이처럼 자연스런 죽음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지만 자연스럽지 못한 죽음을 굉장히 두려워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유교, 불교 등 종교가 유입되기 이전에는 죽음 이후의 세계, 즉 천당, 극락, 지옥 등 죽음 이후의 세계가 우리의 전통 속에서는 확연하게 구분되지 않았습니다. 죽은 사람을 돌아가셨다고 이야기하는 자체가 죽음을 부정하는 표현입니다. 되돌아간 것이니까요. 상여가 나갈 때 매기는 소리의 내용 중에 ‘저승이 어딘 가니 동구 밖이 저승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다른 공간, 다른 세계가 아닙니다. 요단강 건너도 아니고 도솔천도 아니었습니다. 바로 동구 밖이 죽음이었습니다. 이승과 저승에 관한 명확한 구분이 없었습니다. 혼이라는 개념 또한 어떤 실체를 이야기하는 것 보다는 부자연스러운 죽음이 낳은 암울한 모습을 묘사하는 하나의 서술이었습니다. 이것이 전통적인 죽음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기에 한국 사람의 전통적 가치관 속에는 이런 죽음관, 지극히 자연스러운 죽음관이 깔려 있습니다. 그런데 이 죽음관만이 지속된 것은 아닙니다. 이런 죽음관이 원형을 이루고 있는 가운데 커다란 문화들이 새롭게 전해졌습니다. 유교, 불교, 기독교 같은 종교이지요. 이 종교들은 한 결 같이 인간이 갖고 있는 죽음이라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현대인의 죽음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죽음관에 덧붙여진 유교, 불교, 기독교적인 죽음관을 이해해야 합니다.

종교란 물음에 대한 해답이므로 죽음에 대해서도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해답을 갖고 있었습니다. 유교, 불교, 기독교 모두 마찬가지 이지요. 그래서 각 종교의 죽음에 대한 해답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유교를 생각해봅시다. 유교는 중국 문화권에서 생겨난 지혜가 결집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문화가 한자 문화권에 속해 있는 한 유교의 전래를 언제부터라고 연대기적으로 이야기하기가 어렵습니다. 유교는 이 땅에 들어와서 굉장히 큰 영향을 미치며 자연주의적이던 전통의 죽음관과는 달리 굉장히 세련되고 논리적인 죽음관을 제시했습니다. 하지만 공자님은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삶도 모르는데 어떻게 죽음을 이야기 하겠는가”라고 했습니다. 그대신 모든 관계, 인간과 인간, 인간과 하늘 등 모든 관계에 대해 관심을 가졌습니다. 죽음에 관해서도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제사라는 의식을 통해 죽은 망자와 생자와의 관계를 보여주었습니다. 유교 경전에 담겨있지는 않지만 죽음에 대한 이해가 제사 안에 그대로 담겨있습니다. 그러기에 유교의 죽음관은 경전을 통해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제사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제사는 생자와 망자의 만남이 이뤄지는 장이고 그때 이뤄지는 행위입니다. 이것을 살펴보면 유교는 죽음을 삶과의 단절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제사를 망자의 자리에서 보면 망자의 회귀의례이고 생자의 자리에서 보면 망자와의 만남의례입니다. 망자와 생자가 단절돼 있지 않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교의 죽음이해입니다. 죽고 나면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죽은 자는 언제나 만날 수 있는 어딘가에 계시고 내 삶에서 배재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유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의 삶의 공동체가 살아 있는 사람만의 공동체가 아니라 망자와 더불어 이루어야만 진정한 삶의 공동체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 죽은 자의 자리가 있어야 하고 더불어 있어야 사는 것이라는 게 기본적인 죽음이해였습니다. 삶의 자리 속에 죽은 자의 자리를 마련해 놓는 삶의 태도, 이것이 오랜 동안 우리들의 삶의 태도였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정의 표출입니다. 죽음은 별리, 단절이 아니었습니다.

불교의 전래 이후 우리에게는 죽음에 대한 독특한 생각들이 구체화돼서 자리를 잡아갔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전통적 문화 속에는 없던 것이었는데,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 없었기에 의례 속에 담아서 표현해야만 했던 죽음에 대한 이해를 불교는 정연하게 논리와 시켜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죽음은 끝이 아니라고 하는 점이었습니다. 윤회나 전생에 대한 개념들이 그런 것이었습니다. 불교에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존재로 계속 이어져가는 계기이며 동시에 불교는 그 계기를 윤리적인 것으로 채워 넣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잘 살면 사람으로 태어나지만 그렇지 않다면 사람으로 태어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보다 더 완벽한 존재가 될 수 있는 계기를 죽음과 연결해 놓은 것입니다.

또 불교는 죽음 이후를 구체적으로 서술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매우 모순된 것이 불교입니다. 불교는 산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이 사실은 그리 뚜렷하게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굉장히 역설적이고 모순된 이야기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태어나면서 자신 안에 죽음을 잉태하고 있습니다. 삶의 과정이라는 것은 내 안의 죽음의 성장과정입니다. 그래서 내안의 죽음이 활짝 꽃피울 만큼 성장하면 내 삶은 죽는 것입니다. 생사일여라는 것은 바로 이런 말이 아닐까 합니다. 생사일여라는 지혜를 통해 죽음의 고통을 의연하게 넘을 수 있게 해주는 동시에 죽음은 끝이 아니라는 가르침을 통해 죽음의 과정을 도덕적으로 채워주고 있는 것이 불교입니다.

기독교를 봅시다. 기독교의 가장 큰 특징은 죽음에 대해 암울하고 음습하고 두렵게 이야기한다는 접입니다. 기독교는 죽음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죽음은 신의 진노의 결과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다면 죽음은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죽음은 신의 저주의 결과이고 죽음은 죄의 값입니다. 성경에 그렇게 쓰여 있습니다. 기독교는 그렇기 때문에 ‘너희는 죽어야 한다’고 죽음을 권면합니다. 죽음을 권하는 유일한 종교입니다. 죽음을 저주라고 여기는 그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죽고 나면 부활해야 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살아나기 위해서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죽음은 저주스런 현상임에도 죽음으로서 새로운 생명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 기독교의 가르침입니다. 그렇기에 부활을 이야기하지 않다면 기독교는 참으로 암울한 종교입니다. 부활을 통해 죽음의 비극, 그 참담함을 넘어서게 합니다. 다시 사는 삶은 죽음을 저주로 수용하지 않아도 되는, 저주로부터 벗어난 삶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종교들의 죽음관이 우리의 전통 속에 섞이며 오늘날 우리의 죽음관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다만 누구에는 불교의 영향이 크고 누구에게는 기독교 영향, 유교의 영향이 더 크다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이 세 가지가 우리전통의 개념과 함께 공존하고 있습니다. 문화 속에는 본래 순수라는 개념은 없기 마련입니다.
 
그럼 이제 현대인의 죽음관을 살펴봐야겠습니다. 이렇게 좋은 죽음관들이 우리에게는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현대종교는 죽음을 그리 준엄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현대의 종교는 인권은 이야기해도, 사회정의는 이야기해도 죽음은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현대의 종교가 그런 모든 것을 이야기하면서 인간이 현실적으로 직면하고 있는 죽음을 간과하는 것은 자기기만이거나 종교 스스로가 자신이 없는 것입니다. 이제 죽음은 이상하게도 생물학적인 문제, 의학, 사회학적인 문제가 돼버렸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죽음관처럼 황량하고 거칠고 메마르고, 아니 그보다 아예 죽음관 자체가 없는 이런 시대가 없었습니다. 그저 살려고 억지를 부를 뿐이지 죽을 줄을 모릅니다.

오늘날 우리는 죽음이 뭔지를 결정조차 못하고 있습니다. 심장이 멈추면, 뇌가 멈추면 죽음인가요. 아닙니다. 의사 변호사 종교인 등등이 투표해서 죽음인지 아닌지를 결정합니다. 반자연적인 죽음, 이것이 문제입니다. 죽을 줄도 알아야 합니다. 자살, 안락사를 찬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은 자연적인 현상이니 죽을 줄도 알아야 합니다.

주검은 또 어떻습니다. 철저히 처리해야할 쓰레기입니다. 매장보다 화장을 해야 한다는 주장의 논거가 경제논리입니다. “전 국토가 묘지가 되어서는 살수가 없다. 그러니 태워버리자”입니다. 주검은 쓰레기입니다. 하지만 골프장 얼마나 많습니까. 그 골프장만 전부 묘지 만들어도 몇 십 년은 걱정 없을 것 같습니다. 경제 논리로 죽음을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종교계는 왜 이런 현상에 대해 아무런 말도하지 않습니까. 경제 논리 아닌 다른 것으로도 죽음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죽음을 존귀하게 여기지 않는 것은 결국 삶을 존귀하게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공동체는 철저하게 살아있는 사람들만의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죽음은 끝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죽음을 끝이라고 이야기 할 때 두 가지 태도를 낳습니다. “죽여 버리면 된다”와 “죽어버리면 된다”입니다. 살인과 자살의 이면에는 이런 의식태도가 있습니다. 죽음 이후를 그려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죽음에 대한 공포는 점점 커집니다. 죽기 싫으니까요. 다행히 이런 모임이 있고 제대로 죽자는 운동이 자꾸 일어나는 것은 참으로 다행입니다. 삶을 사랑하는 사람은 죽음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하고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삶을 신뢰하는 사람은 죽음도 신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삶을 의연하게 견딘 사람은 죽음도 의연하게 견뎌야 합니다. 죽음에 대한 태도는 결국 삶의 태도와 연결됩니다. 죽음과 삶은 결국 하나입니다. 잘 살다가 죽었다고 해야 이야기가 끝납니다. 성숙한 사람은 삶은 함부로 살지 않고 죽음도 함부로 죽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죽음관이 상상할 수 없이 황량하고 메말라 있지만 우리의 의식 속에 흐르는 죽음관, 그리고 우리의 종교가 아직 건재하다면 우리의 죽음도 그렇게 존귀하게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 일에 앞장서 주시기 바랍니다.

정리=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정 진 홍 교수는

서울대 종교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샌프란시스코신학교에서 유학했다. 명지전문대, 덕성여대 등을 거쳐 1982년부터 2003년까지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현재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이며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이사장이다. 저서로는  『종교문화와 논리』 『한국종교문화의 전개』 등 다수가 있다.


Q:죽음, 어떻게 정의 할까


현대인은 무엇이 죽음인지 조차 판단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무엇을 혹은 어느 시점부터를 죽음이라고 판단해야 할까요.

어디까지가 죽음이고 어디까지가 삶인지, 어디까지가 생명이고 어디까지가 비생명인지를 판단하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그래서 윤리학자들은 상황적인 판단을 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만큼 우리는 어려운 문제에 봉착해 있습니다. 사이보그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장기를 교체하는 것은 예사이고 인간은 온갖 기계를 달고 다닙니다. 육백만불의 사나이가 소설이 아니고 현실입니다. 저는 이런 문제에 대해 쉬운 해결을 기대하지 말자고 생각합니다. 안락사문제가 대두됐을 때 소극적인 안락사는 허용을 하자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즉 연명을 위한 치료는 하지 말자는 것이었습니다.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기계적으로 연명시키는 것을 중단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즉 소극적인 안락사, 약을 먹여서 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연명을 위한 치료를 부정하면서 자연적으로 죽게 하는 것은 법적으로 허용하자는 의견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포럼에서 그것을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사람들이 법률가였습니다. 그렇게 소극적 안락사를 법으로 허용하면 합법적인 살인이 허용된다는 것입니다. 법률가들은 소극적 안락사를 허용하는 대신에 모든 경우마다 한없는 고민을 하자고 했습니다. 법률가, 의사, 성직자, 보호자들이 모여서 고민을 하자, 그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분명한 대답을 쉽게 기대하기 보다는 고뇌를 수용할 수 있는 준비를 해야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A: 쉽게 답 구하려 말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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