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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윳따니까야』⑮ [끝]

기자명 법보신문

사성제 새기는 것이 불교 가르침 요체

이제 쌍윳따니까야 산책을 끝마친다. 쌍윳따니까야의 일년간에 걸친 개정작업도 끝나간다. 초간본의 여러 가지 편집상의 오류나 오역을 바로 잡고 원문의 복원, 용어의 일관성과 주석을 더욱 충실한 새로운 쌍윳따니까야가 조만간에 출간될 것이다. 그 동안 독자여러분이 궁금해 하시던 것들에 대해서는 신문의 지면상 한계 때문에 더 이상 연재가 불가능하므로 이 새로 출간되는 쌍윳따니까야를 참고하면 될 것이다.

쌍윳따니까야는 마지막으로 네 가지 거룩한 진리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 사성제는 여전히 가장 초보적인 불교의 진리이지만 가장 위대하고 심오한 명상수행의 진리이기도 하다.

그래서 쌍윳따니까야는 그 대단원의 마지막에서 사성제를 설하고 있다. 사성제는 알다시피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 괴로움의 원인의 거룩한 진리, 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거룩한 진리를 말한다. 괴로움이라는 것은 일상적인 느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우주 전체와 인식의 세계와 존재의 다발의 무상성과 불안정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심오한 세계로 들어가는 가장 강력한 화두와 같은 것이다. 이런 화두를 놔두고 다른 화두를 찾아 헤메는 것은 단지 사성제의 진리가 너무도 진부한 일상적 가르침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누구나에게 쉽게 이해되는 것이자 강력한 화두인 사성제를 새기는 것이야말로 불교의 가르침의 요체이다.

쌍윳따니까야에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괴로움(苦)을 보는 자는 괴로움의 원인(集)도 보고 괴로움의 소멸(滅)도 보며 괴로움의 소멸로 가는 길(道)도 본다.

괴로움의 원인을 보는 자는 괴로움도 보고 괴로움의 소멸도 보며 괴로움의 소멸로 가는 길도 본다. 괴로움의 소멸을 보는 자는 괴로움도 보고 괴로움의 원인도 보며 괴로움의 소멸로 가는 길도 본다. 괴로움의 소멸로 가는 길을 보는 자는 괴로움도 보고 괴로움의 발생도 보며 괴로움의 소멸도 본다.”라고 말씀하신다. 이를 다시 해석하면, 괴로움을 보는 자는 열반을 보므로 최상의 깨달음을 얻는다는 말이 된다.

쌍윳따니까야의 날곡식의 반복의 품 등에서는 부처님은 우리가 살아있는 생명을 해치거나 주지 않는 것을 빼앗거나 부모를 섬기지 못하거나 저울눈을 속이기, 뇌물, 사기, 협잡, 약탈, 폭행 등의 온갖 도덕적 사회적 악덕을 행하는 이유가 사성제를 모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향 윤회하는 이유, 즉 인간에서 축생이나 지옥에 태어나거나 천상에서 축생이나 지옥으로 태어나는 등의 하향으로 윤회하는 이유도 사성제를 모르기 때문이다. 한 경전만 예를 들어보자.

“한 때 세존께서는 손톱 끝으로 흙먼지를 집어 들어 수행승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이것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큰 대지와 내가 손톱 끝에 집어든 이 흙먼지와 어느 쪽이 더 큰가? 세존이시여, 이 큰 대지가 훨씬 크고 세존께서 손톱 끝에 집어든 흙먼지는 아주 작습니다. 세존께서 손톱 끝에 집어든 흙먼지를 큰 대지와 비교한다면 수량에도 미치지 못하고 비교에도 미치지 못하고 부분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살아있는 생명을 해치는 것을 삼가는 뭇삶들은 매우 적고 살아있는 생명을 해치는 것을 삼가지 않는 뭇삶들은 매우 많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수행승들이여, 네 가지 거룩한 진리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 고l로움의 발생의 거룩한 진리, 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의 거룩한 진리이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네 가지 거룩한 진리가 있다. 그러므로 수행승들이여, ‘이것은 괴로움이다.’라고 명상해야 하고, ‘이것은 괴로움의 발생이다.’라고 명상해야 하고,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명상해야 하고,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이다.’라고 명상해야 한다.”

방대한 쌍윳따니까야는 이와 같이 네 가지 거룩한 진리에 대한 가르침으로 끝난다. ‘이것은 괴로움이다.’라는 말은 단순한 느낌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성찰과 명상의 세계로 인도하는 화두와 같은 것이다. 괴로움 앞에서 우리는 신체적 언어적 정신적 활동을 멈추고 멈춤과 통찰의 세계 즉 사마타와 위빠사나의 세계에 들기 때문이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 전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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