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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식 지고 있으니 오온개공이 헛 공부

기자명 법보신문

[7인 선사 초청 대법회]곡성 태안사 선덕 일 오 스님

여러분 안녕하세요. (대중 ‘예’하고 대답)

여러분 육근문두에서 여러분의 부처가 하나씩 작용하고 있습니다. 내가 ‘안녕 하세요’하니까 여러분들이 ‘예’하고 대답한 것이 바로 여러분 부처님의 영험이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도리 하나 깨닫자고 여기 모였습니다.

우리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라 하지 않습니까. 깨달으려면 선을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깨달아야 하는가도 중요하겠죠. 여러 조사 스님들이 많이 계시지만 마조 스님의 제자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대주 혜해 스님이 쓰신 『돈오입도요문론』이라고 하는 어록이 아주 잘되어 있습니다.

이 책에 보면 먼저 돈오를 내세우셨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닦아야 해탈을 할 수 있습니까?’하고 묻습니다. 그러니 대주 혜해 스님이 ‘돈오의 한 문만이 곧 해탈할 수 있느니라.’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돈오입니까?’하고 다시 묻습니다. ‘모든 망념을 한 번에 단박 없애는 것이 돈이요, 오란 본래 얻을 바 없음을 깨닫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돈오(頓悟). 큰 절에 가보시면 ‘이 문안에 들어오려면 알음알이를 두지 말라.’는 게송이 붙어 있는 것을 많이 보셨을 것입니다. 몰록 깨달아야 한다고 하니까 따로 깨달아야할 뭔가가 있다고 집착합니다. 하지만 『돈오입도요문론』에서의 말씀은 ‘이 문안에 들어오려면 지혜심인 알음알이를 두지 말라.’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모든 망념을 단박에 없애는 것이 ‘돈’라 했습니다. 그러고 나면 따로 깨달을 것이 없다는 것이지요. 따로 깨달을 것이 없음을 아는 것이 ‘오’라 했지요. 부처를 찾는다, 본래 주인공을 찾는다 하니까 현실을 떠나서 우리가 깨달아 찾아 얻어야할 그 무언가가 따로 있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제가 아까 ‘안녕하십니까?’ 하니 ‘예’ 했지요? 무엇이 듣고 무엇이 ‘예’ 했습니까. 거기에 부처가 있다 이겁니다. 그래서 모든 조사 스님들이 ‘육근문두 훨훨 다 벗어 버리고 실오라기 하나 묻지 않은 그 깨끗한 본래부처가 드러나 있다. 그것을 바로보라.’고 거듭거듭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그냥 바로 봐 버리면 되는 것인데 경전을 독경하고 조사 스님들의 법문을 듣고 기도하면서도 그것을 바로보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내 이야기를 귀로 듣고 눈으로 내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무엇이 보고 무엇이 듣고 있습니까. 이것을 떠나서는 따로 없는 것이기 때문에 조사 스님들이 한 결 같이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도를 어디 딴 곳에 가서 찾을 수가 없다. 우리가 이렇게 보고 듣고 밥 먹고 일하고 하는 일상생활 이 가운데서 찾으라. 그러나 도는 일상 생활하는 이 가운데 있는 것도 아니요, 또한 이것을 떠나서 따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데에서 바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우리 조계종의 수행법이 간화선 위주니까 부지런히 화두 하라고 하지요. 오늘 이 법회도 화두 참선 잘 하기 위해서 이 법회를 일주일간 하는 것 아닙니까. 옛날 조사 스님들께서 처음 화두를 제시할 때는 우리가 언하에 바로 깨달으라고 제시해주신 것입니다. 그 말 아래 바로 깨달은 분들도 많이 있었고 또 그렇지 못해서, 돌아가서 묵묵히 참구해서 깨달은 분들도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육조 스님의 적자로 알려진 남악 회양선사만 보더라도 육조 스님을 배알하려 왔는데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느냐.’고 물으니 대답을 못하고 돌아갔습니다.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느냐.’ 그 당시에 경전 공부도 많이 하고 열심히 한다고 했지만은 육조 스님이 이렇게 묻는 데는 도저히 입을 열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되돌아가서는 8년 동안을 참구했다고 합니다.

그랬듯이 우리는 조사 스님들이 화두를 일러 주신 그 도리를 즉시 깨닫지 못하니까 간화선이라는 방법에서는 의심하자는 것입니다. 화두는 의심이 생명이라고 합니다. 의심하기 위해서 조사선을 다시 간화선으로 방법을 조금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육조 스님께서 무슨 물건이냐고 물을 때 무엇을 일러서 물건이라고 했겠습니까. 이것은 물건이라고 하면 물건이요, 마음이라고도 하고 주인공이라고도 하고, 이 마음의 주인이라고도 하고, 부모미생전 본래면목, 부모로부터 이 몸 받아 나기 전에 본래면목이라고도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어떠한 도리이기에, 과연 이 도리가 무슨 도리기에 그러냐 말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절실히 ‘이 뭐꼬’ 하는 것입니다. 무슨 물건인지 모르지만 이 순간에도 분명히 보고 듣고 작용하는 놈이 있단 말입니다.

백천방편이 한마음 찾는 길
마음 떠나선 아무것도 없어

오온 ‘나’라 붙잡고 발버둥
본래 없음 깨닫고 다 버려야

화두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활구라고도 하고 사구라고도 말해놨습니다. 우리가 화두를 할 때는 바로 내 문제가 돼야 합니다. 조사 스님이 일러 놓은 화두를 들어 참구를 하되 이것이 바로 내 문제로 돌아와서 해결하려고 노력을 해야 의심이 납니다.

공부할 때는 간절 절자가 최고라고 합니다. 화두를 통해서 의심을 할 때, 알고자하는 마음이 사무쳐 간절한 생각이 사무쳐 들어가야 만이 정신이 하나로 집중됩니다. 앞서 말씀드린 듯 ‘돈’이란 모든 망념을 몰록 없애는 것이라 했습니다. 하나로 집중해서 선정 속에 깊이깊이 들어가야 만이 해결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분멸 망상이 없어지는 경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마음이 하나로 집중되지 않고서는 안 되고 그 하나로 집중하는 데는 의심이 최고이기 때문에 화두 할 때는 간절히 의심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한 생각을 꾸준하게 지속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의심이 사무쳐서, 화두 의심이 훨훨 타는 불덩이처럼 타고 있을 때는 무엇을 갔다 데든지 같이 불덩어리가 되잖아요. 그래서 그 자리에는 사량심이 붙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간화선에 ‘최 상승’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조사 스님들의 말씀만 인용을 했는데 그러면 초기 교설에 나타난 부처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볼까요.

부처님께서는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항상 깊게 관찰해서 자아가 있다는 그런 자아관념을 짓지 말라.’ 나라고 하는 개념을 만들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몸은 내 것이 아니고 마음도 내 것이 아니다. 지각도, 감각도 내 것이 아니다. 의식도 내 것이 아니니 버리라는 말씀이지요.

‘중생병’이라하면 몸의 병뿐만 아니라 마음의 병 등 가지가지라서 이를 모두 일러 ‘중생병’이라 합니다. 그 중에서 몸의 병은 좋은 의사 만나 좋은 약 먹으면 낳지만 마음의 병, 나에 집착해 있는, 자아 관념에 묶여 있는 이 병이 가장 근본 병입니다. 이 병 고치라고 부처님께서 그 많은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12연기에서 무명을 제일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어리석음, 무지인데 나라는 실체가 있다고 집착해 있는 자체를 이야기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무명이라 했습니다. 이것을 쉽게 말하면 나라는 관념에 묶여있는, 나에 집착하는 병이 무명입니다. 일체 중생 고가 이것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버려라, 버려라, 버려야 너를 위하는 것이다.’ 했습니다. 여러분들 지금 오온을 붙잡고 나, 나하고 살아가고 있잖아요. 이것을 나 인줄 알고 집착해서 이 몸뚱이 붙잡고 천년이나 만년이나 살 것이라 생각하고 욕망 성취하는 것이 행복인줄 알고 이 가운데서 행복을 잡아 보겠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지금 발버둥 치고 있지 않는가 말입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버려야 네가 생사해탈을 한다 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무상, 무아, 고 삼법인을 말씀하셨죠. 이것을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공부를 좀 해보려고 애를 써도 이 생각 저 생각 여러 가지 생각이 들어와서 괴롭히고 있고 한 순간이라도 내 마음을 내 뜻대로 고요하게 멈출 수가 없단 말입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제대로 발심이 안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첫째는 발심이 제대로 돼야 합니다. 그래서 옛날 스님들도 ‘공부 안 된다고 탓하지 말고 네가 발심 못한 것을 탓하라’ 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제대로 발심이 되느냐. 조금 전에 이야기한 그대로입니다. 무상을 알아야 합니다. 나라고 내세울 것도 없고 내 것이라고 할 것도 없는 이 도리를 먼저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제대로 된 발심이요, 이것을 아는 것이 도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시 연기로 말씀하셨는데, 이 연기를 다들 어렵게만 생각합니다. 무상, 무아. 무아이기 때문에 무상한 것이고 무상한 것이기 때문에 무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연기이기 때문에 무상이고, 무아입니다. 요즘말로 쉽게 말해서 조건이라고 말하는데, 조건에 따라 이것과 저것이 연관성을 가지고 존재하는 것이지 독자적으로 불변하는 것은 없다 이 말입니다.

부처님이 이 연기를 말씀하실 때는 이 세상 밖에 펼쳐져 있는 모든 물질 세상도 물론 포함이 되지만 근본적으로는 우리의 의식 세계, 소위 영혼이 존재냐 비존재냐, 그 영혼을 가리켜서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마음, 나라고 집착해 붙들어 잡고 사는 이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나라고 붙잡고 있는 이 ‘나’가 죽지 않고 남아 있어서 세세생생 몸만 바꿔서 계속 사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연기로 말씀하셨습니다. 인연 따라서 새롭게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소년 시절 없이 청년시절이 있을 수 없지요. 그렇다고 해서 소년시절과 청년시절이 같은 것도 아니지요. 그러니 소년시절 없는 청년시절이 없고, 노년시절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의식도 내 것이 아니다, 감각도, 지각도, 모두 내 것이 아니다 버려라. 나란 없다 하니 다시 질문이 들어갑니다. ‘내가 없고 내가 없이 행위를 한다면 그 행위의 결과를 받는 자는 누구입니까.’ 묻습니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질문이잖아요. 우리는 인과법을 이야기 할 때 죄지으면 죄 값 받으니 죄짓지 말고 복 짓는 일 해라고 하는데 낙 없으면 죄 짓는 자는 누구고 받는 자는 누구인가. 같으냐, 다르냐 입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그 질문은 요점을 벗어났다.’고 하시며 소년과 청년의 비유를 하신 것입니다. ‘행위한자가 그대로 행위의 결과를 받는다고 하는 것은 맞지 않지만 행위 하는 자와 행위 받는 자가 둘이라고 하는 것도 맞지 않다’ 하십니다. 불변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없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 우리의 모든 업이 조건에 따라 변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상입니다. 한 결 같이 불변성을 갖고 존재한다면 무상이 아니지요.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계속되는 연속성입니다.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면서 항상 변해가고 있는 도리이기 때문에 행위 하는 자와 행위의 결과를 경험하는 자가 하나도 아니면서 다른 놈, 둘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변하는 것이기 때문에 같다고 말하면 맞지 않습니다.

연기는 이렇게 이해하셔야 합니다. 인과 이야기를 하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것도 과거 생에 우리가 지어놓은 대가를 받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죠? 이 말도 맞지만 그것을 잘못 이해하면 숙명론자가 됩니다. 연기이기 때문에 다 놓아 버리고 새로 만들면 새로운 삶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게 연기입니다. 그래서 잘 살라, 잘 지으라는 것입니다. 과거 지난날에 설사 내가 좀 어리석고 몰라서 허물된 일을 많이 했어도 지금 이 순간부터 알아차려 놓아버리고 다시 새롭게 선행을 하고 마음을 가다듬어서 지혜를 닦고 마음 잘 쓰면 착한 사람으로 바뀐다 이 말입니다.

우리가 죄의식에 매여 죄, 죄하며 우리의 죄업이 어디 창고에 쌓여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어디에도 우리의 죄업이 쌓여 있는 것이 없습니다. 왜? 오온개공이니까. 본래 없는 것이니까. 죄업자체도 본래 공한 것으로 봐야 소멸이 됩니다. 천수경에도 분명히 나오지 않습니까. 심약멸시죄역망(心若滅是罪亦亡), 마음이 없어지니까 죄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마음이 스스로 만들어 짊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금강경』에 보면 과거심도 현재심도 미래심도 거두어 잡을 수가 없다고 했죠.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마음이라는 것은 연기이기 때문에 계속되는 흐름에 있기 때문이지요. 나는 이렇게 예기합니다. 과거심도, 현재심도, 미래심도 불가득이라 했지만 현재심에 초점을 맞추자고 합니다. 현재심. ‘지금 이 순간에 있으라.’ 이 말입니다. 지금 이 순간뿐입니다. 왜? 계속 흘러 버리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흘러가 버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순간에 깨어 있는 것만이 내가 사는 것이라. 이 도리를 깨닫자는 것입니다. 부처라는 실체를 따로 찾지 말고 이 도리를 깨닫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간절함 사무쳐야 망상없고
선정에서 분별심이 사라져

무상-무아 알면 생사해탈
현재심에서 깨어 있어야

그냥 버리라고 해서 이 생각 저 생각 다 놓아 버리고 멍청하게 있으면 안 됩니다. 쉽게 말하자면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놓치지 말고 알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선가에서 많이 쓰는 말이 있지요. 주인공, 본래면목, 참 나. 그런데 이것을 찾으라 하니 어떤 실체가 현실을 떠나 따로 존재하고 그 놈을 찾으려 한다면 이것은 어긋나는 것이요 부처님 법이 아닙니다. 연기에다가, 현재심에다가 초점을 맞추자 이것입니다. 지금 말하니 여러분이 듣고 지금 이 순간 그것뿐입니다.

우리가 이 도리를 확연하게 알고 무상, 무아, 이 도리를 알아야만 생사해탈 할 것 아닙니까. 우리가 집착해 알고 있는 것처럼 이 세상 성취하는 것만이 행복한 것이라면 누가 도 닦으려 하겠습니까. 이 행복한 세상을 왜 벗어나려 하겠어요. 그렇다고 우리의 삶을 완전히 떠나서 따로 찾는 것도 부처님 법이 아니다 이 말입니다. 우리가 도인됐다고 부처됐다고 딴 세계로 가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이대로서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그때의 삶이 진짜 이 세상에서 최고의 행복한 삶이라고 했습니다.

나라는 개인적인 관념에 묶이지 않고 모든 이를 다 같은 부처님으로 보고 너니 나니 잘났느니 못났느니 너 잘했느니 못했느니 하는 분별심에서 벗어나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쉽지 않아요. 쉽게 안 되니까 우리는 부지런히 참선해서 선정을 얻어야 합니다. 선정, 선정 속에 들어가야만 이것이 해결됩니다. 모든 업이 다 녹아 없어집니다. 본래 업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본래 공이기 때문에 선정 속에 들어가면 다 없어져 버립니다. 그래서 본래 얻을 바 없는 도리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시겠어요? 열심히 합시다.

정리=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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