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⑫ 일제시대 불교계 저항운동 진원지 중앙학림

기자명 법보신문

[새로쓰는 근현대 불교사]3·1만세운동 주도한 불교계 항일운동 산실

1920년 불교 인재양성 위해 총독부 권유로 설립
신상완·백성욱·김법린 등 걸출한 인재들 배출
상해임시정부와 연결된 불교계 항일지사 배출구

<사진설명>당시 숭일동 지금의 명륜동 북묘 터에 있었던 중앙학림.

근대 불교계의 당면 과제는 포교·교육·역경사업이었다. 지금도 이 세 가지 사업은 다른 사업에 비해서 종단에서 역점을 두고 있다.

이 세 가지 사업은 형식은 다르지만 모두 하나로 연결된다. 세 가지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업은 포교 사업이다. 왜냐하면 불교의 목적이 깨달음을 통하여 해탈을 얻는데 있고, 모든 사람들이 그 목적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에 교리를 전파하는 포교 사업이 우선이다. 불교계의 교육 사업은 유능한 포교사를 양성하기 위해서 필요하며, 역경사업은 어떤 방법으로 포교할 것인가에 하나의 대안일 수 있다. 포교와 역경의 주체가 사람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교육 사업은 포교사업 못지않게 중요하다. 그런 까닭에 개항 이후부터 불교계는 초등 과정부터 고급과정에 이르기까지 각 사찰에 강원을 설립하여 강원 교육을 실시하고 또 종립학교를 운영하여왔다.

일제시대 1915년부터 1922년까지 존속하였던 불교계의 고등교육기관인 중앙학림은 3·1운동을 비롯하여 상해 임시정부와 연결을 가지고 국내 항일활동에 참가하였던 인재들을 배출한 산실이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1920년대 초반 불교계 항일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던 중앙학림의 설립은 조선총독부의 권유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중앙학림의 출범 배경은 1915년 1월 1일부터 10일까지 각황사에서 개최된 30본산 주지회 의원 정기총회에서 중앙학림 설립에 관한 사항이 논의됨으로서 시작된다. 이 회의에서는 조선사찰각본사연합제규(朝鮮寺刹各本寺聯合制規)를 제정하고 30본산연합사무소 체제를 탄생시켰다. 그런데 1월 4일 이 회의장에 총독부의 내무부장과 지방국장 그리고 고등보통학교교유(高等普通學校敎諭) 다카하시 도오루(高橋亨)가 방문하여 조선불교에 관한 훈유(訓諭)를 하였다. 그 다음날은 이완용(李完用)이 회의장을 방문하여 불교진흥에 관해 권면하였다. 그리고 1월 9일에는 고하라(小原) 지방국장, 사와다(澤田) 과장, 와타나베(渡邊)주임, 다카하시 교유가 찾아와서 조선각본사연합제규의 취지를 설명하고, 조선불교중앙학림 설립에 관한 의견을 전하였다. 고등교육기관인 중앙학림의 설립은 불교계의 바람이었지만 총독부의 권유를 받아서 성사된 셈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중앙학림은 1915년 11월 5일 개교하게 된다. 학교의 위치는 처음에는 창신동 30본산주지회의원 안에 두기로 하였으나 실제로 문을 연 곳은 당시 숭일동 지금의 명륜동 북묘(北廟의) 기지(基址)를 총독부로부터 빌려서 쓰기로 하였다. 북묘는 삼국지에 등장하는 관우를 모신 사당이다. 학생 모집은 30본사를 9등급으로 나누어 등지별로 인원수를 제한하였는데 모집 학생 수는 120명이었다. 모든 학비는 본말사에서 부담하기로 하고 매월 6원씩 지급하기로 하였다. 이 가운데 3원은 연합사무소로 보내고 나머지 3원은 학생들의 자유 경비로 쓰게 하였다.

학장은 30본산연합사무소위원장인 강대련(姜大蓮), 학감 김하산(金河山), 강사 백초월(白初月), 국어교사 송헌석(宋憲奭), 산술교사 이명칠(李明七) 기숙사 사감인 료감(寮監)은 오리산(吳梨山) 등 이었다. 당시 중앙학림의 입학 조건은 전통 강원을 졸업한 강사 자격을 갖춘 승려들이었기 때문에 상당한 수준에 도달한 사람들이었다. 중앙학림을 졸업한 학생은 포교사로 인정하여 각처에 보내어 포교업무에 종사하도록 하였다.

총독부는 중앙학림의 설립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후원을 하였는데 당시 학무국 편집과장이던 오다 쇼고(小田省吾)를 고문으로 두었다. 오다는 후일 경성제대 교수가 되어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하여 우리 역사를 왜곡시키는데 앞장선 사람이다. 1916년 1월 5일 총독부 내무부 장관 우사미(宇佐美)는 30본산연합사무소 위원장과 상치원을 초청한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하였다.

“중앙학림의 설립 목적은 총준(總俊) 한 학생을 양성하여 장래의 각 사찰의 주지 또는 포교사가 될 자료에 있은 즉 제군(諸君)은 열심히 노력하여 정부의 희망을 충분케 하라” 우자미의 이 말은 똑똑한 학생들을 잘 교육시켜서 불교계가 총독부의 시책에 협조할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총독부의 후원을 받아서 개교한 중앙학림은 총독부의 여망과는 반대되는 항일운동에 앞장서게 된다. 지금부터 중앙학림의 학생들이 어떤 활동을 하였는지 살펴보자.

일제시대 최대의 민족운동은 3·1운동이었다. 불교계의 3·1운동은 한용운의 활동으로 시작된다. 그는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는 중앙학림 학생들을 통하여 3·1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데 기여하였다. 1918년 9월 한용운은 경성부 계동에서 잡지 유심(惟心)을 발간하여 민중들의 의식계몽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1919년 2월 28일 밤 계동 자신의 집으로 평소 자신을 따르던 중앙학림 학생들을 모이게 하였다. 이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은 신상완(申尙玩)△백성욱(白性郁)△김상헌(金尙憲)△정병헌(鄭秉憲)△김대용(金大鎔)△오택언(吳澤彦)△김봉신(金奉信)△김법린(金法麟)△박민오(朴玟悟) 등 이었다.

그는 보성사에서 인쇄한 독립선언서 3만 매를 천도교·기독교·불교 각 교단에서 만 매씩 배부키로 하였다고 전하고, 여기 모인 청년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경성과 지방에 배포하라고 당부하였다.

이러한 지시를 받은 학생들은 인근에 있는 인사동 범어사 포교당으로 자리를 옮겨 구체적인 실행방안을 협의하였다. 학생들은 연장자인 신상완을 총수격으로 추대하였고, 백성욱△박민오는 참모격으로 중앙에 남기기로 하였다.

나머지 사람들은 각기 연고가 있는 지역으로 내려가서 선언식을 거행하고 만세시위를 주도할 것을 결의하였다. 불교계의 3·1운동의 전개는 대체로 이들 중앙학림 학생들의 활동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들은 범어사,해인사,통도사,동화사 등으로 내려가서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불교계의 3·1운동에 관해서는 다음에 별도로 소개하겠지만 이들 청년 학생들 가운데 신상완은 3·1운동 이후 중국 상해에 성립한 임시정부와 연결을 가지고 활동하였다.

그는 1919년 4월 하순 경 상해로 건너가서 임시정부 요인들을 만나고 귀국하였다. 그 해 7월 그는 다시 상해로 건너가서 국내에서 백초월과 김봉신으로부터 전해 받은 2천원을 당시 임시정부 내무총장이었던 안창호에게 전달하였다. 신상완은 승려들로 구성된 항일무장투쟁 단체인 임시의용승군을 조직할 것을 구상하고 추진중에 1920년 일본 경찰에 체포됨으로써 이 계획은 무산되었다.

지방으로 내려가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던 중앙학림의 학생들은 혹 검거되기도 하고, 혹은 귀경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신상완의 집에서 향후의 활동 방안을 모색하였다. 학생들은 4월 하순에 상해에 임시정부가 성립하였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신상완△백성욱△김대용△김법린 등 4명은 상해로 밀항하였다. 신상완과 백성욱은 임시정부의 국내특파원으로 불교계의 운동을 지도하기 위하여 5월 중순에 귀국하였다. 이들은 귀국 후 김상호△김상헌△박민오△김봉신 등과 『혁신공보』라는 지하신문을 간행하여 해외 소식을 국내에 알렸다.

<사진설명>김법린의 1920년 중앙학림 졸업증서.

1919년 10월 무렵 김상호△김상헌△김석두 등은 범어사의 원로였던 이담해(李湛海)△오성월(吳惺月)△김경산(金擎山) 그리고 중견이었던 오리산 등과 협의하여 거액의 군자금을 모아서 김상호가 상해 임시정부에 전달하였다. 상해 임시정부는 이담해△오성월△김경산 세 원로를 고문으로 추대하였다. 김상호는 세 승려의 임시정부 고문 추대장을 가지고 돌아와 국내 불교계 비밀 통신사무를 담당하였다. 중앙학림 학생들은 1920년에 창립된 조선불교청년회와 불교유신회의 주요 멤버로서 불교계의 개혁운동에 앞장섰다. 신상완·김법린·김대용 등이 주축이 되어 당시 종교계에서 운영하던 천도교의 보성전문학교 기독교의 연희전문학교와 이화여자전문학교 등이 모두 전문학교였음에 반해서 중앙학림은 전문학교로 인가를 받지 못한데 대하여 전문학교 승격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1921년 수차례의 학생모임을 주도하여 중앙불교전문학교 승격에 대한 6개항의 결의문을 채택하고 이 사안이 관철되지 않을 경우 동맹휴학을 하겠다고 선언하였다. 당시 30본산연합사무소 측은 학생들의 요구가 정당하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재단법인의 구성과 증자(增資) 그리고 시설확충에 따른 제반 문제로 당장은 수용이 곤란하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무엇보다도 총독부 당국은 중앙학림이 불교계 항일운동의 중심이라는 이유로 전문학교 승격을 거부하였다.

학생들은 동맹휴학에 들어갔고 중앙학림은 이러한 이유로 1922년 4월을 기점으로 5개년 간 휴교 상태로 들어간다. 그 후 1928년 중앙전수학교로 다시 문을 열게 된다.
 
김순석(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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